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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건설 인수전 대세는 ‘비교우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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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30년 대북독점사업 시너지 vs 현대차 자금여력 4조5천억

추석 연휴가 시작된 지난 9월 21일. 한 TV 광고가 시청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고 정몽헌 전 현대그룹 회장이 주인공으로 나란히 등장한 흑백사진이 그것이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매각 공고를 앞두고 내보내기 시작한 이 TV 광고는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대건설을 창립했고, 정몽헌 회장은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해 4400억원의 사재를 출연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현대건설에 대한 연고권이 현대그룹에 있음을 강조한 셈이다.

[경제]현대건설 인수전 대세는 ‘비교우위론’

이 광고는 다분히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현대차그룹을 겨냥한 것이다. 지난 여름부터 현대건설 인수 의지를 표명한 현대차그룹은 매각 공고가 나자 9월 27일 매각 입찰서류를 접수했다. 현대그룹으로서는 강력한 경쟁자인 현대차그룹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현대건설 인수를 두고 범현대가의 경쟁이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2년 전 현대그룹과 현대중공업의 경쟁에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으로 상대가 바뀌었을 뿐이다. 이미 수년 동안 현대건설 인수에 공을 들여온 현대그룹으로서는 훨씬 덩치가 큰 상대를 맞이한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계열사 간 연계사업을 통한 시너지 효과가 커 현대건설을 반드시 가져오겠다는 입장이지만, 현대그룹은 지주회사 격인 현대상선의 지분이 달린 문제인 만큼 배수진을 치겠다는 입장이어서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앞으로 2개월간 진행될 인수전에서 양쪽은 치열한 경쟁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그룹은 9월 27일 현대건설 인수 참여를 선언하며 “그동안 그룹 숙원사업이었던 현대제철 일관제철소를 성공적으로 완공했고, 자동차사업도 글로벌 시장에서 안정적인 궤도에 올랐기 때문에 미래 성장을 위한 그룹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강화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밝혔다.

경쟁기업 시너지 효과엔 엇갈린 반응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 참여에 대한 현대그룹의 입장은 한마디로 못마땅하다는 것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전에 뛰어든 것은 불과 몇 개월 전”이라며 “현대건설이 어려웠을 때는 현대차그룹이 지원을 외면하다가 현대건설이 정상화되자 이제 와서 현대그룹과 경쟁하여 인수하겠다는 것은 유감”이라고 밝혔다. 2000년 8월 현대건설이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관리에 들어갈 때 현대차그룹이 현대그룹의 지원요청을 외면했고, 한 발 더 나아가 현대엠코라는 건설사까지 따로 만들었던 과거를 지적한 것이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현대건설이 플랜트 분야에 강한 곳인데도 이후 현대차, 현대제철 등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공사 수주는 단 한 건도 없었다”며 “그동안 철저하게 외면하다가 이제야 인수에 뛰어든 것에 대한 납득할 만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참여를 공식 선언하면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힘겨루기가 공식화됐다. 명분 면에서는 현대그룹이, 인수자금과 시너지 면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앞서는 것으로 분석된다. | 연합뉴스

현대자동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참여를 공식 선언하면서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힘겨루기가 공식화됐다. 명분 면에서는 현대그룹이, 인수자금과 시너지 면에서는 현대차그룹이 앞서는 것으로 분석된다. | 연합뉴스

이에 대해 현대차그룹의 입장은 “당시 기아차를 인수한 직후라 여력이 없던 시기”라며 “더 이상 장자, 적통 등 명분 싸움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현대가의 적통을 잇는다는 명분 때문에 4조원이 넘는 인수·합병에 뛰어들겠는가?”라고 반문하며 “기업은 이윤을 먹고 사는 조직으로, 현대건설을 인수해 자동차 외에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겠다는 것이 현대차그룹의 목표이자 전략”이라고 밝혔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어느 정도 그룹 내 수직계열화가 이뤄진 상태. 현대자동차는 유럽과 미주 생산공장 구축에 이어 최근 러시아 생산공장을 준공했고, 향후 브라질 공장도 계획하는 등 글로벌화에 성공했다는 평가다. 또한 현대제철도 당진에 고로를 건설하면서 대량생산체제를 구축했다는 설명이다. 그룹 관계자는 “특히 현대차가 글로벌 5위로 오른 상황에서 이같은 인프라를 바탕으로 현대건설을 세계 10위의 건설기업으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 “현대차그룹은 법정관리 상태의 기아차를 인수해 10년 만에 연매출을 10배로 올려놓았고, 부실덩어리 한보철강을 인수해 현대제철로 탈바꿈시키는 등 인수·합병을 통해 쓰러져 가는 기업을 살린 노하우가 있다”고 주장했다.

지주회사 현대상선 지분걸려 배수진
재계에서는 현대차그룹과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 이후 행보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두 그룹이 단순히 현대건설이라는 기업 하나만 보고 인수전에 뛰어든 것은 아니라는 관측 때문이다.

우선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에 있어 가장 관심을 끄는 대목 중 하나는 현대건설이 보유한 현대상선 지분이다. 현대건설이 현대차에 넘어가면 현대건설의 현대상선 지분 8.3%도 현대차로 넘어간다. 시장에선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면 현대상선 지분을 현대중공업에 매각할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5500억~6000억원의 매각대금으로 앞선 HMC증권(옛 신흥증권) 인수 때처럼 자금부담을 덜 것이란 예상이다. 이 경우 현대중공업의 현대상선 지분은 33.8%, KCC와 현대삼호중공업 등 범현대가 지분을 합하면 40%에 육박한다. 현정은 회장 측 현대상선 지분(44.2%)과 불과 4%포인트 차이다. 현대엘리베이터를 축으로 현대상선, 현대로지엠(현대택배)으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갖고 있는 현대그룹으로선 사활을 걸고 현대건설 인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하지만 이 경우 현대의 정씨 일가가 현 회장을 고립시켰다는 세간의 원성을 살 수 있어 쉽지 않은 선택이다. 때문에 현대차가 현대그룹에 현대건설 포기를 조건으로 현대상선 지분의 우선매수권을 주는 형태의 협상안이 나올 것이란 시나리오가 증권가에 돌고 있다. 외부 차입을 통해 부족한 인수자금을 채우려는 현대그룹으로서도 정통성만 내세우면서 무리하게 인수를 시도할 경우의 어려움에서 비켜갈 수 있는 방안이기도 하다.

현대그룹이 최근 방영하기 시작한 TV 광고.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부자의 흑백사진을 잇따라 보여주며 현대건설에 대한 연고권이 현대그룹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연합뉴스

현대그룹이 최근 방영하기 시작한 TV 광고. 작고한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부자의 흑백사진을 잇따라 보여주며 현대건설에 대한 연고권이 현대그룹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 연합뉴스

두 그룹 간의 정통성 논쟁과 달리 재계 안팎에서는 채권단과 국민들의 도움으로 현대건설이 회생한 만큼 매각 역시 공정한 기준과 절차를 통해 진행돼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다. 연고권 등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공정한 경쟁을 통해 현대건설 인수 능력, 인수 후 시너지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시장에서는 그룹 전체 외형이나 현금성 자산을 비교하면 현대차가 유리할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차는 현금성 자산을 4조5000억원 가량 보유해 1조5000억원 가량을 준비한 현대그룹에 크게 앞서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채권단은 인수자금의 외부 차입에 대해 신중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2006년 11월 금호아시아나그룹이 6조원이 넘는 막대한 인수자금을 들여 대우건설을 품은 뒤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현대그룹 관계자는 “국내 기업들의 굵직한 인수·합병에서 인수자금에 대한 외부 차입이 없었던 적이 있었느냐”며 “우리의 외부 차입 규모는 그리 크지 않기 때문에 ‘승자저주’ ‘풋백옵션’ 등의 우려는 없다”고 강조했다.

국민기업 현대건설 공정경쟁 최우선
시너지 효과 측면에서도 현대차그룹의 점수가 높다. 현대차그룹은 기본적인 그룹 공사물량이 많은 데다 글로벌 기업인 만큼 해외건설사업과 연계해 추진할 것이 많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현대차 관계자는 “현대건설을 누가 어떻게 얼마나 키울 수 있을 것인가를 보아야 한다”며 “원전 등의 친환경 발전사업에서부터 주택용 충전시스템과 연계된 친환경 주택, 하이브리드 및 전기차와 같은 친환경 자동차에 이르는 에코 밸류 체인 완성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이같은 현대차의 비전에 대해 현대그룹은 “논리가 부족하다”는 주장이다. 현대차는 이미 여러 계열사를 보유하고 있지만 대개는 어떤 식으로든 자동차산업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이번 현대건설 인수전 참여는 사업 유사성의 관점에서 보면 논리적으로 부족한 감이 있다는 설명이다. 대신 현대그룹은 대북 SOC사업의 30년 독점권을 내세워 현대건설의 시너지를 강조하고 있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최근 남북관계가 좋지 않지만 곧 풀릴 것이고, 경제규모를 최대 400조원까지 바라보는 이 사업을 현대건설이 진행할 것”이라며 “또한 현대상선과 현대로지엠의 자재와 물류 분야, 엘리베이터 사업도 큰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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