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추련(2) ‘열사의 친구’ 황상규 화려한 컴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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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진-이재호’ 뜻이어 반핵평화운동에 투신… 공추련 활동가로 핵문제 본격 제기

공추련 시절의 반핵시위. 반핵운동은 ‘환경운동의 꽃’ 으로 불린다.

공추련 시절의 반핵시위. 반핵운동은 ‘환경운동의 꽃’ 으로 불린다.

황상규(현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전문위원)가 반공해운동에 복귀한 것은 1988년 8월이었다. ‘복귀’라는 말 속에는 이탈이나 결별, 퇴출 등의 행위가 전제돼 있다. 즉 그는 어떤 연유로 반공해운동권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다. 그 연유가 조금 복잡해 설명이 필요하다.

지금은 CSR(기업의 사회책임) 전문가로서 대통령자문 지속가능발전위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그의 원래 전공은 반핵운동이었다. 학생운동가에서 반핵운동가, 환경운동가로 활동의 폭을 넓혀오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환경윤리학 박사학위를 확보한 그는 최근까지 환경운동연합 사무처장직에 있었다. 거기서 그가 한 일도 기업의 ‘환경책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사회책임’을 다뤘다.

남은 삶은 ‘열사’들을 위한 것

과거 반공해운동권에서 그는 한 가지 독보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었다. ‘반전 반핵, 양키 고 홈’을 외치고 분신한 김세진·이재호의 절친한 친구라는 점이다. 그것도 사적인 친구 관계를 넘어서 반미·반핵 학생운동의 최전선에서 함께 활동한 이념적 동지였다. 그가 감옥에서 두 사람의 분신 소식을 듣고 마치 자신이 분신한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극심한 심적 고통과 혼란을 겪은 데는 이런 강력한 인과관계가 작용했을 터이다.

그는 두 ‘열사’가 분신하기 한 달 전인 1986년 3월 반핵 대자보 사건으로 먼저 구속되는 바람에 분신의 격랑에서 비켜 섰다. 하지만 그 충격파에서는 벗어날 수 없었다.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고 감옥 안에서 자신의 의지와 씨름한 끝에 그는 결론을 내렸다. 이제는 나도 죽은 목숨이다. 남은 삶은 ‘열사들’이 했던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 정신으로 사는 것이 도리다….

1987년 7월 초순 1년 4개월 만에 석방된 그는 반공해운동협의회(이하 반공협)와 결합했다. 이때가 ‘언더’ 조직이던 반공협이 공해추방운동청년협의회(이하 공청협)로 ‘오픈’ 조직화하는 과정이었다. 그 핵심 세력이 안병옥(현 시민환경연구소 부소장)과 박상철(현 환경운동연합 감사, 공인회계사)이었다.

이들은 경기도 부천 성심여대(현 가톨릭대) 앞의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을 아지트로 삼았다. 세 사람은 여기서 숙식을 하며 다른 활동가들과 함께 공청협 오픈 작업을 벌였다. 서울 신림동과 대방동 등지를 전전하다 이곳으로 근거지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수사기관의 시선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구로구청 사태로 두 번째 투옥

[秘錄환경운동25년]공추련(2) ‘열사의 친구’ 황상규 화려한 컴백

1987년 10월 10일 공청협이 떴을 때 정국은 대선국면에 돌입해 있었다. 황상규가 두 번째 반공해운동권을 떠나는 사건이 이때 벌어진다. 13대 대선 직후 터진 구로구청사건 때였다. 안병옥·황상규 등 공청협 활동가들은 12월 16일 밤 TV를 통해 서울 구로구청 농성사태를 접하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수천명의 학생·시민이 “밀반출된 부재자 투표함을 공개하라”며 농성하다 진압된 이 사건으로 1000여 명이 연행되고 200여 명이 구속된다. 황상규는 이때 두 번째 영어의 몸이 된다.

그는 다른 공청협 멤버와는 처지가 달랐다. 단순가담자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전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투 스타’가 되고 반공해운동권과도 잠시 ‘격리’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아지트로 돌아온 안병옥 등 공청협 활동가들은 깜짝 놀랐다. 구로구청사건을 수습하는 과정에 이들의 아지트 아래층 가게가 성심여대 담당 기관원들의 아지트라는 게 밝혀진 것이다. 호랑이를 피하려고 들어간 곳이 바로 호랑이 굴이었던 격이다.

황상규가 다시 풀려난 때는 1988년 8월이었다. 이번에는 공해추방운동연합(이하 공추련) 조직 작업이 한창이던 시점이었다. 공추련에서 그의 ‘자리’는 이미 마련돼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추련은 두 가지 분명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 공해추방과 반핵평화였다. 그러니 ‘열사들의 친구’ 황상규가 반핵평화 말고 무슨 다른 일을 할 수 있을까. 공추련 특별위원회인 ‘반핵평화위원회 간사’는 당연히 그에게 돌아올 자리였다.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창립식을 가진 공추련은 이전의 반공해운동조직과는 다른 체계를 갖췄다. 이사회(명망가)와 연구원(활동가)의 이원적 구조를 가진 한국공해문제연구소(이하 공문연)나 공해반대시민운동협의회(공민협)와 달랐다. 이들 조직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권은 이사회가 갖고 있었다. 즉 명망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공추련의 조직구조는 활동가 중심으로 짜였다.

창립 당시의 공추련 주요 활동가들. 왼쪽부터 이상영 총무부장, 안병옥 조직부장, 이성실 선전부장, 황상규 반핵평화위 간사.

창립 당시의 공추련 주요 활동가들. 왼쪽부터 이상영 총무부장, 안병옥 조직부장, 이성실 선전부장, 황상규 반핵평화위 간사.

창립 당시의 공추련 조직도를 보면 맨 위에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총회가 있다. 그 아래에 공동의장이 있고 그 사이에 ‘지도위원회’라는 이름으로 명망가 그룹이 배치됐다. 명망가를 참여시키되 지도 내지 후원에 머물도록 한 것이다. 반공해운동의 창립자 격인 최열(현 환경재단 대표), 공민협을 대표하는 서진옥(미국 거주), 공청협을 대표하는 이덕희(현 영화과학 대표이사)의 3인 공동의장 체제를 34명의 지도위원이 받쳐주는 형태였다. 다음은 창립 당시의 지도위원 명단(괄호 안은 당시 직함).

고영구(변호사) 김용태(화가) 김재훈(한겨레사회연구소 이사) 김정남(평화신문 편집위원) 김재규(부산민주시민협의회 사무국장) 김지하(시인) 김흥식(통일학회장) 박용일(변호사) 서한태(목포녹색연구회장) 손학규(전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송기원(실천문학사 대표) 오종우(치과의사) 원경(스님) 윤구병(충북대 철학과 교수) 이미경(한국여성단체연합 부회장) 이부영(서민투련 위원장) 이수인(영남대 정외과 교수) 이애주(서울대 체육과 교수) 이오덕(아동문학가) 임진택(연출가) 오재길(정농회 회장) 전홍준(핵전쟁방지의사협의회 국제이사) 조성우(평화연구소 소장) 조영래(변호사) 조건영(건축가) 정동익(도서출판 아침 대표) 정호영(가톨릭농민회 지도신부) 장원석(단국대 농업경제학 교수) 정성헌(가톨릭농민회 사무국장) 최재현(서강대 사회학과 교수) 최동전(동광출판사 대표) 최병모(변호사) 홍근수(향린교회 목사) 황상익(서울대 의대 교수)

최고의사결정기구인 총회의 권한을 위임받는 집행기구는 중앙위원회였다. 공추련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 중앙위원회는 실질적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그 산하조직인 반핵평화위원회, 연구실, 총무국, 선전국, 조직국, 출판국에 소속된 활동회원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이 공추련의 주축으로서 운동의 질적·양적 성장을 이끈 환경운동가들이다.

이들은 대외적으로는 ‘간사’, 내부적으로는 ‘활동가’로 불렸는데 상근·비상근 회원으로 구성됐다. 상근자는 직업 환경운동가의 길을 택한 사람이고, 직장을 가진 비상근자는 겸업 환경운동가를 지향했다. 비상근자는 직장에서 퇴근하면 공추련 사무실로 ‘출근’해 상근 활동가와 업무를 함께 했다.

가짜 약혼자가 평생의 반려자로

창립 당시 주요 활동가는 총무부장 이상영(현 친환경상품진흥원장), 조직부장 안병옥, 선전부장 이성실(현 자연그림책작가) 등과 박상철·최예용·유수훈·방선민·황상규·박정화·손미경·권헌열·이향숙 등 공청협·공민협 출신의 청년 그룹이었다. 이들은 단순한 동지 관계를 넘어 가족적인 분위기로 뭉쳐 있었다. 많은 사람이 이때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었다고 회고할 정도다(지금도 이들은 매년 ‘공추련 OB 모임’을 갖는다).

진짜 가족이 된 경우도 있다. 유수훈-방선민, 황상규-박정화 커플이 그렇다. 유수훈-방선민 부부는 어릴 적부터 사귀던 관계고, 그 때문에 환경운동을 하게 됐지만 황상규-박정화 부부는 그 반대다. 환경운동을 하는 바람에 인연을 맺었다.
박정화(현 숲연구소 교육위원)는 이화여대 과학교육과 83학번으로, 학교 축제 때 최열 초청강연회를 진행하다 환경운동을 하게 됐다. 연금 상태에 있던 최열을 정문이 아닌 ‘개구멍’으로 안내해 강연을 성사시킨 당사자로 유명하다. 그게 인연이 돼 최열의 소개로 반공협에 가입해 ‘환경공부’를 시작했다.

공추련 창립 전인 1988년 여름 전남 영광에서 실시한 공민협·공청협 합동 반핵농활. 김근배 농활대장을 비롯 이성실·이향숙·박상철·김재호·최예용 등이 참여했다.

공추련 창립 전인 1988년 여름 전남 영광에서 실시한 공민협·공청협 합동 반핵농활. 김근배 농활대장을 비롯 이성실·이향숙·박상철·김재호·최예용 등이 참여했다.

황상규와 ‘특별한’ 관계가 된 것은 구로구청사건 때였다. 그가 구속됐을 때 옥바라지는 공청협 몫이었다. 구속자 면회는 가족이나 가족이 될 사람이라야 잘 시켜준다. 공청협은 박정화에게 ‘황상규의 약혼자’ 역을 하도록 했다. 그런데 면회를 다니면서 진짜 약혼자가 돼 버렸다.

공추련이 활동가 중심의 조직이라는 점은 1988년 9월 10일 창립총회에서 채택한 강령에서도 잘 드러난다. 환경운동사를 연구한 구도환 환경사회연구소장은 “공추련은 반핵운동과 반공해운동을 ‘민중적’ 입장에서 추진했다”고 규정했다(박사학위 논문 ‘한국 환경운동의 역사와 특성’, 1994년). 즉 학생운동권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을 그대로 채택한 것이라는 얘기다. 공추련 강령은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는 이 땅의 민중에게 잠재되어 있는 거대한 변혁적 힘을 바탕으로 당면한 공해와 핵의 위협으로부터 민중의 노동과 생활을 수호하고 나아가 사회적 불평등과 자연으로부터의 소외가 극복된 진정한 민주사회를 건설….”

민중, 변혁, 공해, 핵, 노동, 사회적 불평등, 소외 등 운동권 용어 일색이다. 학생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던 젊은 활동가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공해와 더불어 ‘핵’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간단치 않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반공해운동권이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는 뜻과 함께 학생운동과 사회운동 전반에서 부각된 반미·반핵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타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핵문제를 발판으로 운동의 외연을 크게 확대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은 것이다.

따라서 ‘김세진·이재호 열사의 친구’인 데다 감옥을 두 번이나 갔다 온 황상규가 공추련에서 갖는 위상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학생운동권 핵심부에서 단련된 만큼 운동을 하는 품새도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역할이 맡겨질 것이라는 예상은 누구든 할 수 있었다.

어느 조직이든 노른자위 부서가 있고, 그 조직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있다. 운동권에 무슨 ‘요직’이 있을까마는 어떤 조직이든 잡무가 있는 반면 ‘때깔’ 나는 일도 따로 있게 마련이다. 공추련 활동가들의 업무 중에 굳이 이런 것을 찾는다면 그것은 ‘반핵’이었다. 반핵평화위원장 자리를 선임 공동의장인 최열이 꿰찬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간사 자리는 당연히 황상규의 몫이었다.

핵문제는 환경분야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 나아가 지구적 차원의 숙제에 해당한다. 이를 둘러싼 논쟁 또한 첨예한 부분부터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복잡다단하다. 환경운동에서 핵이 차지하는 비중이나 중요성을 설명하는 것만도 책 한권 분량으로도 모자랄 지경이다.

이를 단순화시키면 환경운동권에서 핵과 관련한 논란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뉘어 진행돼왔다. 하나는 환경운동도 사회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생산력 발달의 기초 위에서 가야 한다는 쪽으로서, 핵문제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한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적게 쓰고 적게 발전하고 질적으로 가야 한다는 쪽으로, 핵문제에 대해 단호한 입장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름을 떠나 이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한 논쟁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공추련 반핵활동가로서 ‘위험한 에너지 핵’(거름출판사, 1991년)을 낸 바 있는 황상규의 최근 얘기를 들어보면….

“핵문제는 단순히 에너지 문제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 전체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우리는 이미 거대 과학기술에 기반한 생산력 중심, 성장 일변도의 사회에 들어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대중을 설득하기 매우 어려운 면이 있다. (핵문제는) 지금도 중요한 질문이다.”

핵문제가 국내에서 중심 주제로 떠오른 때가 바로 공추련 시대였다. 공문연 시대에도 최열 등이 핵문제를 제기하긴 했지만 이를 운동의 중심에 놓은 것은 아니었다. 국내 환경운동이 반핵을 주의제로 삼기까지는 일정한 단계와 계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열린 공추련 창립대회. 아랫줄 왼쪽부터 최열·서진옥·이덕희 공동의장, 윗줄 왼쪽부터 서울 상봉동 지폐증 사건의 주인공 박길래씨와 이향숙·구회숙·이정숙·정미화.

1988년 9월 10일 서울 종로성당에서 열린 공추련 창립대회. 아랫줄 왼쪽부터 최열·서진옥·이덕희 공동의장, 윗줄 왼쪽부터 서울 상봉동 지폐증 사건의 주인공 박길래씨와 이향숙·구회숙·이정숙·정미화.

학생운동권, ‘반핵’을 승인하다

학생운동권이 핵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게 되는 계기를 꼽는다면 그것은 1986년 4월 벌어진 두 가지 사건이다. 한 가지는 4월 26일 터진 체르노빌 핵참사, 다른 한 가지는 4월 28일 벌어진 김세진·이재호의 분신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핵문제에 대한 주류 학생운동권의 인식은 핵의 두 가지 속성이 분리된 채 따로따로 놀았다. 다시 말하면 ‘핵무기’와 당시 원자력에너지로 통용된 ‘핵에너지’는 별개의 문제였다. 반면 반공해운동권은 두 가지를 같은 사안으로 취급했다. 같은 기술에 기반한 핵무기와 핵에너지는 이름만 다를 뿐 실체가 같은 것이라는 인식이었다. 주류 학생운동권이 이런 반공해운동 진영의 생각을 따라잡은 기폭제가 바로 체르노빌과 김세진·이재호 분신이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시기는 학생운동권이 반공해운동을 운동의 한 부문으로 ‘승인’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겉으로 보기에도 그랬다. 당시 학생운동의 가장 래디컬한 흐름이 채택한 ‘반핵’을 반공해운동권이 먼저 추구해오던 터였다. 황상규가 큰 갈등 없이 공청협·공추련에 참여한 것도 이런 배경 속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렇듯 학생운동과 긴밀히 연결된 인자들로 구성된 공추련 활동가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핵문제였다. 이들에게 핵문제는 환경운동의 정체성을 가늠하는 잣대이기도 했다. 실제로 핵문제는 ‘환경운동의 리트머스 시험지’로 불리기도 했다. 뒷날 독일에서 해양생태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는 안병옥의 최근 회고.

“유럽에서도 진짜 환경운동이냐 아니냐를 판단하는 기준은 핵에너지를 다루느냐 아니냐이다. 핵에너지에 대한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하지 않는 단체는 사이비로 단정하는 것이다. 그만큼 근본적이고 양보할 수 없는 문제로 보는 것이다.”
각종 이론서를 통해 이런 기본적인 사항쯤은 충분히 알고 있는 공추련 활동가들이 가장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반핵운동이었다. 말하자면 반핵운동은 ‘환경운동의 꽃’이었다. 실제로 공추련 시절 반핵활동을 통해 수많은 환경운동권가가 등장하게 된다. 그 첫 번째 인물이 경북 울진에서 올라온 김혜정(현 환경운동연합 사무총장)이다.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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