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소설 속 탐정이 갖춰야 할 다섯 가지 조건

명탐정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최소한 보통 사람보다 약간은 앞서는 사고력, 맡은 사건을 부지런히 조사할 수 있는 체력,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끈기, 기본적인 지식 등은 현실에서건 허구에서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느닷없이 사설탐정 관련 기사가 여러 차례 눈에 띄었다. 헌법재판소에서 간통죄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직후다. 지금까지는 이해당사자가 경찰을 동반해 불륜 현장을 덮쳤지만 앞으로 이런 모습은 사라질 것이고, 대신 이혼 소송에서 유리한 증거를 모으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할 것이라는 예측 기사였다. ‘예측’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은 아직 허가된 직업이 아니어서 한국에는 사설탐정이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이 있겠지만, 어린 시절에는 탐정이 되고 싶었던 기억도 있다. 제목도 기억나지 않는 만화라든가 아동용으로 출간된 셜록 홈즈 소설을 보면서 ‘어른이 되면 명탐정이 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거뜬히 해결하고 악당들을 때려눕히는 모습이 멋져 보였던 것이다. 물론 이 장래 희망은 어느새 흐릿해졌다. 나중에 우리나라에는 사설탐정이라는 직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약간 충격을 받기도 했다.

(왼쪽부터)엘러리 퀸과 그의 아버지 퀸 총경(<위대한 탐정들> 삽화), 샘 스페이드, 레이먼드 챈들러

호감 가는 인상에 언변이 좋아야
세월이 흐르면서 ‘사설탐정이 공인될 듯’이라는 기사를 몇 년에 한 번씩 보아 넘겨왔지만, 이제는 꽤 구체화된 것 같다. 작년 고용노동부가 사설탐정을 신직업으로 육성하겠다는 계획을 보고한 바 있지만 ‘민간조사업’이라는 다소 낯선 명칭으로 국회에 관련 법안이 여전히 계류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수요가 생기는 분위기라, 언젠가는 법안이 통과되어 공인받은 사설탐정이 탄생할 것 같다.

다만 이런 식으로 탄생한 사설탐정의 이미지는 어쩐지 셜록 홈즈와 같은 명탐정들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허구의 인물들이 너무 비인간적(?)인 데서 오는 부작용일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명탐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리력과 올림픽에도 나갈 만한 체력을 갖추었고, 범죄자와의 대결을 일종의 도락으로 생각하는 호사가와도 같은 인물이 많다. 그나마 하드보일드 분야의 탐정들이 그러한 이미지를 많이 깨 주긴 했지만 아직도 소설 속의 명탐정 이미지는 강하다.

경찰들이 사건을 수사하다가 장벽과 마주치면 탐정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 또 탐정이 범인을 체포하는 장면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탐정에게는 사법권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민간조사원’이라는 명칭에서 알 수 있듯, 탐정이 할 수 있는 업무는 명칭 그대로 ‘조사 업무’이다. 불륜 조사나 실종자 찾기 등 형사사건이 아닌 민사사건 쪽에서 주로 활동하게 된다. 이것은 사설탐정 업무가 오래된 미국이나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제약 아래에서 명탐정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최소한 보통 사람보다 약간은 앞서는 사고력, 맡은 사건을 부지런히 조사할 수 있는 체력, 쉽사리 포기하지 않는 끈기, 기본적인 지식 등은 현실에서건 허구에서건 당연히 필요한 것이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현실의 탐정과는 별개로 이상적인 탐정이 되려면 이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명탐정들을 떠올리면서 몇 가지 조건을 꼽아보았다.(괄호 안은 탐정을 창조한 작가의 이름이다)

드라마 <트루 디텍티브>

① 좋은 인상 : 사설탐정의 업무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에 좋은 인상은 대단히 중요한 조건이다. 파일로 밴스(S.S. 밴 다인)는 ‘뛰어나게 잘생겼고’, 엘러리 퀸(엘러리 퀸)은 ‘스포츠맨보다 학자에 가까운 얼굴’이다. 한편 루 아처(로스 맥도널드)는 자기 자신을 ‘야윈 식인종 같은 얼굴’이라고 표현하고, 샘 스페이드(대쉴 해밋)는 ‘유쾌한 금발 악마’로 묘사되었지만, 오히려 여성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으로도 작용하는 것 같다. 잘생기건 못생기건 남에게 호감을 줄 수 있어야 조사에 도움이 될 것이다.

② 말솜씨 : 호감 가는 얼굴만으로 사건이 해결되지는 않는다. 탐정은 사람들을 만나면 대화를 하는데, 궁금한 것을 알아내기 위해 설득도 하고, 구슬리기도 하고, 엄포를 놓기도 한다. 필립 말로(레이먼드 챈들러)는 촌철살인의 달인이며, 에르퀼 푸아로(애거서 크리스티)는 수다쟁이 수준이다. 에둘러가는 듯한 대화에서도 어느새 많은 것을 알아내곤 한다. 긴다이치 코스케(요코미조 세이시)는 말을 더듬을 때도 있지만 흥분하지만 않으면 괜찮다.

인맥이 넓고 배짱과 자존심 있어야
③ 인맥 :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탐정에게는 공권력이 없기 때문에 발품을 파는 수밖에 없다. 열람이 가능한 정보는 쉽게 알아낼 수 있지만, 그렇게 해서도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안면 있는 관계자를 통해서 정보를 얻는다. 엘러리 퀸처럼 경찰 고위 간부의 아들이라면 거침없이 사건 현장에까지 들어갈 수 있을 정도라 무척 편하겠지만 그런 경우는 드물다. 매튜 스커더(로렌스 블록)나 해리 보슈(마이클 코넬리)처럼 전직 경찰이어서 옛 동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실제로 미국이나 일본의 사설탐정 중에는 전직 경찰이었던 사람이 꽤 많은 편이다.

④ 배짱 : 소설 속에서 탐정은 그다지 존중받는 직업인이 아니다.(현실에서도 그럴 가능성이 있다) 의뢰인 외에는 대부분 만나는 것도 껄끄러워 하고, 화를 내며 쫓아낼 때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푸대접을 받아도 덤덤하게 넘길 수 있는 심리적 맷집도 강해야 한다. 시드 할레이(딕 프랜시스)는 사건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위협을 받아 공포에 질리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조사에 나선다. 반면 메르카토르 아유(마야 유타카)는 ‘내가 왔으니 사건은 해결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치며 용의자들을 제압해버릴 정도로 배짱이 강하다.

⑤ 자존심 : 유능한 탐정이라면 의뢰받은 사건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는 자존심을 갖고 있다. 보수를 받은 만큼 철저히 조사하고, 어떨 때는 자신의 가치관에 따른 정의를 구현할 때도 있다. 지난해 케이블 TV에서 방영했던 <트루 디텍티브>는 이러한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드라마였다. 주인공 형사 콜은 엽기적인 연쇄살인사건이 지역 상류층과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지만 상부의 압력 때문에 경찰을 사직한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파고들어 사설탐정이 된 옛 동료 하트와 함께 결국 사건을 해결하며 탐정으로서의 자존심을 보여준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꼼꼼하게 따져보면 더 많은 것이 필요하겠지만, 위에 언급한 것만 갖추면 탐정으로서 일단 시작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는 <심플 아트 오브 머더>(북스피어, 최내현 옮김)에서 ‘이 비열한 거리에서 홀로 고고하게 비열하지도, 때 묻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남자는 떠나야 한다. 리얼리즘 속의 탐정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히어로이다. 그는 모든 것이다. 그는 완전한 남자여야 하고, 평균적인 사람이면서도 동시에 평범하지는 말아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의 말대로라면 명탐정의 길은 전혀 화려하지 않은 고행의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박광규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