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19년 뽀삐」-반려동물이 주었던 순수, 평화, 그리고 위로

관계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어떤 순수, 평화가 있다. 그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위로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경험이 <19년 뽀삐>가 독자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애완동물은 우리 인간에게 몸을 맡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은 아주 작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그들은 우리가 잊어버렸던 ‘순수’를 살짝 보여주곤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맘대로 굴어도 허락해 준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 준다.”

올해 초 작고한 일본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가 <개를 기르다>(청년사·2005)를 통해 말했듯 반려동물은 ‘순수’와 ‘평화’를 우리에게 안겨주는 존재다. 각박한 우리네 삶 속에서 그 순수와 평화는 다시금 ‘위로’라는 모양새로 다가온다. 반려동물에게 위로받아 본 이들은 안다. 쓰다듬는 손길에 가르릉거리는 고양이의 기분 좋은 소리나 할짝할짝 핥아대고 꼬리를 흔들어대는 개의 무장해제된 몸짓이 언어화할 수 없는 어떤 편안함을 선사한다는 것을. 내가 아직 함께 살아본 적 없는 다른 동물들도 제 나름의 방식으로 함께 사는 이를 위로할 것이다. 새도 이구아나도 햄스터도 그 나름의 순수와 평화와 위로를 줄 터이다.

하지만 함께 산다는 것은 위로보다도, 그 순수와 평화보다도 큰일이다. 우리는 그들의 끼니를 챙겨야 하고 의료비를 지불해야 한다. 산책을 가거나 같이 놀아주어야 하며 배변을 처리하고 씻겨주어야 한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우리보다 일찍 죽기에 그 죽음까지도 책임져야 한다. 그것이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간의 도리다. <개를 기르다>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일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죽어가는 개와 그것을 지켜보며 애쓰는 주인의 모습을 사려 깊게 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작품의 주인공 별걸과 뽀삐가 보낸 19년의 세월이 표현되어 있는 마영신 작가의 만화 「19년 뽀삐」 단행본의 표지. / 씨네21북스

뽀삐를 의인화해 사람의 목소리 부여

마영신의 <19년 뽀삐>(다음웹툰·씨네21북스·2016)도 그런 사려 깊음이 담뿍 담긴 작품이다. 하지만 단편 <개를 기르다>가 개의 삶 막바지에 주목했다면, 두 권짜리 장편인 <19년 뽀삐>는 개 뽀삐의 19년 일생 모두를 그려낸다. 전자가 애완견 톰의 죽음 앞에서 삶의 순간 순간으로 플래시백했다면, 후자는 뽀삐의 삶에 죽음이 닥쳐올 때까지 시간을 그대로 따라 살아간다. 전자가 톰을 개의 방식으로만 말하게 했다면, 후자는 뽀삐를 의인화해 사람의 목소리를 부여한다. 이런 모든 차이 때문에 나는 <개를 기르다>를 읽으면서는 주인의 마음을, <19년 뽀삐>를 읽으면서는 뽀삐의 마음을 더 깊이 느꼈다. 결국 울게 된 것은 같았지만, 울게 된 과정과 이유는 다르다. <19년 뽀삐>의 서사를 조금씩 따라가며 눈물의 연유를 짚어 보자.

뽀삐는 아홉 살 위인 병걸과 함께 사는 강아지다. 한 살 때부터 함께 살며 형이라 부르는 병걸과 샤워도 같이 한다.(사실 이건 비밀이다) 산책길에 ‘똥 때리는’ 걸 즐기고 형이 학교 간 동안은 기다리는 게 일이다. 진돗개 피가 섞였는지 선한 쌍꺼풀 진 눈을 가진 뽀삐는 한쪽 귀가 조금 접혀 있다. 병걸도 비슷한 특징이 있다. 소이증을 앓아 한쪽 귀가 ‘없다.’ 그래서 병걸은 남자아이 치고는 특이하게 머리를 길러 양쪽 귀를 가리고 다닌다. 남학생이라면 머리가 단정해야(짧아야) 하는 학교에서도 허락 받은 장발머리다. 어쩌면 그런 특징이 병걸이 뽀삐를 각별히 아끼는 이유가 되었을는지도 모른다.

그 각별함을 이해할 다른 이유도 있다. 아빠는 병걸이 열 살 때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뽀삐가 함께 살게 된 것은 아빠의 부재 직후로, 병걸에게는 아빠의 빈 자리를 메워준 셈이었을 것이다. 병걸이 직접 뽀삐에게 고백한 적도 있다. “뽀삐야… 아빠랑 엄마 이혼하시고… 엄마 몰래 많이 울었는데… 네가 우리 집에 오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엄마와 병걸, 뽀삐 세 식구는 그렇게 서로를 아끼며 살아간다. 매일 같은 이불 위에서 자고 밥도 같은 때 먹는다. 하지만 엄마가 폐결핵으로 쓰러지면서 그런 삶에 변화가 일어난다.

뽀삐가 다섯 살, 병걸이 열네 살이 되던 해에 엄마의 요양을 겸해 뽀삐네는 시골 이모 댁으로 이사한다. 이모부가 집 안에 뽀삐를 둘 수 없다고 한 탓에 뽀삐는 마당에 있는 개집에서 자야 한다. 집 안에서 지낼 수 없다는 건 아쉽지만, 좋은 점도 생겼다. 동네 다른 개들과 친구가 된 것이다. 동네 예쁜 개 점순을 마음에 품기도 하고, 주인에게 버림받고도 버림받은 그 장소에서 늘 주인을 기다리는 해피를 비롯한 여러 개들의 사연을 접해 듣기도 한다. 특히 친해진 나비와 놀다가 병걸이 학교에서 돌아올 무렵 집에 들어가 형을 맞이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병걸에게도 새로운 삶이 생겼다. 뇌성마비를 앓은 수남과 친구가 되고, 이후엔 반에서 ‘잘 나가는’ 치호 무리와 단짝이 된다. 하지만 치호가 사소한 이유로 병걸에게 앙심을 품으면서 학교생활이 힘겨워지기 시작한다. ‘귀엽다=귀 없다’는 놀림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 병걸은 치호 무리와 3대 1로 싸우게 된다. 하지만 싸움이 될 턱이 없다. 일방적으로 얻어 맞고 있을 때, 뽀삐가 친구 개들과 함께 나타나 병걸을 구한다. 병걸의 학교생활은 어려워졌지만 뽀삐와의 유대는 한층 더 깊어졌다.

시간을 들여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작가

이렇게 일상과 사건들로 이어지는 서사 속에서 뽀삐와 병걸은 서로의 삶을 구하고 채워준다. 친구들과 놀다가 보신탕 장수에게 잡혀간 뽀삐를 병걸이 구해낸다. 엄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학교생활도 여전히 녹록지 않은 병걸을 뽀삐가 위로한다. 이모부가 뽀삐를 교통사고의 원흉으로 내쫓으려 하자 병걸은 뽀삐와 살기 위해 독립을 시도한다. 엄마의 사고 보상금으로 다시 서울에서 살게 된 병걸이 첫 연애에 실패하고 방황할 때도 뽀삐가 곁을 지킨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건… 너밖에 없구나.” 병걸의 말이지만, 서로가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후로도 여러 사건과 일상이 이어진다. 뽀삐가 19년을 꽉 채운 ‘19년 뽀삐’가 될 때까지, 병걸이 ‘28년 병걸’이 될 때까지 이야기가 이어진다. 이 시간들을 채운 둘의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병걸이 지켜본 뽀삐의 삶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뽀삐가 지켜본 병걸의 삶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지켜본 둘의 삶이기도 하다. 둘이 공유하는 19년의 삶, 독자들은 이 인생과 견생의 서사 속에서 둘의 관계를 속 깊게 헤아리며 둘의 잘됨을 기원한다. 19년 뽀삐가 28년 병걸의 앞에서 숨을 거둘 때 눈물이 흐르는 것은 그런 이야기가 쌓인 위에서다. 그 이야기 속에서 뽀삐가 병걸에게 건넸던, 삶이 얽힌 구체적인 ‘순수’와 ‘평화’와 ‘위로’를 알기에 함께 슬퍼할 수 있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반려동물과 함께해본 독자들은 뽀삐와 병걸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접하고 떠나보내며, 자신들의 구체적인 기억을 접한다. 그 속에서 자신의 반려동물이 주었던 순수, 평화, 위로를 떠올리며 그 감각을 삶 속에서 생생하게 되새김질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자신을 본다. 뽀삐가 병걸을 지켜보았듯, 자신의 반려동물의 자리에서 자신을 본다. 관계란 참으로 놀라운 것이어서 그 관계 속에서만 가능한 어떤 순수, 평화가 있다. 그 보편적이면서도 특수한 위로 속에 있는 자신을 보는 경험이 <19년 뽀삐>가 독자에게 주는 또 다른 선물이다.

만화로 본 세상

마지막으로, <19년 뽀삐>로 마영신을 만난 독자들에게 그의 다른 세계를 추천하고 싶다. <19년 뽀삐>에서 병걸을 통해 청년의 현실을 실감나고 담담하게 그려냈듯이, 마영신은 자신이 경험한 세계를 살아있는 것처럼 그리는 데 성실한 작가다. 그러면서도 작품마다 늘 조금씩 다른 시선으로 세계를 조망해 왔다. 특히 <남동공단>(새만화책·2013)과 <엄마들>(휴머니스트·2015)을 읽는다면 <19년 뽀삐>가 다른 반려동물 만화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마음을 적신 이유를 더 잘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뽀삐와 함께한 병걸의 삶을 따라가다 뽀삐 이후의 병걸까지 응원하게 되었듯, 그간 성실하게 쌓인 시간과 함께 <19년 뽀삐> 이후의 마영신을 응원한다. 그는 시간을 들여 삶을 껴안을 수 있는 드문 작가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