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늘 조부모와 함께한 ‘88만 원 세대’

조손가정 | 정성모씨

세상 떠난 아버지, 집 나간 어머니… 3대 함께 산 건 단 3년

영화 ‘집으로…’의 한장면.

경기 구리시에 사는 정성모씨(가명·28). 초등학교 이후 그의 삶은 늘 조부모와 함께였다. 그 무렵만 해도 중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서 있던 그의 조부모는 이제 가족 내 위계 질서에서뿐 아니라 자연 연령으로도 진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일흔여섯, 할머니는 일흔다섯이다.

정씨의 가족사에는 ‘빠진 고리’가 하나 있다. 바로 부모다. 8살 때 아버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집을 떠났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원망은 서로 화해하지 못한 채 그의 마음을 헤집어놓았다. 스물여덟의 그에게 어머니의 존재는 더 이상 그리움의 대상도 아니고 원망의 대상도 아니다. 그는 “어머니는 당신 인생을 택하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어머니 사시는 곳을 정확하게는 모르고, 전화도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할아버지는 전북 김제 사람이다. 김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다시 구리로 자리를 옮겼다. 건축일과 농사일을 하면서 장남인 정씨의 아버지를 비롯하여 6남매를 키웠다. 정씨의 아버지는 탁자나 액자 같은 목공 수제품을 만드는 사업을 하다 사업이 어려워지자 구리로 내려왔다. 3대가 같이 살게 된 것이다. 하지만 3대가 한 집에 모여 산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정씨의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 3년이 전부다.

정씨는 자신이 ‘아버지의 대타’라고 표현했다. 그는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자식 여섯을 모두 출가시키고 숨을 좀 돌리는가 싶었는데 또 한 명의 자식이 생긴 셈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에게 정씨는 ‘짐’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지극한 애착의 대상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께서 농사 짓던 땅에 건물을 올리고 세를 받기로 한 건 다 나 때문이다. 부모가 없는 손자의 교육을 위해서 미리 준비하셨던 것 같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몰려 있는 이곳에 집을 마련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서울 중심가의 땅부자들과 다르다. 기본적인 생활비와 두 노인의 약값을 제하고 나면 항상 빠듯한 살림이었다. 친척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에게도 모두 힘들게 꾸려가야 할 가정이 있다. 중·고등학교까지는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대학은 커다란 벽이었다. 정씨는 성적 대신 장학금 혜택을 기준으로 대학을 골랐다. 대학 때는 군대에 입대하기 전 한 학기를 제외하고 등록금 전액의 90%에 해당하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가 서류상으로 ‘소년 가장’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학비 이외의 생활비를 버는 한편으로 장학금을 받는 데 필요한 학점을 채우느라 몸과 마음이 늘 바쁘고 조급했다. 거기에다 그와 같은 건축학과 학생들의 취업에 꼭 필요한 자격증과 공인영어 시험 성적을 준비하는 일까지 겹치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평범한 집안의 장남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부담감이겠지만 부모가 없는 그에게 장남으로서 자의식은 그의 인생 항로를 지배한 결정적인 방향타 구실을 했다. “장남은 흔히 자기가 성공해야 가족이 잘 된다고 생각한다. 내 경우에는 물질적인 뒷받침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더 강했다.”

어려운 집안의 장남이라는 자의식은 그에게 걸림돌이자 방파제 구실을 했다. 그는 요즘 대학생들에게 ‘필수 코스’가 된 어학 연수를 가지 않았다. 반드시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제대 후 8개월 남짓 한 은행에서 청원 경찰로 일했다. 합기도 유단자라는 사실이 청원 경찰 자리를 얻는 데 도움이 됐다. 그 8개월 동안 1000만 원 가까운 돈을 벌었다. 영어 점수가 취업에 미칠 영향이나 바깥 세상을 보고 싶다는 강했지만, 연수 기간 쓸 돈을 생각하니 결행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에게서 또래가 누릴 수 있는 많은 혜택을 앗아갔지만, 반대로 그가 자기 삶에 성실하게 하는 동력이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 2월 대학을 졸업한 뒤 건축용 석재를 취급하는 직장에 들어가기까지 6개월간 취업을 준비했다. 그 사이에 15곳에 원서를 냈고, 면접을 7번 봤다. 스스로 인정하듯 정씨 또래의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면 무난한 편이다. 연매출 50억에 정규 직원이 채 10명이 되지 않는 작은 기업이기는 하지만 건축 석재를 다루는 기업들 가운데는 중간 수준이다. 정씨는 “대기업에 들어가는 사람들과 비교하면 첫 출발이 좋다고는 못하겠지만 경력으로 따라잡겠다”고 말했다.

그는 “가끔씩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고백했다.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겪어야 했던 자신의 어려움이 투영된 말일 테다. “취업이나 공부보다 아르바이트에 더 치중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삶에 투자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한때 대학에 진학한 것을 후회했다고 말했다. “대학에 가는 것 자체도 쉽지 않지만, 졸업해도 취업이 안 되는 상황이다 보니 답답하고 초조했다.”

그는 자신이 “세상에 대해 비판적이다”라고 말한다. 평범하지 않은 가정에서 젊음이 누려야 할 특권을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대신해야 했던 상황은 그를 또래보다 세상의 모순에 더 민감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다른 이들은 그냥 스쳐지나는 일이라도 그에게는 피부와 와닿는 현실이다. “우리 사회가 잘못돼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국가가 나서지 않으면 힘든 가정의 아이들은 돌파구를 찾을 수 없다. 그런 아이들은 대학에 들어가도 문제다. 입학과 동시에 취업을 위한 경쟁이 시작되는 요즘 세상에서 그 아이들이 경쟁력을 갖추기는 어렵다. 당해보지 않으면 그 심정을 알기 힘들다.”

조부모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조부모는 정씨가 성장기에 흔히 겪는 갖가지 유혹에서 그를 지켜주었다. “나쁜 길로 빠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이 내게 주신 사랑이 바닥에 떨어질 때마다 내가 잡고 올라갈 수 있는 끈이 되었다. 부러질 날개였는데 (두 분이) 바로잡아주셨다. 나는 이제 날기만 하면 된다. 얼마나 높이 나느냐는 이제 내게 달려 있다. 힘들었지만 지금은 미래를 볼 수 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