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세상 빛 못 보고 사라진 비운의 원고들

해외 추리소설 중에는 독특한 이유로 영영 사라진 작품이 종종 있다. 타이타닉호에 탔던 자크 푸트렐은 미발표 ‘생각하는 기계’ 시리즈 단편 6편과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영국의 서머셋 모옴은 윈스턴 처칠의 사전검열에 걸려 스파이소설 14편을 발표하지 못했다.

‘발굴’이라는 단어를 보면 사막 같은 황무지에서 고고학자가 땅을 파는 장면이 떠오른다. 놀라운 기술의 발달로 이젠 지구가 그렇게 크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데, 공사를 하다가 유적이 발굴되는 것을 보면 신기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아직 베일 속에 감춰진 유적도 있고, 전설로만 남은 자취도 있다. 발굴이란 이처럼 어디 묻혀 있던 역사적 유물을 찾아낸다는 의미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전을 찾아보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거나 뛰어난 것을 찾아 밝혀낸다’는 뜻도 있다. 문학작품도 그렇게 발굴되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지난해 기사를 검색해보니 ‘이효석의 미공개 수필 발견’, ‘시인 정지용 작품 새로 발굴’ 등이 금방 눈에 띄고, 올해 초에는 ‘서정주 시인의 시 100여편 작고 15년 만에 공개’ 등의 기사도 보인다.(다만 서정주 시인의 작품은 새롭게 찾아낸 것이 아니라 시인의 작고 당시 수습해 놓았던 습작노트에서 문학성이 뛰어난 시를 골라 공개한다고 하니 ‘발굴’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타이타닉 호에 탄 자크 푸트렐.

타이타닉호와 함께 바다에 잠긴 단편
어디선가 이렇게 운이 좋게 발견되어 새롭게 공개되는 작품이 있는가 하면, 영영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대개 출판할 곳을 찾지 못해 묻혀버리는 경우가 가장 흔할 것이고, 동인지 등에 실렸지만 당대의 관심을 끌지 못해 사라지는 사례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경우와는 달리 해외 추리소설 중에는 독특한 이유로 영영 사라진 작품이 종종 있는데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아마도 타이타닉 호의 침몰과 관련된 이야기일 것이다.

<애틀랜타 저널>, <뉴욕 헤럴드> 등의 신문사에 근무하던 자크 푸트렐은 <보스턴 아메리칸> 신문사에 자리 잡은 이듬해인 1905년, 단편 추리소설 <13호 독방의 문제>를 발표한다. ‘생각하는 기계’(The Thinking Machine)라는 별명을 지닌 아마추어 탐정 S.F.X. 반 뒤젠 교수의 기발한 교도소 탈출을 묘사한 이 작품이 호평받자, 푸트렐은 이후 40편 이상의 시리즈 작품을 계속 발표했다. 그러나 1912년, 부인 메이와 유럽 출장 겸 여행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푸트렐에게 큰 비극이 발생한다. 그가 탄 배는 다름 아닌 타이타닉 호였던 것이다. 배가 빙산과 충돌하자 그는 배에 남은 채 부인을 구명보트에 탈출시킨 뒤 37세의 젊은 나이로 1514명의 사망자 명단에 오르고 말았다. 함께 작품을 쓰기도 했던 부인의 말에 따르면 발표하지 않았던 ‘생각하는 기계’ 시리즈 단편 6편도 함께 바닷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고 한다. 1985년 타이타닉 호의 잔해가 발견되고 일부 유품이 인양되기도 했으나, 푸트렐의 원고가 남아 있을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서머셋 모옴(오른쪽)과 처칠(1960년의 사진).

<달과 6펜스>, <인간의 굴레> 등으로 유명한 영국의 문호 서머셋 모옴이 스파이소설을 썼다는 것은 별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모옴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정보부에 지원해 유럽 각국에서 첩보원으로 활동했으며, 당시의 경험을 바탕 삼아 16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된 스파이 소설 <어센덴>(1928)을 발표했다. 모옴이 이 작품을 쓰기 시작한 것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무렵으로, 처음에는 모두 30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원고 단계에서 검토한 윈스턴 처칠(당시 육군상)은 반에 가까운 14편을 ‘태워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사전 검열에 걸린 셈인데, 아마도 당시에 공개되어서는 안 될 군사적 기밀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옴은 처칠의 충고를 받아들여 문제가 될 작품을 빼내고 남은 16편만으로 작품을 출간했다. ‘태워버린’ 작품들은 제목조차 남지 않아 어떤 내용인지 짐작도 할 수 없지만, 아무래도 출판된 작품보다 훨씬 재미있을 것만 같다는 근거 없는 추측만 할 뿐이다.

<지명 수배된 사나이>의 원작자 아서 휘테커.

해프닝으로 끝난 코난 도일의 작품 발굴
이런 상실의 안타까움과는 반대로 느닷없는 발견으로 대중을 흥분시킨 에피소드가 있다. 1942년 6월, 런던의 신문에 놀라운 뉴스가 실렸다. 코난 도일의 유품을 정리하던 중 미발표된 셜록 홈즈 이야기의 원고가 하나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코난 도일은 장편 4편과 단편 56편 등 모두 60편의 홈즈 이야기를 남기고 1930년 세상을 떠났다. 12년 만에 새로운 작품을 발견했다는 소식은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도일의 막내아들인 에이드리언과 영국의 전기 작가 헤스키스 피어슨이 도일의 전기 집필을 위해 함께 유품을 정리하다가 원고를 발견한 것으로 전해진다. 원고가 들어 있던 봉투 겉에는 도일 부인(1940년 작고)의 필적으로 ‘남편의 마음에 들지 않아 발표하지 않았다’는 요지의 글이 적혀 있었다고 한다. <지명 수배된 사나이>(The man who was wanted)라는 제목의 이 단편소설은, 피어슨이 읽고 ‘훌륭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으나 추리소설가 존 딕슨 카(훗날 도일의 전기를 썼으며, 에이드리언 도일과 함께 <셜록 홈즈 미공개 사건집>을 집필했다)는 호의적인 평가를 내렸다.

원고 발견 보도 직후 다양한 잡지와 신문이 이 단편을 게재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지만 유족은 이를 거절했고, 제법 시간이 흐른 뒤인 1948년에야 미국에서 잡지 <코스모폴리탄>에 수록되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도일의 문체와 차이가 있고 추리의 설득력도 떨어지는 등 뭔가 심상찮다고 여긴 셜로키언(셜록 홈즈 연구자)들은 집중적인 조사 끝에 놀라운 진상에 도달했다. 결론은 도일의 작품이 아니라는 것. 원작자는 영국의 아마추어 작가인 건축기사 아서 휘터커였다. 그는 도일에게 원고를 읽어달라고 보냈는데, 도일은 혹시 써먹을 수도 있을까 싶었는지 10파운드를 주고 사들였다는 것이다. 결국 홈즈 팬들을 들뜨게 했던 새 작품 발굴 소식은 착각이었다는 결말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서지정보가 많이 축적된 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 추리소설의 발표나 출간 목록 등의 자료가 없어 누가 언제 어떤 작품을 발표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예를 들어 한국 최초의 전문 추리소설가로 꼽을 수 있는 김내성은 대중적으로도 꽤 알려졌고 학술적으로도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왔으나 그의 서지목록조차 아직 완벽하지 않다.

박광규의 미스터리 산책

김내성 이전과 이후도 마찬가지. 단정학(丹頂鶴)의 <겻쇠>(1928)나 최독견의 <사형수>(1931), 박태원의 소년탐정소설 <특진생>(1935) 등은 작품이 연재되었던 잡지 중 현존하지 않는 것이 있어 작품의 일부가 소실된 상태이다. 그나마 소실된 부분보다 남아 있는 부분이 많다는 점이 불행 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50~1960년대의 기간 중 신문과 잡지에 실린 한국 작가의 창작 추리소설 300편 이상을 확인했으며, 아직 조사 못한 매체가 수두룩한 만큼 실제 숫자는 그보다 훨씬 많을 것임에 틀림없다. 앞서 조사가 없었던 것에 대해 아쉬움이 크지만, 그보다는 옛 작품 발굴의 여지가 많다고 긍정적으로 여기는 것이 마음 편할 듯하다.

<추리소설 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