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사랑과 이별의 기억을 잃어버린 민자 역사

만남과 이별이 이뤄지는 공간이었고 도시와 고향의 교차점이며 과거의 불안한 출구이자 미래의 불투명한 입구였던 도시의 역들. 이제는 거대한 쇼핑몰이 압도하고 현란한 광고 전광판들이 눈을 어지럽힌다.이곳에선 더 이상 사랑의 포옹이나 이별의 키스를 할 수가 없다.

명절 때마다 귀성객을 위한 특별 예매 소식을 접한다. 올해도 어김없다. 지난 8월 28일, MBC의 아침 8시 뉴스는 흡사 전시 상황을 전하는 듯한 목소리로 귀성표 현장 예매 소식을 전한다. “조금 전이죠. 오늘 아침 7시부터 추석 기차표 현장 예매가 시작됐습니다. 서울역 상황 어떤지 취재기자 연결해서 알아봅니다.” 앵커의 이 말을 받아서 현장 취재기자가 들뜬 목소리로 서울역 상황을 전달한다. “서울역은 지금 수천명의 시민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룬 상태입니다. 경부선은 판매 시작 5분 만에 매진됐습니다.”

영등포역 전경

요즘은 현장 예매도 하지만 인터넷으로도 표를 판다. 인터넷 기차표 예매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예매나 각 대학의 인기 강좌 수강 신청처럼 ‘광클’ 1분 만에 매진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인터넷 예매가 시작된 이후인 8월 30일 KBS 뉴스는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대부분의 열차표가 2~3분 만에 동이 나면서 표를 구하는 데 초를 다퉈야 했다”고 보도한다. 코레일의 예약 전산 시스템은 인터넷 예매 신청 순서를 100만 분의 1초 단위로 가려낸다. 이후에 클릭한 예약 대기자는 1000분의 1초 단위로 순서를 배정한다. 새벽 일찍 일가족이 동네 PC방에 가서 서너대의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일제히 광기 어린 클릭으로 접속하다 보면 그 중 한 사람이 운 좋게 앞자리 순서를 배정받는 식이다.

인터넷·예매창구의 긴 행렬에 울컥
이런 광경은, 아직 우리가 전통사회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거꾸로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사회가 서울 같은 대도시에 과잉 집중되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도 명절이면 경부선 따라 김천에 가고 밀양에 가고, 호남선 따라 남원에 가고 목포에 가고, 영동선 따라 영월에 가고 삼척에 가는 행렬이 있다는 것은 마음 한 구석을 울컥하게 만든다.

언젠가 이러한 행렬이 다 끊어질 것이다. 지금 자라는 아이들에게 고향은 서울 같은 대도시의 커다란 산부인과 병원이기 쉽다. 당장 내 아이들 고향도 서울 중구의 어느 대형 산부인과 병원이고 도봉구 방학동의 아파트 단지에서 자랐다. 한 세대가 흐른 후 이 아이들에게 귀성이란 지금처럼 ‘광클’을 해야만 하는 강렬한 정서적 충동의 사건은 아닐 것이다.

신촌 일대 풍경

아니, 벌써 그러한 변모가 눈에 두드러진다. 기차역을 가보라. 20세기를 살아낸 사람들의 집합적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기차역의 풍경이란 거의 사라져버렸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는 1843년 파리에서 오를레앙으로 가는 노선이 개통된 것을 두고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들도 흔들리게 되었다. 철도를 통해서 공간은 살해당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시간밖에 없다”고 썼다.

서울역 표정들

그 이후 기차는 근대의 상징이 되었다. 직진하는 속도, 기존의 공간을 관통해버리는 철도, 작은 소읍들의 자원과 사람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대규모 도시의 탄생 등이 기차에 의하여 이뤄졌다. 빅토르 위고는 소설 <인생의 첫출발>에서 “머지않은 장래에 철도로 인해 어떤 업종들은 멸종될 것이고 다른 몇몇은 그 면모가 일신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리고 그 예언의 최종적인 형태는 대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기차역사의 거대한 쇼핑몰화 현상이다.

자본의 이익 극대화 공간으로 변해
한때, 서울역은 만남과 이별이 이뤄지는 공간이었고 대도시와 고향의 교차점이었으며 과거의 불안한 출구이자 미래의 불투명한 입구였다. 대중음악 속의 서울역에는 전쟁과 분단의 상처가 배어 있었고, 1960~70년대 이후 탈향의 구슬픈 서정과 고단한 서울살이의 처량한 신세가 묻어 있었다.

그런데 지금 서울역에 가면 그런 정황을 느낄 요소가 없다. 거대한 쇼핑몰이 우선 압도하고 쉼 없이 흐르는 쇼핑 전광판이 눈을 어지럽게 하며, 역사 내부마저도 거대한 광고판들이 압도하고 있다. 이런 곳에서는 사랑의 포옹도, 이별의 키스도 제대로 못할 것 같다.

서울 역사 내 모습

서울역을 비롯한 대도시의 거의 모든 역사가 ‘민자 개발’로 급변했다. 1980년대 후반에 1차 공사를 마친 서울민자역사는 2001년 7월에 새 공사에 들어가 2004년 1월에 지하 2층, 지상 7층, 연면적 6만7559.98㎡ 규모로 급변했다. KTX 기능과 장차 공항철도 기능까지 수행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였으나 여기에 더하여 백화점, 대형할인점, 프랜차이즈 식당과 커피숍 등이 오히려 시선을 압도하는 방식으로 끝이 났다.

이제 전통의 서울역은 고향 찾아 떠나는 기차역이나 이별과 눈물의 장소가 아니라, 민간 자본의 투자 수익을 극대화하는 거대한 상품 공간으로 변경된 듯하다. 서울역뿐만 아니라 용산역, 청량리역, 영등포역, 신촌역 그리고 부평, 수원, 대구 등의 각 지역 역사들도 초대형 민자역사 개발에 따른 대규모 쇼핑 공간으로 종착역이 되었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역무 기능은 대규모 쇼핑 기능에 딸린 부대 시설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등포역이나 부평역 같은 곳의 계단이나 에스컬레이터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쇼핑몰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여 공간을 재편한 듯하다. 대합실로 가려면 방향을 틀거나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가야만 한다. 기차는 쾌속의 300km로 전통적인 시간 개념을 관통해버렸다. 민자역사는 세련된 소비공간으로 오래된 기차역의 추억을 도살했다. 언젠가 기차역은 사랑과 눈물의 기억이나 고향을 찾아 떠나가는 추억을 모조리 상실할 것이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