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욕망의 시대, 침전된 감상적 기억들

‘도시 이미지’를 독해하여 우리 시대가 어떤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를 살펴온 이 연재가 이번 회로 마무리된다. 독자 여러분과 함께 대도시의 이미지와 욕망을 함께 살펴본 것은 뜻깊은 여정이었다.

19살 때, 나는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2만원인가 주고 산 낡은 자전거는 춘천을 지나 한계령을 넘어 양양으로 빠져서 울진으로 내달렸음에도 끄떡없었다. 거기서 해안도로를 포기하고 내륙으로 방향을 꺾어 영주로, 상주로, 대구로, 마산으로 줄기차게 달렸는데 이따금 체인이 벗겨지는 일 말고는 큰 탈 없이 남해의 여러 도시를 순례할 수 있었다. 자주 나타나는 비포장도로의 흙먼지가 괴로웠지만 그래도 그런 길에는 오가는 차량도 드물어서 주위를 완상하며 하루 종일 페달을 밟을 수 있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나오기 전이라서 홀로 온전히 소유할 수 있었던 정동진, 신문지를 덮고 자던 마산역의 새벽, 바닷바람에 벼랑으로 쓸려갈 뻔했던 광양의 고갯길. 그리하여 이윽고 나는 목포까지 갔더랬다.

목포역 인근의 루미나리에. | 정윤수

춘천으로, 대구로, 목포로 자전거 여행
더 이상 굴러가기를 포기한 자전거를 나는 허름한 중고자전차 가게에 팔았다. 2000원인가를 받았는데, 라면 한 그릇을 먹고 나니 1500원이 남았다. 그 돈으로 내친 김에 제주도까지 건너갈까 하여 여객선터미널로 걸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목포의 방파시설은 허술하여 거센 파도가 한 번 크게 일어나서 눈앞으로 포말이 터졌다.

시인 최하림은 “나에게 시 같은 것을 가르쳐준 것은 국어선생님도 아니었고 문예반도 아니었고 선배들도 아니었다. 사리 때의 해안통 거리였다”고 쓴 적이 있는데, 바로 그런 광경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최하림은 등록금조차 제대로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렵게 학창시절을 보냈는데, 그런 일들이 마음속 깊이 상처를 새길 때마다 정처없이 목포 해안통을 걸었다고 한다. 예민한 감성의 소년에게 목포는 검은 바다를 보여주었고 때로는 방파시설 너머로 활개치는 너울을 선물하였다. 해안통을 헤매던 소년은 갑자기 엄습하여 산산이 부서지는 포말을 보면서, 시인이 되었다.

그런 상념으로 터미널까지 걸었으나 뱃삯이 부족했다. 하는 수 없이 목포역으로 되돌아온 19살의 나는 맞은편의 어느 건물에 나붙은 구인광고를 하나 보았다. ‘DJ 구함, 숙식 제공.’ 아마도 그렇게 써 있었다. 건물의 2층에 별다방이 있었다. 올라가서 문의하니 우선 오디션을 보라고 했다. 그 시절, 역 앞의 다방들마다 음악감상실을 두고 있었는데, 서울에서 서너달 해본 경험이 있으므로 나는 어렵지 않게 콘솔을 만진 후 그 시절 음악다방 어디서나 울려퍼지던 전영록과 스모키의 노래를 틀면서 몇 마디 멘트를 했다. 오디션은 합격.

종업원은 1층으로 내려가서 이력서를 한 장 써서 3층으로 가라고 했다. 나는 1층 별문방구에 가서 50원 주고 이력서 한 장을 사서 몇 자 적은 후 3층의 별당구장으로 갔다. 담배를 한쪽으로 꼬나물고 당구를 치던 사장은, 그러나 채용할 수 없다고 했다. “쪼까 거시기 한 거시, 신원사항이 불확실허니 워처게 쓰것소. 고생 많았소.”

더 이상 목포에 머물 수 없어 터벅터벅 광주로 향했다. 무안에 이르러 밤이 되었고, 무전취식을 할 만한 곳을 골라 무안성당으로 갔는데 젊은 신부님은 그날따라 ‘구속자 석방 환영대회’ 행사 때문에 재워줄 수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서는데, 신부님이 다시 불러세워 5000원을 주면서 길바닥에서 자지 말고 여인숙으로 가라고 하셨다. 나는 그 돈을 고이 주머니에 모셔두고 막 문을 닫으려는 꽃집으로 달려가 통사정을 해서 그 가게의 낡은 소파에서 잠을 잤다.

20여년 전 목포역 별다방이 있던 건물에 2015년 2월 현재 약국이 들어서 있다. | 정윤수

27년이 지나서 다시 찾은 목포
아침까지 얻어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무안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너무도 아름다웠으나 오랜 여정으로 인하여 힘들었다. 한나절을 꼬박 걸었음에도 무안을 채 못 벗어난 듯했다. 그때 마침 낡은 용달차 하나가 나를 앞질러 달리다가 멈춰섰다. 나는 달려갔다. 어느 노인이 측은한 눈빛으로 태워주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풍경이 많았다. 용달차에 오르자마자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 후 잠에서 깨고 보니 눈앞에 광주역이었다. 그런데 운전석은 비어 있었다. 어디 가신 걸까, 그렇게 생각하며 차에서 내리는데 노인이 나타났다. 노인은 비닐봉지를 건네며 말했다.

“젊었을 적에는 여기저기 쏘다니는 것두 좋지만, 기술을 배워야지. 구로공단이나 성수동에 가면 일자리 많아. 객지 돌아다니지 말고 기술 배워 기반을 잡아야지.”

나는 무안성당 신부님이 주신 돈으로 기차표를 끊어 모든 역이 다 서는 비둘기호 완행열차를 탔다. 자리가 없어서 객차와 객차 사이에 주질러 앉아 비닐봉지를 풀어보았다. 환타와 카스테라가 들어 있었다. 나는 울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꾸역꾸역 카스테라를 삼켰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무려 27년이나 지나서, 다시 목포에 가보니 별다방도 없고 별당구장도 사라지고 ‘임대 중’이라는 글씨만 크게 나붙어 있었다. 별문방구가 있던 1층에는 약국의 간판이 빛나고 있었다. 역에서 터미널에 이르는 오거리 일대는 인공으로 조성해놓은 조명(루미나리에)이 번쩍거렸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도시 이미지’를 독해하여 우리 시대가 어떤 욕망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지를 살펴온 이 연재가 이번 회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조금은 개인적이고 감상적인 기억을 남겨보았다. 발터 벤야민은 <베를린의 유년시절> 서문에서 “지나간 과거를 개인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우연의 소산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필연적인 것으로 통찰”하기 위하여 “시민계급의 한 아이 안에 침전된 대도시 경험의 이미지들을 붙잡으려 노력했다”고 썼다. 이 마지막 원고는 그런 의미를 조금 흉내낸 것이다. 비록 결실은 미미하지만 이 연재를 통하여, 독자 여러분과 함께 이 험악하면서도 아름다운 대도시의 이미지와 욕망을 함께 살펴본 것은 뜻깊은 여정이었다.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