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교육적 선택에서 주인공은 아이랍니다

인서울 대학 진학을 위해 강남으로 이사를 간 진보 엘리트 아버지. 서울 대치동을 포기하고 대안학교를 보낸 아버지. 두 아버지의 결정에는 아이를 철저히 대상화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강남 좌파’ 부모 이야기를 하니, 몇 해 전 한 고등학생에게서 받은 편지가 떠오릅니다. 중학생 때부터 내 글을 읽었다는 그의 편지는 “저희 아버지는 ○○○ 교수입니다”로 시작했습니다. 익히 이름을 아는, 진보진영에서 활동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별한 아버지 덕에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에 시달리지도 않을 수 있었고 사회와 역사를 보는 나름의 안목도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삭막한 아파트 단지가 아니라 교외에서 마음껏 뛰어놀며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은 자연과 함께 자라야 한다는 아버지의 생각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라면서 아버지의 사회활동을 좀 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아버지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체육수업 중인 대안학교 학생들.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진보적 엘리트 부모들의 수렁
그런데 고등학생이 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밤 아버지가 저런 표정은 처음이다 싶은 표정으로 자기 방을 찾았답니다. “고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대학입시 준비도 해야지. 엄마하고 의논했는데 아무래도 이 동네에서 인서울 가긴 어려울 것 같아서 강남으로 이사하기로 했어.” 그는 진보적인 부모들이 제 아이 교육문제에선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식의 이야기를 이따금 들은 바 있고, 바로 그래서 제 아버지가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거라고 했습니다. “대부분 ‘인서울’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없는 동네 친구들을 떠나 혼자 강남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살고 싶지 않은 기분입니다. 아버지는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걸 잘 압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걸 느낍니다.”

여담이지만, 편지를 읽으며 언뜻 ‘인서울’이 대학 이름인가 했습니다. 동서울대학은 성남에 있고 남서울대학은 천안에 있으니 인서울 대학은 서울에 있는 건가 싶었던 겁니다. 물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싱거운 농담일 뿐이지요. ‘인서울’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실이야말로 오늘 한국 교육이 어떤 상태인가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교육 문제에만 국한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만, 말의 향방과 좌표는 사회를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는 방편 가운데 하나니까요. 어지간히 극성스러운 일부끼리나 통용되는 은어여야 할 말이 모든 사람의 상식어가 되어버릴 때, 해당 사회 부분은 심각하게 망가진 상태라는 뜻입니다.

그 아버지도 고민이 많았을 것입니다.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고 그런 선택을 했다면 비슷한 사회적 조건을 가진 사람들에 비해 ‘꽤 버틴’ 편이라 할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짐작컨대 그 아버지는 아이가 대학입시에 성공하여 시장에서 비싼 가격의 상품이 되길 욕망하는 게 아니라 자신처럼 진보적 경향의 엘리트로 성장하여 사회에 기여하길 기대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제 마음이 많이 안 좋았던 건 “더 이상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게 되었다”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해도 아이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한순간에 부숴도 좋을 만큼 중요한 게 있을까요. 인간의 삶에서 그런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아버지가 ‘이중적’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리석음이야말로 진보적인 엘리트 부모들의 수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나왔을 때 편지를 보낸 학생처럼 반발심을 갖는 경우도 있겠지만, 적당히 혹은 원만한 분위기로 수용하는 경우도 많을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더욱 그럴 겁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존경심’이 부서지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힘들게 답장을 썼습니다. “무엇보다 나 또한 한 아버지로서 아버지를 존경할 수 없다는 말이 참 아프네요.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님이 이 일을 통해 아버지를 비롯한 진보 지식인들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만 얻게 되는 걸 거예요. 나는 이 일이 ○○님으로 하여금 우리를 지배하는 시스템, 즉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대체 얼마나 강력한 것이기에 내 아버지 같은 분도 흔들리는 걸까, 질문하는 계기가 되길, 더 깊이 공부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요. 괴물이 강력한 만큼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넘어서는 행로 또한 길겠죠. 그 긴 행로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도 회복되길 기도할게요.”

대안학교 학생 “서울로 가고 싶어요”
생각나는 또 한 가지 일이 있습니다. 제가 이따금 대안학교에 강연을 하러 갑니다. 대안학교는 분당의 이우학교처럼 ‘도시형’을 표방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자연조건이 좋은 비도시 지역에 있는 경우가 많고 기숙형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곳에서 강연을 하면 자고 오기도 합니다. 그날도 그런 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학생 몇몇과 꽤 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대안학교 학생들은 일반학교 다니는 학생들과 생활이 다르다보니 대체로 생기도 있고 자기 의사표현도 적극적인 편입니다. 그런데 그날 이야기를 나눈 학생들 중 한 명은 내내 기색이 안 좋아서 고민거리라도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습니다.

그가 불쑥 말했습니다. “집에 가고 싶어요.”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대치동요” 했습니다. 그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습니다. 그 동네 학생들은 잠도 못 자고 학원을 돌지 않느냐, 그게 좋으냐 했더니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렇든 저렇든 자긴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들과 지내고 싶다는 거였습니다. 처음엔 좀 희한한 친구로군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좀 더 대화하며 그를 이해할 수 있었고 그날 저는 중요한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학교 3학년을 마칠 무렵 어느 날 부모님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고, 이 학교에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대안학교가 뭔지 거의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함께 생활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생활에 만족하는 편이라고 했습니다. 자연 속에서 생활하며 입시공부가 아니라 조화로운 일과를 보내는 생활을 마다할 아이는 아마 많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한국 고등학생들의 생활을 생각한다면 대부분 부러워할 만한 생활이 틀림없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태도는 잘못된 것일까요. 저는 그의 태도가 그 자체로 일단 존중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

그의 부모 역시 앞서 말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위해 고민했고 나름 최선의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그의 부모를 경쟁교육의 불안감을 극복했다고 상찬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비현실적인 관념에 빠져 있다고 냉소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이유나 가치를 떠나서 그의 부모는 앞서 말한 아버지와 결국 다르지 않습니다. 교육적 판단과 선택에서 정작 주인공인 아이를 빠트리고 있다는, 아이를 철저하게 대상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계속)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