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교육이 힘든 건 자본주의 너 때문이야

신자유주의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끼쳐 왔는가를 생각한다면 참 기막힌 역사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피 흘려 싸웠는데, 자유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옥을 맞아들여야 했으니 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늘 한국 부모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든 유령의 정체는 ‘자본주의’입니다. ‘자본주의? 한국이 언제는 자본주의 아니었나?’ 반문하는 분도 있겠지요.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 같은 자본주의는 아닙니다. 알다시피 자본주의는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기반으로 합니다. 그런데 이 시장 경쟁이 매우 자유로운 경우도 있고 국가나 사회에 의해 일정하게 통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미국은 시장 자유가 강조되지만 유럽은 복지시스템이니 사회민주주의니 해서 상대적으로 통제가 많은 편입니다. 특히 북유럽이 그렇지요.

갈수록 빈부격차 나는 자유시장의 정체
북유럽은 정치적 자유의 수준도 매우 높은 편입니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와 시장 자유가 반드시 반비례하는 건 아닙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는 ‘시카고학파’의 자문대로 강력한 시장 자유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피노체트가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한국 독재자 박정희는 시장을 통제하는 계획경제를 선택했습니다. 박정희가 정주영이니 이병철이니 박태준이니 하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당신은 조선소 만들고 당신은 티비 만들고 당신은 제철공장 만들어’ 하는 식이었죠. 괜히 독재겠습니까. 독재자 마음대로 하니까 독재겠지요.

어쨌거나 이 시장 자유라는 게 문제입니다. 자본주의는 봉건사회를 무너뜨리고 등장했습니다. 봉건사회는 어떤 자질과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든 상관없이 아버지의 신분에 따라 귀족으로 살기도 하고 비천하게 살기도 했던 사회지요. 자본주의는 신분이 누구든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을 통해 제 능력과 노력을 펼치며 옛 귀족들 못지않게 살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소수의 부르주아 계급만 그렇게 살아갈 뿐 대다수 노동자 대중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 형편이었지요. 그럼에도 자유로운 경쟁의 결과이니 정당하다는 식이었고요. 지금도 시장 자유론자들은 똑같은 주장을 반복하고 있습니다만, 시장에서 자유로운 경쟁은 공평할 수가 없습니다. 빈부격차가 갈수록 심해지는 현상이야말로 자유 시장의 정체입니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 김정근 기자

언젠가 ‘불가리스’라는 이름의 요구르트 광고에 불가리아의 장수마을이 등장한 일이 있습니다. 요구르트 먹고 장수한다는 내용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후 TV에서 같은 마을을 취재한 다큐가 방송되었는데 놀랍게도 장수노인이 한 명도 없었습니다. 마을 묘지엔 불가리아가 공산주의 체제를 벗어난 1990년 이후 3년 동안 죽은 노인들의 묘로 그득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사회주의 시절엔 안락하진 않았지만 적어도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하진 않았다. 그러나 사회주의가 무너지면서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해야 했다. 노인들은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했다.”

넬슨 만델라라는 분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오랜 헌신과 투쟁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을 인종차별 독재에서 벗어나게 한 주역 중의 한 사람이지요. 그런데 만델라 집권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기대수명이 25년이나 줄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정치적 자유와 함께 시장 자유가 물밀듯이 들어왔는데, 정치적 독재에 시달릴 때보다 시장 자유가 만들어낸 스트레스가 더 컸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도 비슷한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대부분의 세월을 정치적 자유도 없고 시장의 자유도 없는 상태로 보냈지요. 정치적 자유를 얻기 위한 수십년의 투쟁 끝에 결국 극우독재가 물러나고 민주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본격적인 시장 자유가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때마침 세계는 거센 시장 자유의 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바로 ‘신자유주의’입니다.

신자유주의가 한국인 삶에 끼친 영향
자본주의는 초기 이래 시장 자유를 기반으로 해왔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옥 같은 삶을 살다보니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나고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한가지라고 생각한 많은 노동자 대중이 그에 가담했습니다. 또한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상품을 생산하고 또 구매하는 방식으로 돌아가는 체제인데 노동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지니 제대로 돌아가기 어려울 수밖에요. 국경을 넘어선 시장 경쟁은 결국 세계대전으로까지 귀결되었습니다. 이러다간 판 자체가 깨진다는 위기감에서 시장 자유를 일정하게 통제하거나 보완하는 ‘수정 자본주의’ 움직임이 생겨났습니다. 케인즈주의니 복지시스템이니 하는 것들이 다 그런 것들입니다. 사회주의 운동이 자본주의를 극복하려는 것이라면 수정 자본주의는 자본주의를 더 튼튼하게 만들려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차대전 이후에는 수정 자본주의가 주류가 되었고 30여년을 그렇게 잘 갔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시 불황과 경제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여기에서 길게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자본주의는 주기적으로 불황과 공황을 반복할 수밖에 없는 경제체제입니다. 여하튼 그러면서 수정 자본주의 시절 동안 겨울잠을 자야 했던 시장 자유론자들이 깨어나게 됩니다. 영국의 대처와 미국 레이건의 주도로 세계는 신자유주의 바람에 휩싸입니다. 신자유주의가 이후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 영향을 끼쳐 왔는가를 생각한다면 참 기막힌 역사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피 흘려 싸웠는데, 자유라는 이름의 새로운 지옥을 맞아들여야 했으니 말입니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지탱해주는 복지나 공공성 따윈 폐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노동 유연화라고 해서 비정규직이 늘고 정규직도 해고가 쉬워집니다.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20대 80의 사회는 10대 90의 사회로, 다시 1대 99의 사회로 변해갑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불안감과 고단함에 시달리게 됩니다. 사회체제가 사람을 풀빵처럼 찍어낼 순 없지만, 사회체제의 격변이 만들어내는 경향성은 누구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가 매우 짧은 기간에 세계 최고 수준의 자살률과 최저 수준의 출산율을 보이게 된 건 신자유주의가 한국인들의 삶에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줍니다.

김규항의 동병상련 부모공부

신자유주의는 당연히 교육도 바꾸어냅니다. 2001년 1월 29일 김대중 정부는 교육부를 폐지하고 ‘교육인적자원부’를 만들면서 장관을 부총리 급으로 승격합니다. 교육의 정체성이 변했음을 국가적으로 선언한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부모들에게 교육이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건 교육이 사람을 키우는 일이 아니라 상품을 만들어내는 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가 아니라 ‘얼마짜리가 될 것인가’를 늘 고민하는 부모에게 기쁨과 즐거움이 깃들 순 없겠지요. 불안하고 또 불안할 뿐입니다. 유령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