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일촉즉발 ‘억하심정의 사회’

아주 강력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사는 우리 각자는 그 압력을 사소한 일상의 시비를 통해 거칠게 터트려버리는 화약고처럼 살고 있다.

내 작업실은 행주대교 북단의 어느 허름한 동네 5층짜리 빌딩 4층에 있다. 신년 벽두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그날따라 1층 식당에 손님들이 모처럼 많이 들었다. 이 식당은 원래 돼지고깃집이었는데 장사가 안 돼서 오리고기도 팔고 뼈해장국도 팔고 여름에는 냉면도 하고 겨울에는 순댓국도 하고 가족 손님들을 위해서 돈까스도 팔고 4000만의 일용식인 비빔밥이며 된장찌개도 판다. 그 모든 메뉴를, 새로 개발할 때마다, 간판이며 유리창에 다 써붙여 놓아서, 그 현란하면서도 조야한 글씨체가 이 시대 자영업자들의 복잡한 내면을 보여준다.

차 뒷유리창에 붙은 각양각색의 문구들. | 정윤수

사소한 말싸움 거친 욕설로 번져
아무튼, 주차구역 안에 있던 차가 일렬 주차된 차들을 비집고 빠져나가려다가 여의치 않아 서너 대의 차주들에게 전화를 걸었던 모양이다. 나도 내려가서 일단 내 차를 이제 막 빠져나가려는 차가 있던 비좁은 구역으로 우겨넣었다. 그러는 중에 큰소리가 들렸다.

“아줌마, 그냥 도망가면 안 되지. 거기 기다려!”

빌딩 3층에서 건장한 두 사람이 뛰어내려왔다. 운전실력이 서툰 그 ‘아줌마’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탈 탈 탈, 시동소리와 함께 멈춰 있었다. 복잡한 주차장에서 한 대의 차가 나가기 위해 두세 대의 차가 앞뒤로 밀리미터 간격으로 후진했다 전진하는 각양각색을 지켜보던 중에 자신들의 차 뒷범퍼를 스친 것으로 판단한 두 사내는, 그런 접촉사고가 실제로는 없었기에 별 생각없이 빠져나가려던 운전자를 멈춰세운 것이다.

그로부터 3분 동안 이 나라에서 별일도 아닌 오해와 사소한 말싸움이 어떻게 거친 욕설과 몸싸움으로 번지는가를 생생히 목격했다. 요즘 흔한 표현대로 ‘사실관계’부터 확인하자면 비록 운전이 미숙했지만 그 차는 남의 차를 긁거나 스치지도 않았다. 이는 뛰어내려온 두 사내도 금세 확인했다.

그러면 양측 모두 쌀쌀한 겨울바람을 피해 돌아서면 그만이건만, 그들은 주차장에 내려오자마자 “아니, 기스를 내고 그렇게 도망가면 되냐?”고 거칠게 말했다. 자기 차의 뒷범퍼를 확인하지도 않고 범죄현장을 급습한 것처럼 굴었다. “도망가긴 누가 도망가요?” “위에서 우리가 다 봤다니까, 아줌마.” “아줌마라니, 그리고, 언제 봤다고 반말이야.” “도망치니까 그렇지.” 그렇게 시작한 말들은 급기야 험악한 사태 일보직전까지 갔다. 주차관리인과 나 같은 목격자가 한두 마디 거들게 되어 사태는 일단락되었으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3분의 소동은 이 사회가 얼마나 신경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는가를 보여줬다. 최근 출판계에는 ‘피로사회’, ‘단속사회’, ‘감시사회’, ‘잉여사회’ 같은 책과 담론들이 유행처럼 번졌는데 나에게 또 하나의 말을 제안해 보라고 한다면 나는 ‘억하심정의 사회’라고 말하고 싶다.

원래 이 말의 사전적 뜻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감정이나 행동을 가리키지만, 한국의 현대사는 이 말의 사회적 뜻을 ‘뒤틀리고 억눌리고 맺힌 마음’으로 무겁게 만들어버렸다. 답답하고 억울하고 화가 나는 상태인데,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억하심정에 시달리고 있다. 이 맺힌 감정이 조금이라도 오해를 받거나 모멸적인 언사를 듣거나 사소한 시비에서 밀린다 싶을 때, 순간 격한 말과 행동이 터져나온다. 이러하지 않은 사람이 드물 것이고, 이런 광경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내가 목격한 주차장의 3분 또한 저마다의 마음속 어딘가에 내장되어 있던 기나긴 삶 속의 억울함, 모멸감, 피해의식 즉 상처 입은 자존감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람을 향해 즉발적으로 발사된 것이었다. 문제는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발생한 억하심정이 자신의 삶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누군가를 향해 분사된다는 것이다. 아주 강력한 정치적·경제적·사회적 압력에 짓눌려 사는 우리 각자는 그 압력을 사소한 일상의 시비를 통해 거칠게 터트려버리는 화약고처럼 살고 있다.

수시로 경험하는 자동차 경적과 하이빔
운전을 하다 보면, 그런 일들이 몇 날 며칠에 한두 번은 꼭 발생한다. 심야의 차량은 앞서 달려가는 나에게 하이빔을 거칠게 비춘다. 나는 번쩍거리는 그 불빛이 어떤 뜻인지 잘 알고 있다. 왜 텅 빈 도로에서 느리게 가느냐는 신호다. 그 차량의 하이빔은 마치 난사되는 총기의 불빛처럼 거듭 내 차를 쏘아댄다. 나 또한 어떤 순간에 거칠게 경적을 눌러댄다. 왜 깜빡이도 켜지 않고 끼어드느냐는 항의지만, 아마도 그날 나는 다른 장소에서 불쾌한 일을 겪었을 것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그나마 이런 일들은 차가 어찌되었든 움직이고 있을 때다. 정체되었을 때, 신호대기가 길어서 한참이나 서 있을 때, 바겐세일을 한답시고 백화점들이 시내 요처의 길목을 모조리 막아버렸을 때, 그럴 때는 간신히 브레이크에 발을 얹은 채 심드렁하게 앞을 바라볼 뿐이다. 그 순간, 앞선 차들의 뒷유리창에 붙어 있는 신호들은 일촉즉발의 억하심정을 잠시나마 눌러준다. 어떤 것은 애교가 지나쳐서 짜증을 불러일으키고 조금은 밉상스런 문구도 있지만,(어떤 때는 “네 애만 소중하냐”고 말하고 싶다) 대체로 30대 운전자들이 운전하는 소형차 뒷유리창의 문구들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압력밥솥의 증기를 살며시 빼준다. 이렇게라도 우리,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