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15) 갱년기는 삶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시기

자녀의 생산과 양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정체성을 이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으로 확대하여야 한다.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젊음과 용모로 평가받는 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여성은 ‘직장의 꽃’이 아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의 여성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갑자기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고 땀이 나는 열감을 느끼고 당황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편한 관계에서는 “갱년기가 왔나 봐요”라며 자신도 이럴 경우 무척 당황스럽다고 솔직히 이야기한다. 남성들도 여성과 마찬가지로 갱년기에 신체적인 변화를 겪지만 여성이 훨씬 더 뚜렷하게 경험한다. 청소년기에도 소녀들은 초경이라는 분명한 생리적 변화를 동반한다. 소년의 경우에는 비록 몽정이나 취침 동안 발기를 하는 등의 증상이 나타나지만 소녀보다 뚜렷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폐경기와 갱년기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폐경기와 갱년기는 동일한 개념이 아니다. 갱년기는 여성의 경우 폐경 전 생식이 가능한 상태에서부터 폐경 후 생식 능력이 상실된 상태로 변화되는 시기 전체를 의미한다. 반면에 폐경기는 생리가 최종적으로 정지된 시기를 의미한다. 따라서 시간적으로 갱년기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이다. 한국 여성의 갱년기는 평균 폐경 연령인 48세를 전후하여 5~10년의 기간에 해당한다.

생리적으로 삶을 구분하는 갱년기는 55세 전후로 끝난다. 갱년기는 남녀 모두에게 심리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해 ‘제2의 인생’을 준비하는 시기이다. 중년 남녀들이 지난여름 서울대공원 치유의 숲에서 산림치유사들의 도움을 받아 명상을 하고 있다. / 이상훈 선임기자

폐경기 여성 우울증 많이 사라져

대부분의 여성들에게 폐경은 심리적으로 심각한 일이 아니다. 예전에는 폐경을 맞아 여성들이 우울증을 앓는다는 보고가 많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그렇지 않다는 연구 결과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우리나라 중년기 여성을 대상으로 폐경에 대한 불안을 알아본 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대상자들이 폐경에 별로 개의치 않았고, 예상보다 많은 여성들이 오히려 매달 겪는 불편함에서 자유스러워진 것을 홀가분하게 느끼기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시에 임신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성생활을 즐기는 여성도 있다. 그리고 양육의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을 ‘해방’이라고 생각하는 여성도 점점 늘고 있다.

하지만 일부 여성들은 아직도 폐경을 맞아 상당한 우울증을 겪고 있다. 이유는 폐경에 따른 생리적인 반응이라기보다는 폐경에 대한 심리적 태도가 중요한 요인이다. 폐경과 관련된 심리적 반응은 여성의 정체성에서 생식(生殖) 능력이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는지에 달려 있다. 여성이 자신의 정체감을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진다. 폐경은 한마디로 생식 능력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성정체성을 애를 낳고 기르는 것을 중심으로 형성했다면 생식 능력이 끝났다는 것은 심리적으로는 살아갈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더 이상 여성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노파가 되어갈 뿐이라는 부정적 인식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폐경으로 인한 주관적 여성성 상실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다.

심리적 증상은 문화의 영향도 많이 받는다. 폐경 이후의 여성의 삶이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문화에서는 당연히 폐경에 대한 여성의 부정적 영향도 없을 뿐만 아니라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폐경이 사회적 보상을 가져다주는 인도의 예를 보면, 폐경 전의 여성들이 오히려 페경을 기다리기까지 한다. 인도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많은 사회적 금기를 지키며 살아간다. 외출할 때 베일을 쓰고, 남성 사회에서 격리된 여성들만의 영역에서 활동해야 한다. 하지만 폐경 이후에는 가족 외의 다른 남성과도 비교적 자유스럽게 교류할 수 있고, 심지어 음주가 허락되기도 한다. 이런 문화에서는 당연히 나이 든 여성의 상징인 페경은 환영받기까지 한다.

갱년기 후 삶의 정체성 다시 확립해야

프랑스의 작가이자 여성해방 운동가였던 시몬 드 보부아르(1908~1986)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녀에 의하면, ‘여성의 운명 혹은 종속성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역사적인 산물’이다. 여성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사람은 생물학적인 요인에 큰 영향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영향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또한 인간의 위대한 점이다. 생물학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것은 심리적·문화적 힘이다.

남성도 여성처럼 급격하게 일어나지는 않지만 갱년기를 경험한다. 남성의 정자 생산능력은 일반적으로 40세를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하기 시작한다. 60세 이후에는 정액의 양도 현저하게 감소한다. 이런 변화는 남성호르몬의 점진적인 감소에서 비롯된다. 생식 능력의 감소와 함께 중년의 남성은 성욕이 감퇴하기 시작한다. 중년 남성들 사이에서 세간에 회자되는 “아내의 샤워 소리가 두렵다”는 우스갯소리가 전적으로 농담만은 아닌 이유이다.

앞으로는 자녀의 생식과 양육 여부로 여성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기존의 문화적 전통은 점점 사라져갈 것이다. 생리적으로 삶을 구분하는 갱년기는 55세 전후로 끝난다. 길어진 수명 덕분에 현재 신체적으로 건강한 중년들은 갱년기 이후의 삶을 최소한 30년 이상은 더 살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갱년기에 대한 정의도 달라져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삶의 정체성을 다시 확립해야 한다.

갱년기의 ‘갱(更)’이라는 한자어는 ‘다시’라는 뜻과 ‘고치다’, ‘개선하다’, ‘새로워지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갱년기라는 한자어의 원뜻은 ‘다시 새로워지는 시기’라는 말이다. 그 이야기는 갱년기는 다시 새로워지는 시기라는 뜻이다. 생물학적으로는 자녀의 생산과 양육에 맞추어져 있던 청년기를 마감하고 어머니와 아버지로서의 삶에서 벗어나는 시기이다. 이제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지만 양육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잠시 유보했던 삶을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시기이다.

심리적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여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시작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시기이다. 자녀의 생산과 양육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정체성을 이제는 한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으로 확대하여야 한다. 이제 여성은 더 이상 젊음과 용모로 평가받는 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 더 이상 여성은 ‘직장의 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평가받는 한 인간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야 한다.

문화적으로도 더 이상 여성을 생식과 양육의 역할에 묶어두지 말아야 한다. 출산과 양육의 신성함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신성한 역할을 다한 후에는 새로운 역할과 가치가 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문화가 갱년기 이후의 삶을 존중하고 새로운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한다.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발달은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해 나가는 과정이다. 그리고 살아있다는 것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물학적인 잠재력만 실현해나갈 것이 아니라 심리적·사회적 그리고 영(靈)적인 잠재력도 실현시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은 20세기에 걸맞은 생물학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제 100세 시대를 내다보는 21세기에는 우리 삶을 심리적·사회적·영적인 면까지 확장해서 재정립할 수 있는 총체적 시각이 필요하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갱년기는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이다.

<한성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syhan@kore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