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홧김에 때리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랍시고 말하는 것도 쑥스러워하는 그 세대.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어서 오십쇼, 어디로 가세요?”
“덕수궁길 지나 정동 쪽으로 가주세요.”
나는 피곤하거나 급할 때 택시를 타기 때문에 택시 안에선 가능한 아무 말을 하고 싶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종종 의도적으로 눈을 감거나 창밖만 바라보곤 한다. “덕수궁 근처에 약속이 있으신가 봐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기사분이 말을 건넨다. “네.” 나는 가능한 한 짧게 말했다. “거, 왜 덕수궁 돌담길에서 예전엔 데이트들 많이 하지 않았나요? 저도 예전엔 꽤나 서성거렸습니다. 하하하.” 그제서야 힐끗 백미러에 비친 기사님을 보니까 나와 연배가 비슷해 보인다. “아, 그러셨어요.” “우리 마누라도 친구들이랑 그쪽에 한 번 가면 한나절을 수다를 떨다 오는지, 뭐하는지 아이고.” 꽤 말씀이 많아질 것 같아서 나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중년남성들은 자식들에게 실수를 한 뒤 어떻게 풀어야 할지 잘 몰라 마냥 침묵을 지키는 경우가 많다. 전문가는 옛날 집마당에 있는 펌프가 마중물을 한 바가지 부어주면 시원한 물을 쏟아내듯 조금씩 마음을 열며 기다리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조언한다. 서울 강남구 논현동 영동중앙교회에서 열린 두란노 아버지학교 수료식에서 세족식을 마친 남펀이 아내를 안아주는 행사를 하고 있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부부가 살다보면 한 대 때릴 수도 있다?”
“그, 제 자랑 하나만 하겠습니다. 제가 아들만 둘인데, 엊그제 둘째 녀석 장가보냈습니다.” 무료한 탓인지 아님 그만의 영업 태도인지,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또 말을 건넨다. “축하드려요.” 나는 조금은 인색하게 대답을 건넸다. “둘째 녀석은 지 에미를 닮아서 조금 꽁하고 말수가 없는데, 또 요샌 그런 애들 좋다는 젊은 아가씨들이 많더라구요. 세상 많이 변했어요. 하하하.” “네, 차분해서 좋죠.” “그런데, 첫째 놈은 일찍부터….” 나는 약간 졸음이 오는 건지, 가을 날씨에 하품이 나는 건지, 혹은 피곤한데 기사님이 눈치도 없이 본인 가족사를 말씀하시는 게 짜증이 난 건지 정신을 슬슬 놓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먼 하늘 닮은 한강 빛에 팔려 있었고, 저쪽 강변에 새로 올라가는 주상복합빌딩에 빠져 있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그래서 한 대 때렸죠. 근데 이놈이 그걸 본거라!”
‘때렸다’는 말에 여러 갈래로 흩어지던 내 정신이 번쩍했다.
“네?” “왜 부부가 살다보면, 한 대 때릴 수도 있고, 또 맞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도 젊고 혈기왕성할 때라. 근데 애들은 사춘기 어릴 때니 뭘 몰랐겠죠. 그래서 큰 애랑은 꽤 오래 뭐, 말도 잘 안하고, 뭐 그랬죠. 근데, 뭐. 에휴.” 더 들을 것도 없이 감이 왔다. 아내를 홧김에 때리고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고,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과랍시고 말하는 것도 쑥스러워하는 그 세대. 순간 나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불쾌감이 들고, 어이가 없었다. 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흘끗 보는 것 같았지만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아 얼굴을 돌렸다.
3~4분이 흘렀을까? 이 택시를 탄 후에 처음 맞는 긴 침묵이 지나고 있었다. 도착할 때까지 그냥 이대로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호탕해 보이지만, 아내를 때려 마뜩잖은 기사를 이렇게 말없이, 그러나 지그시 응징하고 싶었다. 그런데 잠시 후, 내 기분 탓인지 백미러로 스쳐 보이는 기사의 얼굴이 머쓱해 보이고, 운전하는 뒷모습도 멋쩍어 보였다. “큰 아드님도 출가하셨어요?” 왠지 이 침묵이 조금 가혹하게 느껴져서 먼저 입을 떼고 말았다. “예, 걔는 고등학교 때 좀 방황하더니 학교도 저기 멀리 지방으로 다녔습니다. 기숙사를 4년 내내 쓰대요. 참 내. 지금도 저기 창원에 있습니다. 선배 회사 다니고 있는데, 올해는 그래도 좀 잘 되는지 동생 결혼한다고 200을 턱 내놓는 거 있죠. 참 내.” “첫째 아드님이 듬직하네요.” “체!” 두 번째 침묵이 또 시작되었다.
“따님 있으시죠?” 그가 뜬금없이 묻는다.
“네. 하나요.”
“제가 이래 봬도 사람을 많이 상대하잖아요. 대개 보면 집안에 딸이 있는 손님들은 얼굴이 밝아요. 주위에 보면 죄다 그래요.” 확신에 차서 얘기하는 그에게 “그래도 아들 둘 있다고 하면 많이들 부러워하실 텐데요, 뭘.” “아닙니다. 옛날 얘기예요. 요새는 딸이 있어야 해요. 딸이.” “기사님은 딸이 있었으면 하나 봐요?” “그럼요. 보니까 딸들이 아빠를 이해하더라구요. 아들 새끼들하곤 달라요. 딸들은요, 조용히 와서 아빠, 이거요! 이거는 아빠 건강에 안 좋고요, 이런 거 꼭 챙겨 드시고요, 아빠 이건, 정말 잘하셨어요, 이러더라구요. 세상에.” “많이 부러우신가 봐요. 그래도 아들들은 말이 없어도 어딘지 든든하잖아요.” “아니오, 아들들은 제 엄마만 알아요. 그저 지 에미 앓은 소리하면 회사 갔다 오면서도 그냥 쪼르르르 달려오고, 애비가 술 한 잔 마시자고 나오라 그러면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그때 나는 좀 전의 불편한 마음이 올라와서 말을 가로채며 한마디 하고야 말았다. “딸들은 근데 아빠가 엄마 때리면 아빠를 다신 안 볼 텐데요.” “아뇨! 딸은 아빠 편이더라구요. 자세히 보니까 그래도 딸들은 아빠를 이해해 주더라구요. 아빠들이 밖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도 알고, 내가 왜 그랬는지, 그땐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또 그 후에 그, 미안한 마음! 자식들 앞에서 그 제대로 본을 못 보인 거, 그런 아버지 마음을 딸들은 알아주는 것 같더라고요. 참 이상하대요… 아들 새끼들은 턱도 없어요. 눈만 그냥 시퍼렇게 뜨고. 에휴.”
앞뒤가 안 맞는 그의 상상의 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오히려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었다. 처음보다 처진 기사분의 어깨가 눈에 들어오며 더 이상 딸, 아들 이야기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남자에게는 입안에서 우물거리고 있는 미안함을 꺼낼 수 있는 그 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사자에겐 얽힌 사정이 있으니 직접 사과도 못하고, 그냥 이렇게 혼자 독박쓰기엔 억울하고, 그래도 실수가 과한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울 때 누군가 한 사람만 타박 없이 기다려줬으면 어땠을까? 사과할 때까지 기다려주고,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장을 마련해 주었다면 어땠을까? 누가 봐도 내가 잘못했을 때, 그래서 모두에게 비난받고 비난받아 마땅할 때가 사실 가장 내 편이 필요할 때이고, 그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때인 것을. 그래서 더욱 가상의 딸이 간절했나 보다.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어느새 창밖에 차들이 꼬리를 물고 있었다. “이렇게 밀릴 땐 도리 없어요. 속 터지지만 그냥 천천히 가는 수밖에요. 이러다 또 뚫리기도 하고….” 나를 위로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아들들에게 아빠의 답답한 마음을 전해 보셨나요?” “다 부질없어요. 예전엔 그래도 어떻게 해보고 싶어 시도도 했는데 영 소용없어요.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사는 거지요 뭐.” “내 마음 알아주는 딸도 없는데, 말도 안 하면 어떻게 알겠어요. 이젠 아드님도 결혼도 했고 사회인이 됐으니 예전과는 다르지 않을까요?” “하긴 며늘아이가 들어오니까 뭔가 새로운 분위기가 기대되기도 하대요. 참 이상해요.” “당연하죠. 지금이 가족들과 가까워질 좋은 기회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느 틈에 나는 백미러로 그와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짐짓 놀랐다. 차들이 밀린 지루함을 덜기 위한 자동적인 행동인지 아님 내 직업의식이 발동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우린 이 난국을 헤쳐나가려 했다.
“근데 기사님, 아까 아내분을 때렸다며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고 또 그러면서 사는 거라고 하셨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글쎄, 그게 잘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나이 들어 인생 살아 보니 어떤 부분은 후회되는 거라. 특히 자식들이 그 일로 인해 나와 멀어지게 되니, 또 이제 와서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고…, 아내에게 제대로 믿음도 주지 못한 것 같고….”
“후회되고 허전하신가 봐요. 미안하기도 하고….” “그렇죠. 나름 그동안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아왔는데, 누구도 그런 말 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라. 글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암튼 내 불찰이 크죠.”
어느덧 목적지에 도달했다. 내리면서 백미러를 통해 본 그의 얼굴은 처음과는 달리 복잡해 보였다. 나를 이곳에 무사히 데려다 준 것처럼 그 역시 그의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렸을 때 집마당에 있던 펌프가 생각났다. 여름철에 시원한 지하수를 콸꽐 쏟아내는 펌프도 잠시 사용을 안 하면 말라서 물이 안 나왔다. 이럴 때 물 한 바가지를 부어주면 다시 시원한 물이 끝없이 나오는 펌프가 신기하기도 했다. 마중물. 그는 언제나 마중물을 부을 용기가 생길까?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suh0623 @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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