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이렇게 또 봄날은 간다

그야말로 꽃대궐! 누군가에게는 여의도의 벚꽃이 으뜸이겠지만 내게는 응봉산의 노란 개나리들이 봄이다. 꽃이 피는 순간들이, 응봉산의 개나리는 물론 우리가 지난 며칠 사이에 보았던 도처의 꽃들로 인하여 전염병처럼 산하를 뒤덮었다. 그리고 꽃들은 이내 힘없이 추락하였고 봄날은 간다. 삶이 그렇듯이, 언제나 봄날은 짧다.

해마다 이맘 때면,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 지면의 직접적인 관심이 인간이 빚어낸 이 화려하고도 살벌한 대도시의 이미지를 채집하고 독해하는 것이지만, 이를테면 도시에 만개한 꽃에 대하여 몇 마디 할 수도 있다는 암묵적 동의가 있지 않을까 싶어, 그 시를 떠올려 본다. 위로는 고형렬과 문인수, 중견으로는 문태준, 함민복과 더불어 일종의 서정시파를 형성하고 있는 손택수의 시 ‘목련 전차’다. 이렇게 시작한다.

“목련이 도착했다
한전 부산지사 전차기지터 앞
꽃들이 조금 일찍 봄나들이를 나왔다”

시인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지금 봄꽃 전차들이 온 나라를 쿵쾅대며 달린다. 개화 시기를 조금 늦춰 잡으며 꽃 축제를 준비했던 많은 지자체들이 서둘러 봄꽃 전차의 행렬에 맞춰 겨울 내내 준비했던 행사들을 차려낸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주에는 여의도의 어느 방송국에 갔다가 제때 빠져나오지를 못했다. 평일이었음에도 퇴근 무렵이 되자 벚꽃을 보러 여의도에 진입한 인파와 점심시간 때 그 꽃들을 일별하였으므로 섬이 폐쇄상태에 이르기 전에 탈출하려는 직장인들이 뒤엉켰는데, 그 틈에 나도 끼어서 윤중로에서 한참이나 서 있었다.

그 덕분에 봄꽃을 한참이나 보았다. 봄꽃을 보러 나온 사람들도 보았다. 이렇게 피고 지는 봄꽃들, 열 번을 보면 10년이 가고, 스무 번을 보면 20년이 가고, 살아 생전에 봄꽃들 창궐하는 풍경 서른 번 정도 보면 인생의 한 장막이 내려지고 마는데, 그래서일까, 꽃을 보는 마음들은 처연해 보였다.

하룻밤 새 팝콘처럼 작렬하는 꽃들
놀라운 것은 그 꽃들을 보면서 실은 그 꽃들이 겨우내내 내 주변에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자명한 생각이었다. 지난주에 내 작업실 근처의 어느 연립빌라 담벼락에 꽃이 피어올랐다. 자주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그 나무가 그런 꽃을 피울 거라고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지난주에 어느 대학에 강의를 나갔다가 학교 뒷산의 바위들을 칭칭 감으면서 노란 개나리가 피어올랐는데, 언제나 그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며 잠시 쉬면서도 그 키 낮은 나무가 그토록 강렬한 노란 빛깔을 내장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일이 없다. 지난주에 1층 없는 2층에 사는 우리 집 아파트 베란다 앞에 꽃나무가 팝콘을 터트리듯이 불과 하룻밤 사이에 작렬하고 말았는데, 겨울 내내 거기서 서서 담배를 피우면서도 그 나무가 봄이면 생명의 찬란한 꽃망울로 폭발할 것이라고 여기지는 못했다.

지난주에 강남을 가기 위해 성수대교를 넘었어야 했는데 강변북로에서 성수대교 북단으로 한참을 달리다가 응봉산을 뒤덮은 개나리꽃들을 보았다. 아! 언제나 그랬었다. 그래, 나는 그 작고 여린 개나리꽃들이 서로 연대하여 응봉산을 뒤덮을 때면 ‘아! 봄이구나’ 하고 심장이 울컥하곤 했다. 올해도 어김없었다. 하마터면 성수대교를 놓칠 뻔했다. 그야말로 꽃대궐! 누군가에게는 여의도의 벚꽃이 으뜸이겠지만 내게는 응봉산의 노란 개나리들이 봄이다. 언젠가 시간이 된다면 초봄에 응봉산에 며칠 동안 머물면서 개나리꽃들이 활짝 터져 산을 뒤덮는 절정의 순간들을,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서 몇날 며칠이고 직접 눈으로 보고 싶을 정도다.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윤이상의 제자로 일본 현대음악을 이끌고 있는 호소가와 토시오의 작품 중에 호른 협주곡 ‘꽃 피는 순간’이 있다. 2011년 11월에 사이먼 래틀의 베를린 필하모닉과 호른 주자 스테판 도르의 실연을 들은 적 있다. 아니, 봤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산사의 연못 속에서 연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그 꽃 피는 순간을 묘사한 곡인데, 바로 그 순간 2층 객석에서 두 대의 호른과 두 대의 트럼본이 바람이 되고 물이 되고 마침내 연꽃으로 찬란하게 피어나는 순간을 연주하자 연주장 전체가 고즈넉하면서도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찬 산사의 연못으로 변해버렸다. 그런 순간들이 응봉산의 개나리는 물론 지금 우리가 며칠 사이에 보았던 도처의 꽃들로 인하여 전염병처럼 산하를 뒤덮었다.

4월 1일 고양시 덕양구 능곡동에 핀 봄꽃(왼쪽)이 사흘 만에 절반 이상 사라져 버렸다. /정윤수

그리고 꽃들은 이내 힘없이 지고 만다. 손택수의 ‘목련 전차’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난밤 내려치던 천둥번개도 쩌릿쩌릿
저 코일을 따라가서 動力(동력)을 얻진 않았는지,
한 량 두 량 목련이 떠나간다
꽃들이 전차 창문을 열고 손을 흔든다”

꽃이 피는가 싶었는데, 찬 바람이 불어닥쳤고, 비도 내렸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자 여린 꽃들은 땅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꽃이 / 피는 건 힘들어도 / 지는 건 잠깐이더군 /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 아주 잠깐이더군” 최영미 시인은 이렇게 썼다. 확실한 리얼리즘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나는 일부러 시간을 내서 작업실 부근의 연립빌라에 가보았다. 사흘 만에 나무에 매달려 있던 꽃들이 절반 이상이나 사라져버렸다. 그 사이 바람이 심했고 봄비도 내렸었다. 꽃들은 추락하였고 이렇게 또 대도시의 봄날은 간다. 삶이 그렇듯이, 언제나 봄날은 짧다.

<정윤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