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행정고시 개편, 웃는 자와 우는 자

로스쿨 졸업생·유학파 유리… 고시 준비생들 볼멘소리

“지는 해를 잡을 수 있겠느냐?” 행정안전부의 행정고시 개혁안 발표가 나온 8월 중순, 서울 노량진동에서 만난 한 행정고시 준비생(30)의 넋두리다. 4년째 공부 중인 그는 “지금까지 고시 준비는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며 “그러나 이번 제도의 핵심인 5급 전문직 공채에는 로스쿨 이수자나 석·박사 등 돈 있는 사람의 자녀만 유리해질 것”이라고 반발했다.

행정고시제도 변화에 대한 현장의 반응은 위기감이다. 수험생들이 서울 노량진에 있는 공무원고시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다. |김문석 기자

고시 대신 ‘특채’로 고위공무원 채용의 중심축이 이동하면서 울고 웃는 이들이 나타나고 있다. 고시 준비생들 사이에서는 고시제도 폐지를 현대판 음서제도(과거시험 대신 출신을 따져 관리로 임용하던 조선시대 제도)의 부활로 평가하는 분위기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박사학위 받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공직을 차지할 것이라는 우려 속에 일각에서는 로스쿨이 배출하는 인력을 소화하기 위해 행시를 축소한 게 아니냐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5급→7급→9급, 하향 지원 도미노
행정고시 준비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전문가 특채 비율이 50%(2015년)까지 늘어나면서 갑자기 좁아진 합격문이다. 서울 신림동 한림법학원 앞에서 만난 조모씨(32)는 행정고시 2차 시험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상태. 그는 “갈수록 시험을 통한 합격문은 좁아지고, 그렇다고 넓어지는 전문가 공채엔 자격 미달인 게 이곳 고시생들의 문제”라며 “채용 인원의 50%를 두고 우리끼리 경쟁해야 하는 처지”라고 말했다.

사정은 노량진동에서 만난 행시 준비생 곽모씨(26)도 마찬가지. “고시 준비 하나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없는 터라 취업 준비는 꿈도 못 꾼다”며 “전문직 공채 수가 늘기 전에 빨리 합격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스터디 동료인 홍모씨(27)는 “올해부터 행시 준비에 나선 학교 후배들이 있는데 이번 발표를 보곤 방향을 바꾸는 아이들이 더러 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불안함은 서울신문이 에듀스파·포털사이트 다음 카페 ‘행정고시 사랑’과 함께 지난 13~17일 행정고시 준비생(행시생) 550명을 대상으로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본 설문조사에도 잘 나타나 있다. 채용 인원의 절반을 점차적으로 민간 전문가에게 할당하는 데 대한 행시생들의 불만은 상당했다. 선진화 방안으로 인해 기존 행시생들의 입지가 축소될 것이라는 답변이 무려 473명(86%)에 달해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 가운데 절반은 이번 선진화 방안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나타냈다. 274명(50%)이 ‘이해할 수 없는 조치’라고 응답했고, 221명(40%)은 ‘큰 뜻에는 공감하나 시행 시기가 너무 갑작스럽다’고 답했다. 정부의 발표대로 ‘공직사회의 경쟁력이 제고될 것’이라는 답은 17명(3%)에 불과했다.

5급 준비생들의 동요는 7급과 9급 준비생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행정고시 응시자들이 7급으로 하향 지원해 경쟁이 더 치열해질 가능성이 예상되는 것. 노량진의 한 학원 관계자는 “5급 공채가 절반으로 줄어들면서 일부 행시생이 7급으로 눈을 낮추게 될 것으로 보인다”며 “결국 7급 행시생 중에서도 5급에서 내려온 행시생들과의 경쟁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엔 9급 시험으로 연쇄 이동할 수 있다”고 예상했다. 9급은 7급에 비해 응시과목이 2개 적다.

7급 공채 인원 자체도 줄어들 전망이다. 행안부는 이번 발표에서 학교 성적과 행정기관 근무를 통해 공무원으로서의 역량과 자질을 검증해 채용하는 지역인재추천채용제도를 보다 확대하는 대신 7급 공채 규모는 단계적으로 축소할 계획을 밝혔다. 이에 따라 대학의 추천과 1년간의 수습 근무를 통해 7급 공무원을 선발하는 지역인재추천채용 인원이 작년 50명, 올해 60명에서 2012년에는 100명까지 늘어난다. 다만 9급 공무원 공채 방식은 당분간 현 체제를 유지한다는 방침. 그러나 5급→7급→9급으로 이어지는 하향지원 흐름 탓에 9급 공채시험의 경쟁률도 상당히 높아질 전망이다.

행안부 발표 이후 수험생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로스쿨 졸업생 때문에 결국 우리가 희생양이 됐다”는 것이다. 정책 발표 후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이 가장 많이 찾는 포털사이트 다음의 카페 ‘행정고시 사랑’에 오른 글을 보면 절반은 정부의 갑작스러운 정책에 대한 반발이고, 나머지 절반은 로스쿨 졸업생에 대한 ‘혐의’다. 행시 준비생들이 정책 변경 최대의 수혜자로 로스쿨생들을 꼽고 있기 때문이다.

표정관리 들어간 로스쿨·회계사

수익이 적은 변호사 등 특정 전문직의 공직 진출이 많을 것으로 보고 있다. 변호사 사무실이 들어서 있는 서울 서초동 건물의 모습. |조득진 기자

로스쿨 제도는 21세기형 법률가를 양성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졸업 후 변호사시험 합격자들의 판·검사 임용 절차와 방식 등이 아직까지 결정되지 않았다. 이런 불완전한 상황에서 전국 25개 대학에 로스쿨이 설치됐고, 매년 2000명이 입학을 하고 있는 상태다. 이 때문에 행시생들은 현재 2012년 처음 배출되는 로스쿨 졸업생들의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 채용 방식에 변화를 준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이는 위 조사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설문 중 민간 전문가 채용 확대로 인한 최대 수혜자를 묻는 질문에서 356명(65%)이 로스쿨 졸업생을 꼽은 것. 대학교수나 기업인을 꼽은 답변은 각각 98명, 83명에 불과했다. 신림동의 한 고시학원 관계자는 “전문직 특채 선발은 결국 그 사람의 스펙을 보겠다는 것 아니냐”며 “5급 공무원에 준하는 스펙이라면 외국 법학과 졸업자나 로스쿨 출신 학생 정도가 맞을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실제로 민간 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특별채용이 확대된다는 소식에 직장인과 법학전문대학원생, 경영전문대학원생 등은 크게 반기는 분위기다. 특히 재야법조계는 이번 행안부의 조치로 로스쿨을 통한 변호사의 대량 배출을 앞두고 있는 변호사 고용시장에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일 것으로 보고 있다. 그동안 변호사 자격을 가진 공무원은 대부분 특채 형태로 선발돼 그 숫자가 극소수였을 뿐 아니라 조직 적응에도 문제가 없지 않았다는 것이 재야법조계의 지적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이참에 내심 ‘행정부에 근무하는 변호사’가 아니라 ‘법률분야에 전문자격을 갖춘 행정부 공무원’이라는 인식이 행정부에 자리 잡길 바라는 눈치다. 시장은 한정되어 있고 경쟁자는 계속 배출되고 있는 상황에서의 묘책인 셈이다.

회계사업계 또한 이번 행안부 발표에 귀가 솔깃하다. 수익이 적은 일부 회계사의 경우 경력을 앞세워 안정된 직장에 취업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한 회계법인에 다니고 있는 강모 회계사(39)는 “발표 이후 소규모 회계사무소 직원들의 동요가 있다고 들었다”며 “수익이 적은 회계사의 경우 필기시험을 보지 않고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고위공무원으로 경력 전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일 것”이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오성호 상명대 행정학과 교수는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큰데 정부가 설마 로스쿨 출신자만을 위해 그렇게 할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면서도 “그러나 로스쿨에 대한 유예기간과 비교하면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한 소지는 충분하다”고 말했다. 오 교수는 또 “준비가 부족하면 그런 의혹이 발생할 소지가 당연히 있다”며 “대학에서 전문지식을 쌓고 사회에서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들이 각 분야에 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특정 자격 ‘편식 현상’ 없어야
전문가들은 민간 전문가를 뽑는다면서 변호사·회계사·의사 등 특정 자격 소지자만 선호하는‘편식 현상’을 경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또 시행 과정에서 민간 전문가들이 공직을 단지 민간분야로 돌아갈 때 활용할 ‘경력 관리용’쯤으로 여기는 풍토는 없는지 살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한 행안부의 대답은 “수험생들의 오해와 달리 로스쿨과의 관련성 및 특채자에 대한 차별적 우대는 전혀 없다”는 것. 행안부 인력개발기획과 관계자는 “단순히 학위만 가지고 있다고 해서 전문직에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험과 경력, 성과를 가진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전형 과정을 만들 것”이라며 “정부 부처엔 변호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한편 행안부는 5급 전문가 채용에 로스쿨 출신 등 특정 직종이 무더기로 선발되는 사례를 막고자 ‘직종별 상한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시험 제도 개선안이 발표된 후 로스쿨이나 회계사 등 특정 직종 종사자들이 5급 전문가 시험을 독식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돼 직종별로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 행안부는 이를 위해 각 부처의 직종별 인사 수요를 파악해 전체 모집인원 중 특정 직종의 상한을 설정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문답으로 본 5급 전문가 공채

필기시험이 없는 ‘5급 전문가 채용시험’의 응시 자격은?
“각종 자격증이나 학위를 취득한 사람이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연구ㆍ저술 실적, 특허 출원 실적 등 다양한 배경과 경험 가진 사람을 우대한다.”

민간 전문가 채용으로 선발된 공무원의 지위는?
“채용 방식만 다를 뿐 정년 보장 등 다른 일반직 공무원과 똑같은 지위를 누린다. 이들은 계약직이나 별정직 같은 특수경력직 공무원이 아니다.”

민간 전문가 채용은 수시 모집인가?
“수시 모집을 하면 정보를 얻지 못한 지망생이 기회를 놓칠 수 있어 일괄 모집할 계획이다.”

현재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수험생은 타격을 받지 않나?
“행정고시라는 이름은 없어지지만 일반 공채시험은 기존의 행정고시 필기시험과 내용이 다르지 않다. 또 민간 전문가 채용도 4~5년 유예기간을 설정해 정원의 절반을 선발하는 시기가 일러도 2015년 이후로 정해졌기 때문에 수험생이 충분히 대비할 수 있다. 일반직(300명)과 특수직을 포함한 신규 공무원 수요가 400명 선에서 계속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일반 공채 인원은 내년에 30명, 2015년 이후에는 100명 가량 줄어든다.”

일반 공채 필기시험 과목에 변화는 없나?
“2012년부터 한국사가 5급 공채 과목에 추가되는 것 외에는 아직 확정된 내용이 없다. 2~3년간 시험 진행 상황을 봐 가면서 수험생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는 과목은 폐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수험생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시험과목이나 선발 단위를 바꾸더라도 최소 2년 정도 유예기간을 둘 것이다.”

민간 전문가 채용으로 들어온 공무원의 경우 순환보직이 어려워지는 것은 아닌가?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의료 등 이동이 매우 제한된 보직이 아니라면 현행 행정고시로 합격한 공무원과 인사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특정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것이기에 부처 인력 수요나 본인 희망에 따라 해당 부서에 좀 더 오래 있을 수도 있다.”

9급 공무원 선발 방식에는 변화가 없나?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이 없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