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이제는 고시와 헤어져야 할 시대

지난 60여년 동안 한국 관료사회의 근간을 이뤄 왔던 고시가 역사의 뒤안길로 서서히 접어들고 있다. 행정안전부가 행정고시 선발 비율을 2015년까지 50%로 줄이는 방안을 내놓은 것. 당장 내년부터 5급 신규 공무원의 30%를 민간 전문가로 선발하고, ‘행정고시’라는 말도 ‘5급 공채’로 대체된다. 2013년 폐지되는 외무고시와 2017년 로스쿨법으로 완전 대체되는 사법고시 등과 함께 한국사회에서 ‘기회’를 상징했던 고시가 그 효력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제도의 변화는 계층의 이해관계를 첨예하게 드러낸다. 획일화된 인재 선출이 아닌 관료조직의 혁신이라는 기대의 저편엔 유학, 자격증, 학벌 등 이른바 ‘스펙’으로 공직에 진출하는 현대판 음서제도의 부활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미 고시와의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다.

내년부터 ‘행정고시’라는 이름이 사라지면서 고시 시대가 마감을 고하고 있다. 공무원 시험을 대비하는 각종 고시학원과 고시원이 밀집해 있는 서울 신림동 거리. |김세구 기자

의외로 차분한 분위기였다.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우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수험생들 안에서도 이번 채용제도 변화에 관해 의견을 나누는 모습은 많지 않았다. 지난 8월 12일 행정안전부가 내년부터 행정고시를 5급 공채시험으로 바꾸고 그 인원 또한 줄인다며 60년 만에 고위공무원 채용제도를 손질하고 나섰지만, 고시학원과 고시준비생들이 몰려 있는 서울 관악구 대학동(옛 신림9동) 고시촌의 모습은 여느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합격의 법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에듀패스 교육사업부문 전영일 행정고시·외무고시 팀장은 “채용제도 변화에 신림동이 크게 동요할 것이라고 예상한 언론의 문의가 많다”며 “발표 첫날 일부 언론이 마치 행시가 완전히 없어지는 것처럼 제목을 뽑아 한바탕 혼란이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이 알려지면서 곧 차분해졌다”고 말했다.

외시·사시 폐지 이어 행시도 축소
의외의 차분함에는 예견이 존재한다. 신림동과 노량진 등 고시학원 밀집지역에서는 “행정고시 제도의 변화는 그 시기가 다소 당겨지긴 했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이라는 반응이다. 사법고시와 외무고시가 다 바뀌는데 행정고시만 그대로 갈리는 없다는 것.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줄 알았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발표에도 충격의 파장이 크지는 않다는 설명이다.

행안부가 발표한 ‘공무원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에 따르면 우선 2015년부터 5급 신규 공무원의 절반을 기존의 필기시험으로, 나머지 절반은 외부 전문가 특채로 선발한다. 행안부는 외부 전문가를 필기시험 없이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5급 공무원으로 선발하는 ‘5급 전문가 채용시험’을 도입해 내년 선발 정원의 30%를 뽑고 비율을 단계적으로 확대해 2015년부터는 50%를 채용할 계획이다. 각종 자격증이나 학위를 취득하거나 전문 분야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고 자원봉사 활동이나 연구·저술, 특허 출원 실적 등이 있으면 우대 받는다.

현재의 대규모 공채시험은 1949년 행정, 기술, 사법과를 포함한 고등고시가 시작된 후 1963년 행정고시와 사법고시 등으로 나뉘면서 굳어졌다. 그러나 이번 변화로 전문성을 지닌 외부 전문가에게 문호를 열어주는 개방형 체제로 일대 혁신이 시작됐다는 평가다. 올해 5급 신규 공무원 정원은 400명. 이 중 일반 공채가 300명, 특채가 의사와 변호사 등 특수직 30명을 포함해 100명이다. 즉 전문가 특채 비율 30%를 적용하면 일반 공채 인원은 내년에 30명가량 줄어들고 2015년에는 지금보다 100명이 줄어든 200명이 된다. ‘고시 몇 기’ 등 기수를 중심으로 서열화돼 경직된 고위공직 문화를 바꾸기 위해 정부는 행정고시라는 명칭도 없애기로 했다.

이번 발표에 앞서 지난 5월 외교통상부는 2013년부터 외무고시를 폐지하고 1년제 특수대학원인 ‘외교아카데미’를 통해 매년 50명의 외교관을 신규 충원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사법고시 또한 2017년 폐지된다. 2007년 통과된 로스쿨(법학전문대학원)법에 따라 내년부터 로스쿨 졸업자들이 생겨나고 2017년부터는 아예 로스쿨 졸업자만이 변호사나 재판연구관, 검사보 등을 거쳐 법관이나 검사로 임용될 수 있게 된다.

이종수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그동안 고시제도는 선발 기준의 타당성은 바닥인데, 한국 사회의 들끓는 객관성에 대한 요구에 발목 잡혀서 그대로 끌려온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무원 채용 방식으로 고시가 가장 공정한 방식이라는 점에는 다들 동의하지만, 그러나 고시가 고위공무원을 뽑는 가장 좋은 방식이라고 보는 이는 드물다는 설명이다.

‘철밥통’ ‘고시 낭인’ 사라질까?
행시에 대한 손질은 이 같은 고민에서 시작됐다. 행안부가 이번 조치를 ‘공무원 채용 방식에 있어 60여년 만의 대수술’이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고시 출신이 고위직을 독식하는 구조 때문에 날로 급변하는 사회에 공직자가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는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그 출발점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1500여명의 고위공무원단(1~3급) 중 71%가 행시 출신. 5급에 새로 임용되는 공무원 중엔 사실 고시출신보다 하위직급에서 승진하는 비율이 훨씬 더 높지만, 그 이상의 직급으로 올라갈수록 점점 고시 출신 비율이 높아진다. 정책 결정권이 행시 출신들에게 쥐어져 있는 것이다.

맹형규 행정안전부 장관이 8월 12일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서 고위 공무원의 등용문인 행정고시제도 개편 방안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또한 행시라는 이름은 7·9급 공무원 채용시험과 달리 5급 선발시험에만 별도로 사용돼 공직사회 내 특정 집단을 형성하게 하는 권위적 의미로 인식돼 왔다. 같은 고시출신 간에도 파벌이 조성되고, 같은 해에 고시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고시 몇 회 출신’이라는 보이지 않는 막강 인맥이 형성되기도 한다. 최근 청와대 대통령실장에 발탁된 임태희 전 장관과 임채민 총리실장, 이현동 국세청장·정선태 법제처장 등이 모두 행시 24기 동기다. 차관 인사에서도 24회 출신인 육동한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을 비롯해 최원영 보건복지부 차관, 김희국 국토해양부 제2차관이 승진하면서 주목 받았다.

행정고시가 공직사회에 우수한 인재를 영입하는 통로로서 국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똑같은 공무원 선발 방식이 60여년 지속되면서 그 폐해도 적지 않았다는 지적이다. 의료와 복지, 레저, 외교통상 등 갈수록 전문성이 요구되는 지식기반사회에서 고시에 한 번 합격하면 능력이나 성과와 무관하게 평생 고위직을 보장받는 ‘철밥통’ 체제가 문제였던 것. 게다가 같은 책으로 공부하고, 같은 분위기에서 일한 고시 출신들이 공직사회를 장악함으로써 창의성이 떨어지고 시대가 요구하는 행정서비스를 원활히 제공하지 못했다는 비판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맹형규 행안부 장관이 “상위 직급이 고시 출신 위주로 구성돼 있어 경쟁이 부족하고,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선택”이라고 강조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공직 문호를 개방해 고시형 인재 중심의 공직사회를 바꿔보려는 흐름은 10여년 전부터 존재했다. 직위공모제, 개방임용제, 외국인채용제 등이 시도된 것. 그러나 중앙행정기관 과장급 직위 3430개(본부 1483개, 소속 기관 1947개) 중 본부의 경우 고작 31개(2.1%)만 개방형으로 운영되는 등 성과는 초라했다.

이런 문제점을 단시간 내에 해결하는 방안으로 정부가 내놓은 것이 바로 5급 전문가 채용시험이다. 이 경우 외부에서 온 전문가들은 행정고시 출신들과 자연스럽게 경쟁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공직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예상했던 때문인지 행정고시제도 개편에 대한 반응은 차분한 편이다. 서울 신림동 베리타스학원에서 고시생들이 강의를 듣고 있는 모습. |연합뉴스

공무원 채용 방식이 바뀌면 대학교 1~2학년 때부터 고시 준비에 매달리는 현재의 파행적인 대학교육을 정상화시키고, ‘고시 낭인’을 줄이는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각종 고시와 7·9급 공채를 포함해 공무원시험 응시자는 한 해 20만명이지만 최종 선발 인원은 2500여명에 불과한 것이 현실. 사시는 매년 2만∼3만명이 응시해 1000명만이 합격하고, 지난해 행시 응시자는 1만4695명으로 경쟁률은 45대 1을 보였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공과 상관없는 고시에 장기간 매달려 대학교육이 황폐화됐고, 국가적으로 인력 낭비가 초래됐던 것. 이 때문에 고시의 존폐 논의는 끊이지 않았다.

오성호 상명대 행정학과 교수는 “그동안 고시제도는 지식 위주의 채용으로, 다양한 자질이 아닌 무엇을 얼마나 아느냐를 따졌다”며 “사회 전반적인 분야가 넓어지면서 지식 위주로만은 한계가 나타난 것으로, 이번 조치의 방향성에 대해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현대판 음서제’ 반발도 만만치 않아
그러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취지는 맞지만 시기와 속도를 보면 부작용이 불 보듯 뻔하다”는 지적이다. 우선 이런 주요 정책이 충분한 공론화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덜컥 공식 발표되고, 유예기간도 없이 당장 내년부터 전격 시행하는 데 따른 혼란과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다.

특히 고시를 준비 중이거나 곧 준비하려던 이들의 불만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보통 공무원 채용계획은 1월 1일 행안부 사이트에 고시되는데, 이번 발표안은 그때 내용에 없던 얘기라 혼란스러운 면이 더욱 큰 것. 게다가 내년 2월에 피셋(PSAT·공직적합성평가) 시험을 앞두고 있어 준비생들의 혼란이 가중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정 협의 한 번 해보지 못한 여당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정두언 최고위원은 8월 19일 CBS 라디오 ‘이종훈의 뉴스쇼’에 출연해 “행시 개편안은 취지는 좋으나 결과적으로 특수층 자녀를 위한 제도로 악용될 수 있다”며 “당정회의, 국회 논의 과정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 최고의원은 또 “행시 개편안은 서민 자제에게 신분 사다리를 치워버린 것으로 현대판 음서제의 부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학벌, 집안 배경, 연줄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어 소수 특권층을 위한 특채로 비쳐질 수 있다”며 혹평했다. 고흥길 정책위의장 역시 “서민이 국가 고위공직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사실상 제한을 받는 문제인데, 사회적 논의가 더 필요하다”고 지적했고, 이경재 의원은 “전문가 도입은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늘 정권이 바뀐 후 자기 정권의 세력을 공무원에 집어넣는 제도로 악용될 소지가 많아 이 부분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이 모두가 당과 사전 조율이 없었던 행안부를 겨냥한 것이다.

시기와 속도에 대해선 학계에서도 불만이다. 이종수 교수는 “정책을 만들 때 정책 공동체라는 것이 중요한데, 현 정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며 “여야와 고시준비생, 대학, 학원가, 공무원들의 의견을 수용해서 입안해야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답안이 나오는 거 아니냐”고 지적했다.

민간전문가 채용엔 산 넘어 산
점점 더 전문화되고 있는 공직의 업무서비스에서나, 다양한 시각과 경험을 토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의 제고 측면에서 행안부의 채용제도 선진화 방안 도입은 환영할 일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를 제도적으로 정착시키는 일이다.

학원가에서는 행정고시 개편 시기와 속도에 대해 볼멘 소리다. 수험생들이 학원 복도에서 자습을 하고 있다. |경향신문

무엇보다 전문가 채용시 서류전형과 면접만으로 공직자 적성과 자질을 어떻게 가려낼지가 성패의 관건이다. 고시제도가 60여년간 지속됐던 것은 누구나 시험 볼 수 있는 평등성과 시험 결과에 대한 공정성 때문이었듯이 새 제도 정착의 관건도 채용의 공정성에 있다는 것으로, 분야별로 역량 있는 면접위원과 전형 시스템의 확보가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오성호 교수는 “공평성 확보는 운영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오 교수는 “면접 자체도 여러 사람이 심사해 도출하면 객관적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며 “그러나 심사위원들이 담합을 해 부처에서 요구하는 사람을 뽑는다든지 하면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간의 우수 인재들이 상대적으로 처우가 낮은 공직에 얼마나 지원할지도 미지수이며, 자칫 공직이 개인 경력관리를 위한 ‘중간 정류장’으로 악용될 소지도 있다. 이종수 교수는 “마흔 줄 삼성전자 부장이 그 임금을 받고 공무원을 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교수는 “경쟁률은 상당하겠지만 인력 풀이 그리 되지 못할 것”이라며 “결국 50%의 순혈주의를 깰 수 없는 수준의 사람들이 들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현재 5급에 맞춰져 있는 민간 전문직 채용을 4~9급으로 확대 개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교수는 “전문가들도 천차만별의 능력 차이가 있는데, 유능한 각 분야 전문가들이 5급으로 획일화된 채용 기회에 몰려올 것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판”이라며 “4급에서 9급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급에서 20% 안팎의 개방형 직위를 운영하고, 실제로 민간인들이 채용될 수 있도록 제도적 뒷받침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오 교수의 지적도 같은 맥락이다. “법률뿐만 아니라 통상, 협상, 재정관리, 지역관리 등 다양한 전문가들을 다양한 직급에서 선발해야 한다”는 오 교수는 “획일화된 대우가 아닌, 그 직급과 역할에 맞는 대우를 해준다면 다양한 전문가그룹을 공직에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행안부 인력개발기획과 관계자는 “기존 특채는 부처의 수요에 따라 그때그때 하다보니 외부 인력이 정보를 얻기 힘들었고 그만큼 불투명했지만 전문가 공채는 공고를 통해 훨씬 투명하게 진행될 것”이라며 “최근 채용의 트렌드가 시험보다는 서류와 면접으로 가고 있으며 예전과 달리 다양한 평가기법이 있기 때문에 공정성 확보에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전문가 채용 직급 확대에 대해서는 “이미 4급 과장급을 개방직형으로 늘리기로 했고, 7급 지역인재 추천채용제 방안이 있다”며 “보수뿐만 아니라 신분상의 보장이나 연금 등 처우 측면에서 보면 민간에 비해 매력적인 부분도 있어 능력 있는 전문가들이 몰릴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8월 12일 발표 이후 수험생은 물론이고 학계, 정치권까지 불만을 나타내자 행안부는 뒤늦게 공청회 등을 통해 각계 의견을 수렴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시기와 속도 탓에 일부에선 ‘내년 1월 1일 제대로 공시가 나겠느냐’는 의구심도 나타내고 있다. 행안부의 ‘60년 만의 대수술’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보인다.

<조득진 기자 chodj21@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