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머리카락·눈 색깔 선택만 하세요”

LA불임연구소 ‘주문형 아기’ 광고… 여론 비판에 프로그램 중단

PDG(착상 전 유전자 진단) 기술은 인공 수정 배아에 대해 유전자 검사를 수행하는 기술이다. 사진은 인공 수정을 위한 정자를 채취하는 모습. | CGS

태어날 아기를 식당에서 메뉴를 고르듯 주문할 수 있다고 상상해보자. “외모는 장동건처럼, 키는 180㎝로 해주세요. 눈은 푸른색이 좋을 것 같고, 머리는 갈색에 약간 곱슬머리로 하죠. 지능지수는 140 정도가 좋겠네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처구니없는 상상이라고 비웃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이런 극단적인 상상을 현실로 만들려는 시도가 미국에서 있었다. 지난해 1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본원을 두고 있는 ‘불임연구소(The Fertility Institutes)’가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광고를 게재했다.

“눈 색깔, 머리 색깔, 암에 걸릴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이 연구소의 제프리 스타인버그 소장은 미국에서는 잘 알려진 산부인과 전문의로, 30여 년 전인 1978년에는 당시 영국에서 태어난 세계 최초의 시험관 아기 루이즈 브라운의 출생을 성공시킨 연구팀에서 일했다. 이후 그는 불임 전문의로 명성을 쌓았고, 그의 클리닉이 성공률 99.9%를 자랑하는 태아 성별 선택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2005년에는 CNN 뉴스에서 화제의 인물로 소개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태아의 성별을 ‘감별’하는 수준이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클리닉이 이미 10여 개 이상 성업 중이다. 그러나 스타인버그 소장은 광고를 통해 이제 태아의 성별뿐 아니라 태아의 외모까지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한 것이다.

“성별뿐 아니라 외모까지 결정” 호언
스타인버그 소장의 주장은 영미 언론과 누리꾼들의 호기심, 그리고 생명윤리학자들의 반발을 동시에 불러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월 12일자 지면에 ‘아기 하나 부탁합니다. 주근깨 있는 금발로’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미국 생명공학산업의 윤리성을 감시하는 비영리기구 ‘유전학과 사회센터(Center for Genetics and Society)’는 2월 12일 성명을 통해 “새로운 종류의 차별을 불러올지도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다”고 비판했다. MSNBC는 홈페이지에 이 주제에 대한 게시판을 개설했다. ‘미스터리 맨’이라는 필명의 한 누리꾼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몇 년 안에 아이들의 외모가 다 똑같아질 것”이라고 우려했고, 또 다른 누리꾼은 “구역질나는 생각”이라며 비난했다. MSNBC가 누리꾼을 상대로 한 인터넷 설문조사에서도 부정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5만1442명 가운데 73%는 ‘자연의 섭리를 어지럽혀서는 안 된다’고 응답했고, 20%는 ‘너무 멀리 나간 것 같다’고 말했다. ‘멋진 일’이라고 대답한 사람은 7.3%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타인버그 소장은 당당했다. 그는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와 인터뷰에서 “(외모 선택은) 미용의학이다. 다른 사람들은 비판을 두려워하겠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밝혔다. 영국 일간 <텔레그래프>는 2월 28일자 기사에서 스타인버그 소장이 “우려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과학이 진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피할 수는 없다. 나는 비난을 감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는 몇몇 영미 언론과 인터뷰에서 광고를 올린 후 이 새로운 서비스에 관심을 보인 고객이 대여섯 명 있었다고 밝혔다.

LA 불임클리닉의 제프리 스타인버그 소장. | The Fertility Institute

스타인버그 소장의 뚝심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지난 3월 2일 LA 불임연구소는 ‘눈과 머리 색깔 프로그램을 중단한다’는 제목의 글에서 “우리는 여론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 기술이 가져다줄) 이익에 비해 사회에 끼칠 부정적인 영향이 훨씬 더 크다고 판단했다”면서 앞으로는 유전병을 가진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스타인버그는 3월 3일자 뉴욕 데일리뉴스와 인터뷰에서 발표가 나간 후 엄청난 전화 공세에 시달렸다고 고백했다.

스타인버그 소장의 주장은 어느 정도나 사실일까.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타인버그의 클리닉이) 자신들이 약속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면서도 “연방정부나 주정부의 규제가 없는 미국에서 PGD 기술은 아기의 외모를 미리 결정하는 것이 더 이상 공상과학 소설 속의 이야기가 아닐 정도의 수준까지 왔다”고 봤다.

그가 사용하겠다고 밝힌 기술의 핵심은 ‘착상 전 유전자 진단(PGD)’이다. PGD 자체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다. PGD는 시험관에서 수정된 배아를 검사해 유전병을 유발하는 유전적 결함이 있는지 진단한 다음 건강한 배아만 골라 자궁에 착상하는 기술로, 이미 1990년대부터 사용해왔다. PGD 기술은 낭포성 섬유증 등을 비롯한 200여 종의 유전병을 진단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한 단계 발전한 PGH(Pre Implantation Genetic Haplotyping) 기술을 사용하면 최대 6000종의 유전병을 검사할 수 있다.

PGD 기술은 애초에는 유전병 가족력을 가진 부모들이 건강한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의학적 목적으로 개발됐지만 스타인버그의 불임연구소 같은 미국의 일부 클리닉에서는 특정 성별의 아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상업적 용도로 사용해왔다. 영국, 아일랜드, 캐나다, 호주, 일본 등지에서는 이런 방식의 성별 선택이 불법이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규제가 허약해 외국 부모들이 미국 클리닉을 찾는 사례가 빈번하다. 일간 <더 타임스>의 3월 8일자 보도에 따르면, 스타인버그 소장은 최근에만 적어도 6쌍의 아일랜드 부부에게 성별 선택 서비스를 제공했다.

최근 6쌍의 부부에게 성별 선택 서비스
아기의 머리카락은 물론 눈 색깔을 결정할 수 있다는 스타인버그의 주장은 이보다 더 진보한 기술을 확보하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지금까지 영미권 언론에서 공개한 내용을 종합하면, 스타인버그의 주장은 최근 발표된 2건의 유전학 관련 논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07년 아이슬란드의 디코드 지네틱스의 과학자들은 과학전문지 <네이처 지네틱스>에 피부와 눈, 머리 색깔에 영향을 미치는 단일염기다형성(SNP)을 발견했다는 논문을 실었다. 다른 하나는 세이디 그로브센터 소장인 의학유전학자 윌리엄 컨스의 논문이다. 컨스는 지난해 미국 인간유전학회 학술대회에서, 배아의 세포에서 얻은 DNA를 증폭하여 배아의 복잡한 질병과 일부 신체적 특징을 규명할 수 있는 기술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염색체 단위에서 나타나는 개개인의 유전적 변이를 단일염기다형성(SNP)이라고 부른다. 사진은 인간게놈 프로젝트 웹사이트가 제공하는 SNP 가상 모형도. | U.S. Department of Energy Genome Programs

<월스트리트저널>은 스타인버그 소장이 이 발표에 주목하고 컨스 박사와 공동작업을 벌이려고 했다고 보도했다. 컨스는 이러한 의혹을 부인했다. 그는 “나는 돈에 영혼을 팔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내 목적은 유전병 없는 아기를 가지려는 부모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타인버그 주장의 진실성 여부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PGD 기술의 선구자인 마크 휴즈는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PGD 기술의 선구자인 뉴욕대 의대 학장 제이미 그리포 교수는 “나는 현실이라기보다는 과장이라고 본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눈이나 머리 색깔을 넘어서는 수준의 ‘주문형 아기’와 관련해서는 “눈 색깔이나 머리 색깔을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지능이나 운동 능력을 결정하는 유전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도 없고 가능할 것이라고도 믿지 않는다”고 일축했다.

주문형 아기(designer baby)를 둘러싼 갑론을박은 이미 오래된 논쟁이다. 미국에서는 성별 선택을 통한 첫 아기가 탄생한 1999년 시사주간 <타임>이 ‘주문형 아기’를 이미 커버스토리로 다룬 적이 있다. 주문형 아기 논란은 2000년 미국에서 한 부부가 판코니 빈혈을 앓는 딸을 치료하기 위해 ‘아담’이라는 이름의 아이를 낳으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영국의 경우 2002년 인간수정태생학위원회(HFEA)가 지중해 빈혈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는 아들의 혈액과 일치하는 배아를 선택할 수 있게 해달라는 라지 하시미 부부의 요청을 허용한 이후 비슷한 사례가 나올 때마다 주문형 아기 논란이 반복됐다. 특히, 미국과 달리 상대적으로 생명공학 기술 개발에 대한 규제가 엄격한 영국에서 활발한 논쟁이 벌어졌다.

기술적으로도 넘어야 할 장벽 많아
영국에서 PGD 기술을 통해 특정 배아만 선택적으로 출산하는 방식으로 태어난 첫 아기는 2003년 태어난 제이미 휘태커다. 이때 언론은 이 아이에게 ‘구세주 아기(saviour sibling)’라는 이름을 붙였다. 제이미는 희귀성 빈혈 질환을 앓고 있던 형 찰리에게 줄기세포를 이식하기 위해 탄생한 아이였기 때문이다. 이때 제이미는 영국의 법적 규제 때문에 미국에서 유전자 검사를 받았다.

이후 영국은 2006년 낭포성 섬유증 유전자를 보유한 부모가 배아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통해 건강한 아기를 출산할 수 있도록 허용한 이래 관련 법제를 대대적으로 정비해, 2008년 5월 하원에서 의료 목적의 주문형 아기 출산을 전면적으로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1990년 제정된 생명윤리 관련 법안이 변화한 환경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수용한 결과였다. 그 사이 영국의 생명윤리단체들은 2000년대 초반부터 ‘의료 목적이라고 하더라도 특정 유전자를 가진 아기를 선택하는 것을 허용하면 결국 지능이나 체력, 외모 등을 미리 결정하는 ‘주문형 아기 시대’가 올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했다.

과연 주문형 아기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일까. 이 질문에 단정적으로 대답하기는 어렵다. 윤리적인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기술적으로만 보더라도 넘어야 할 장벽이 많다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특정 유전형질의 발현에 관여하는 유전자의 종류나 기능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고 다른 변수들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장 컨스 박사의 논문만 하더라도 학계에서 공식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스타인버그 소장과 컨스 박사의 관계에서 볼 수 있듯, 순수한 학술적 연구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