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주문형 아기’ 윤리적 비판에 막혔다

‘배아복제 어디까지 허용하느냐’ 논란… 영국·일본 등 대부분 제동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세계를 그린 영화 <가타카> 한 장면. |경향신문

1997년 개봉한 영화 <가타카>는 출생 전 미리 결정된 유전자 특성에 따라 한 인간의 일생이 결정된다는 유전자 결정론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영화다. 영화 속 세상은 유전적으로 우성인 자들과 열성인 자들의 삶이 극명하게 양분되는 계급사회다. 아이들은 외모는 물론이고 지능과 운동 능력, 심지어는 수명까지도 미리 결정된 채 태어난다. 우성인 자들은 평생 높은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누리지만, 열성인 자들은 사회의 밑바닥을 긴다. 영화는 흥행에서는 큰 재미를 보지 못했지만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을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인용돼 왔다. 생명공학 기술의 윤리적 일탈 위험을 걱정하는 이들에게 영화 속 이야기는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곧 다가올 미래의 모습을 미리 찍어놓은 청사진이기 때문이다.

미국선 태아 성별 선택 가능
현실에서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성 논란이 가장 광범위하게 벌어진 사회 중 하나는 영국이다. 영국은 1990년 생명윤리법을 제정한 후 2008년 5월 새로운 개정안을 입법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사회적 논쟁 과정을 거쳤다. 2008년 3월 ‘인간 생식 및 배아 법안’의 의회 상정을 앞두고 벌어진 논란은 그 정점이다. 이 논란은 갈수록 생명공학 기술의 진보가 품고 있는 윤리적 쟁점들을 압축적으로 보여주었다.

논쟁은 먼저 배아 연구와 치료 목적 복제를 어디까지 허용하느냐를 두고 벌어졌다. 영국은 1990년대에는 수정 후 14일 이내 배아를 대상으로 한 실험만 가능했다. 2000년 이후부터는 유전적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한 배아 연구를 승인했다. 그러나 건강한 세포를 그렇지 않은 세포로 바꾸는 것까지 허용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과학자와 의사 들은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며 조속한 허용을 요구했고, 교회는 설령 치료 목적이라 하더라도 배아 줄기 세포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생명의 상업화라며 반대했다.

가장 논란이 컸던 부분은 인간의 체세포 핵을 동물 난자에 집어넣어 만드는 교잡 배아 허용 여부였다. 법안은 14일 이내 배아만 허용하고 이렇게 만들어진 배아를 여성의 자궁에 투입하는 것을 불법으로 규정했다. 교회는 이것이야말로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을 합법적으로 허용하는 것이라며 거세게 비판했다.

미토콘드리아 이식을 둘러싼 논쟁은 친권 문제를 제기했다. 세포 내 화학 에너지 생성을 담당하는 미토콘드리아에 이상이 생기면 아이의 건강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미토콘드리아 이식이란 엄마의 난자에서 핵을 제거한 다음 그것을 기증자의 난자에 이식하여 수정란을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의 유전자는 엄마의 유전자와 99.9% 일치한다. 그러나 아무리 일치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기증자 또한 친권을 주장할 수 있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됐다.

인공 배우자(생식체) 문제는 더욱 논쟁적이다. 인공 배우자란 피부 조직에서 얻은 줄기세포에서 정자와 난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건강상 이유로 두 개의 난소를 모두 제거한 여성이라도 자신의 줄기세포를 사용하여 아이를 가질 수 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생식 과정에서 남성의 역할이 불필요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기술적으로는 불가능한 주장이라고 입을 모았지만 가능성을 시사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파문을 불러왔다.

생명공학 발전을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는 이들은 안전성 문제와 유전자 계급 사회의 출현을 우려한다. 제러미 리프킨 같은 이는 배아의 유전자를 조작하는 수준으로까지 기술이 발전한다면 자연 질서에 심각한 균열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리프킨은 <바이오테크 시대>에서 “열성 형질과 돌연변이가 진화 과정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해왔다면서 소위 ‘나쁜 유전자’를 인위적으로 제거할 경우 유전자 풀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교회에선 치료 목적도 반대
머리카락·눈 색깔에 관여하는 단일염기다형성(SNP)을 발견했다고 주장한 디코드 지네틱스의 책임연구원 카리 스테판슨도 <월스트리저널>과 인터뷰에서 “맞춤형 아이를 만드는 데 이 기술을 사용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반대한다”면서 “그렇게 되면 결국 인간의 다양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이와 같은 문제 제기가 지나친 기우라고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MIT 인지과학연구소장 스티븐 핑커는 2003년 가디언에 기고한 글에서 적어도 가까운 미래에는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그는 “미래에 대한 예측 가운데 많은 부분이 잘못된 것으로 판명됐다”면서 “1960년대에 화상전화를 발명한 사람 중 오늘날 청소년들 사이에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가 유행할 것이라고 누가 예측할 수 있었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우월한 지적 능력을 규정하는 유전자의 비밀을 밝혀내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봤다.

그럼에도 생명공학 기술의 발전이 불러올 어두운 미래에 대한 우려는 쉽게 멈추지 않을 전망이다. 미국의 온라인 저널 ‘슬레이트’는 2월 17일자 기사에서 처음 의료 목적으로 시작한 PGD 기술이 점차 의료 목적에서 벗어나면서 비의료적 영역의 시장이 형성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슬레이트는 유전자 치료를 문의한 환자들을 상대로 뉴욕대가 조사한 여론 조사 결과를 예로 들었다. 응답자 가운데 키나 외모, 지능을 위해 PGD 기술을 사용할 의사가 있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중은 10% 수준에 불과하지만 절대 수치만 놓고 보면 “새로운 사업 기회를 찾는 사업가들을 유인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기사는 또 세계화가 한 국가의 윤리적·법적 장벽을 넘어서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캐나다, 영국, 일본, 중국, 호주는 비의료적 목적의 태아 성별 선택을 법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불임 클리닉은 이런 국가의 고객들에게 자국의 법망을 피해 미국에 올 수 있는 여행 패키지를 제공하고 있다.

처음에는 거부감을 일으켰던 시험관 아기나 성별 선택이 점차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런 우려를 더욱 키우는 것이다. 슬레이트는 “우리가 알기 전에, 우리는 이미 그것에 익숙해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