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문국현, 단기필마로 정치판 뛰어들다

‘찻잔 속 태풍’ 그칠까? 용이 되어 승천할까?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 <김세구 기자>

범여권의 마지막 남은 카드인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이 마침내 대권을 향한 출사표를 던진다. 문국현 사장은 8월 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사실상 대선 출마를 위한 ‘정치참여 선언’을 한다. 문 사장은 30여 년간 다녀온 회사인 유한킴벌리와 세계적 다국적 기업인 킴벌리클라크 북아시아 사장직을 그만두고, 대통령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정치판에 뛰어든다.

과연 새내기 정치인 문국현의 실험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지 아니면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인다. 과거 우리 정치사에서 기업인, 학자 등 비정치인들이 본업을 그만두고 대선에 뛰어들었지만 기존 정치권의 높은 벽만 실감한 채 정치인으로서 성공하기는커녕, 선거가 끝나자마자 그 대가를 혹독히 치르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단적인 예다. 정 회장은 1992년 기업경영을 넘어, 국가를 경영하겠다는 야심으로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를 비난하며 대선에 임했으나, 집권은커녕 캐스팅보트 역할도 하지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김영삼 후보는 대통령이 되자 정주영 회장과 현대그룹에 대한 비자금 조사를 실시하는 등 대대적인 보복을 시작했고, 이에 따라 정 회장은 김영삼 대통령을 찾아가 사과까지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2년 대선 때도 현대중공업의 정몽준 의원이 월드컵 바람을 타고 승승장구했으나, 정치판에서 단련된 노무현 후보를 넘지 못했다. 최근에도 고건 전 총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이 범여권에서 비교적 높은 지지도를 보였지만, 정치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낙마했다.

2007년 대선을 불과 4개월 앞두고 ‘정치 초년병’인 문국현 사장이 과연 ▲ 단 시일 내에 국민적 인지도와 지지도를 끌어올 수 있을까 ▲ 정치권 특히 범여권의 수많은 대선 후보 중 의미 있는 변수가 될 수 있을까 ▲ 제도 정치권의 높은 벽을 넘지 못하고 사라질까. 전문가들은 대선 후보로서 문국현 사장의 성패는 앞으로 한 달 이내에 결정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문 사장의 앞날은 ‘블루칩’이 될 수도, ‘깡통주’가 될 수도 있는 두 가지 극단적인 경우만 상존하고 있다.

과거세력의 스파링 파트너는 않겠다

문국현 사장이 잘 나가는 유한킴벌리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박차고 갑자기 대선에 뛰어든 까닭은 무엇일까. 국민들이 보기에 이런 의문이 들지 모르지만 문 사장은 기업인이면서도 다양한 사회활동을 해온 독특한 이력이 있다. 문 사장을 두고 어떤 이들은 기업인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시민운동가라고도 하고, 어떤 이들은 환경운동가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민간 외교관이라고도 한다. 심지어 일부 사람들은 ‘반(半) 정치인’이라고 한다. 비록 그는 정치인·공직 경력이 전무하지만 시민운동을 24년 동안 해왔고 현재 수십 개의 시민단체장과 학회장도 맡고 있다. 또 참여정부에서 사람입국신경쟁력특별위원장을 1년여 동안 했고, 5년 이상 정부 정책평가위원을 역임했으며, 고건 전 시장 시절 서울시장 특별고문으로 2년 이상 활약했다.

문 사장은 다방면에서 활동한 경험과 지식을 국가 경영에 활용하기 위해 과감히 대선에 도전장을 냈다. 정년까지 보장된 킴벌리클라크의 북아시아 사장직과 스톡옵션 64억 원을 포기하고 지금까지 걸어온 것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한국·중국·대만·홍콩·일본·몽골·극동러시아 등 7개국에 있는 킴벌리클라크의 생산·마케팅을 관장하는 자리에 현직으로 있기 때문에 문 사장은 경영 관련 인수인계, 주주 동의 절차 등 복잡한 절차를 마무리하느라 대선 주자군에 맨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하지만 정치권의 구애에도 범여권의 결합체인 대통합민주신당(이하 민주신당)에는 입당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와 함께 9월 3일부터 3일 동안 실시하는 민주신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을 위한 컷오프(예비경선)에는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고 문국현 사장이 반(反) 한나라당과 범여권의 대통합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문국현 사장은 30여 년 동안 근무한 유한킴벌리를 떠난다. <김세구 기자>

문 사장은 참여정부의 한 축이었던 열린우리당 의원들과 민주당 일부 의원들을 과거세력으로 규정짓는다. 따라서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잃은 정치세력들이 다시 만든 민주신당을 진정으로 국민에게 지지받을 수 있는 대통합신당으로 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실제로 정치분석가들은 민주신당은 이념과 노선보다 대선을 위해 급조된 정당이라는 데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시민사회세력인 오충일 대표 등 미래창조연대가 결합했지만 창당 기본정신인 정치권과 시민사회 진영의 지분을 50 대 50으로 하기로 한 약속도 흐지부지된 상태다. 민주신당의 지도부인 최고위원 9명 중 시민사회 진영은 오충일 목사, 김상희 전 한국여성민우회 상임대표, 양길승 노색병원장 3명만 속해 있다.

문 사장 측은 “문 사장이 정치권에 들어가려고 마음먹었으면 지난해 말이나 올 연초에 들어갔다”며 “문 사장이 지금 정치권과 결합하면 정치를 해야 하는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문 사장 측은 시민사회진영과 일부 정치권이 참여하는 새로운 대안정당을 만드는 것도 고려하고 있다.

문 사장이 민주신당의 컷오프에 참여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비정치권에서 우리나라가 21세기에 새로운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혁신과 정부재창조 등 미래비전을 제시하며 미래세력의 대표 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문 사장과 참여정부 5년 동안 정부 여당에 몸담으면서 국정의 실패를 이끈 과거세력의 대표주자들과 경쟁을 붙인다는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 문 사장의 조직인 ‘창조한국’ 관계자는 “범여권은 한 동안 국민의 좌절과 분노를 해소하고 과거와 단절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며 “비정치인 출신인 문 사장이 실패한 사람들을 위해 스파링 파트너가 돼 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문 사장의 대선가도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민주신당의 컷오프에서 통과한 주자들과 대선후보 경선을 치르는 방안이다. 문 사장은 정치참여 선언 이후 전국을 순회하며, 국민 지지율을 끌어올리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현재 범여권에서 손학규 지사를 제외하고는 지지율이 5%를 넘는 후보가 없는 상태다. 만약 문 지사가 한 달 안에 3% 이상의 국민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범여권 2위 후보군에 들어서는 것이다. 이 경우 민주신당 지도부는 흥행을 위해 대선후보 경선에 문국현 사장을 끌어들이지 않을 수 없다.

민주신당 국민경선위원회 관계자는 “현재로선 컷오프를 통과한 주자들이 겨루는 민주신당 대선후보 경선에 문 사장을 위해 시드 배정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하고 “다만 정치는 항상 변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고 말해 문 사장의 경선 참여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

둘째는 문 사장이 직접 이른바 ‘문국현 신당’의 대선 후보로 선출돼 대선 직전에 민주신당 후보와 후보 단일화를 모색하는 방법이다. 2002년 노무현·정몽준 후보가 단일화했듯이 한나라당 후보가 독주하면 자연스럽게 단일화되지 않을 수 없다. 문 사장 측은 비정치결사체인 ‘창조한국’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한 상태로 신당을 만들 경우 ‘창조한국’의 일부, 민주신당에 참여하지 않은 최열 환경재단 대표 등 시민사회진영, 국회의원 등 일부 정치인이 참여할 것으로 보인다.

20세기 CEO 이명박, 21세기 CEO 문국현

문국현 사장은 범여권에서는 물론 한나라당 후보들과 비교해도 손색없는 상품성을 지녔다. 문 사장은 ▲ ‘4조2교대 제도’ 도입을 통한 일자리 창출 ▲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생명의 숲’ 캠페인 등 창의성 발휘 ▲ 대기업 경영자임에도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관을 갖고 있는 등 분명 다른 기업인들과는 다르다. 문 사장은 특히 우리 사회의 현안 문제인 양극화 해소, 비정규직·실업 문제에 대한 처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오충일 대통합민주신당 대표(왼쪽)와 정세균 열린우리당 의장이 8월 10일 국회에서 합당에 항의한 뒤 포옹하고 있다. <박민규 기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20여 년 전 개발경제 시대에 건설·토목 분야의 CEO(최고경영자)였다면, 문국현 사장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경영을 해온 21세기형 CEO라는 것이다. 그의 정책 콘텐츠를 살펴보면 첫째, 500만 개의 일자리 창출을 공약했다. 문 사장은 현재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주 40시간 근무제만 정착시키면 일자리 200만 개가 생겨나고, 여기에 디자인·교육 등 지식산업을 국산화하면 추가로 200만 개의 전문직 일자리를 창출하고, 여가문화 서비스 산업을 선진국형으로 육성하면 150만 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비정규직을 없앨 수 있다고 약속했다. 문 사장은 100%에 달하는 정규직을 채용하고 있는 ‘유한킴벌리’ 모델이 국가 전체로 일반화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실제로 포스코, 한국타이어 등 우량기업들도 유한킴벌리의 ‘4조2교대 근무제’, ‘평생학습제도’ 등을 도입해 성공했다. 문 사장은 여기에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통한 평생학습기금제 도입 등을 통해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셋째, 중소기업 중심의 경제구조 재편을 주장했다. 이를 위해 정부의 대기업 지원정책을 폐지해야 하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공정 하도급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중소기업에 대한 대출이자를 대폭 낮추고 과거 종합무역상사법을 통해 대기업을 지원했듯이, 정부가 중소기업들의 해외진출 프로그램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 사장은 통일·외교 분야에 관한 해법도 내놨다. 개성공단을 적극 활용하는 등 남북경협의 활성화를 제시했다. 또 중국과 동러시아의 무한한 자원을 이용하기 위해 이 국가들에 적극 투자해야 하며, 친미 일변도로 가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와 함께 유럽, 호주, 라틴아메리카 등도 시장 개척을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과연 문국현은 승천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문국현 사장이 이번 대선 판도에서 의미 있는 변수가 될 수 있거나 돈키호테가 될 수 있다고 극단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만약 문 사장이 정치 참여를 선언한 8월 23일부터 추석까지 한 달 동안 지지율이 3% 이상 올라간다면 해볼 만하겠지만, 지금과 같이 1% 미만에 머문다면 더 해볼 것도 없이 접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충고했다.

문국현 사장이 해볼 만하다는 근거는 우리나라 대선이 세력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인데다, 현재 범여권 후보들의 지지율이 미미한 만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헌태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소장은 “현재 상태로는 범여권 주자들은 한나라당 후보들의 경쟁상대가 되지 못한다”며 “한나라당의 성장주의 중심의 패러다임과 다른 패러다임을 지닌 후보는 문국현 사장이 유일하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조순형 의원이 출마 선언을 하고 단번에 뜬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며 “꼭 정당이나 정치세력의 기반이 있어야 후보가 뜬다고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정치평론가 고성국 박사는 “문 사장은 노무현 프레임과 정치권의 이합집산에서 자유롭다”며 “이번 선거의 이슈 중 하나가 ‘경제살리기’인 만큼 실적이 있는 문국현 사장이 범여권에서 가장 경쟁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문국현 사장이 흥행에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이미 늦었다고 지적한다. 민주신당의 한 의원은 “문 사장이 출마 선언을 해도 국민들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을 것”이라며 “정치는 끊임없는 검증 작업인데 컷오프에서부터 검증을 피하려 한다면 어떻게 하려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일반적으로 국민이 한 사람의 정치인 이름을 아는 데 2~3개월이 걸리는데, 이미 시간적으로 늦었다”고 덧붙였다.

정치컨설팅업체 ‘민기획’의 박성민 대표는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을 예로 들면 서울대 총장 시절에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등 언론에 노출되면서 인지도를 끌어올 수 있었다”고 지적하고 “이미 범여권에서 판이 만들어진 만큼 이 판을 흔들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권순철 기자 i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