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처유상수]오디오기기 기술자 황종진씨-고물이 아닌 보물에 새 생명 불어넣다

고물로 보이지만 오래된 앰프를 사람들은 빈티지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환호한다. 그 고물 빈티지를 찾아 인터넷으로 보물찾기에 나선다. 겨우 구한 제품이 고장이 나면 그를 찾아온다.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층은 줄지 않고 계속 생겨나고 있다.

시간 앞에 굳게 버틸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태어난 것은 낡고 병들고 사라져 간다. 청계천에 있는 세운상가는 태어난 지 벌써 50년이 넘었고 낡았으며 서서히 제 몫을 잃어가고 있다. ‘세상의 모든 기운이 이곳에 모여들라’는 축원이 담겼다는 세운상가. 세운상가를 가득 채웠던 전자제품과 번영의 시대는 이미 저물었다. 그래도 아직 반드시 필요한 무엇인가를 좇아 세운상가를 찾는 이들이 있다.

세운상가 5층 종묘 쪽 끝 방에 진테크라는 작은 간판이 붙어 있다. 그 안 고물 오디오기기의 미로 속을 지키는 기술자 황종진 사장. 업자들은 그를 올빼미 황기사, 황박사, 황도사라 부른다. 별명과 같이 그는 올빼미처럼 일한다.

세운상가에서 일한 지 50년 된 오디오 수리기사 황종진 진테크 사장./김천

수리에 집중하기 위해 올빼미형 변신

“오후 3시쯤 출근해서 밤새 일하고 새벽 4~5시에 집으로 간다. 오래된 오디오를 고치려면 집중력이 필요하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눈을 마주치면서 이야기하며 교감해야 하는데 그러다보면 일의 실마리를 놓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일에 집중하기 위해 사람 만나는 일을 피하고 밤에만 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일 습관을 일찌감치 눈치채버렸다. 업자들은 그가 출근할 시간에 맞춰 들이닥친다.

출근해서 작업 준비를 할 때도 계속 전화벨이 울렸다. 대부분은 지방에서 오디오 수리를 문의하는 전화였고 가끔씩 업자들이 수리물건을 갖고 오겠다는 통보였다. 복잡하게 묻지도 않고 그는 “그렇게 하세요”란 한마디말로 대꾸하거나 “물건 둘 데가 없으니 가지고 있다가 나중에 가져오라”고 답했다. 그래도 업자들은 무거운 오디오 기기를 들고 와 이리저리 빈틈을 만들어 물건을 놓고 간다. 한눈에도 귀해 보이는 진공관 앰프 두 덩어리가 작업장 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나머지 기계를 놓을 자리가 없자 업자는 다음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워낙 일이 밀려 있어 그렇게라도 자리를 만들어 놓지 않으면 계속 미뤄지기 때문이다. 두툼한 봉투에 부속값과 수리비를 담아 넌지시 건네고 돌아서는 이도 있었다. 깊은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뭔가 간절한 기대와 부탁을 읽을 수 있다.

“여기 오는 기계들은 그냥 오는 경우가 없다. 대부분 한 번씩은 만져보고 그러다가 연기도 나고 그러면 찾아온다. 그러다 보니 두세 배 더 시간이 걸린다.” 작업 테이블 위에는 거대한 미제 매킨토시 파워앰프가 수술을 기다리며 속살을 보이고 있었다. 누군가 수리하다가 두 손을 들고 그를 찾아온 물건이다. 먼저 손을 댔던 업자가 증세를 설명하려 하자 그는 “알고 있다”고 말을 막았다. 이미 어디가 이상이 있는지 알아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일흔을 넘겼지만 그의 앞에 놓인 일감은 한눈에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1968년에 처음 이곳에 발을 들였으니 한 50년 넘게 오디오 수리 일을 했다. 이 자리에서만 근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스스로 수줍음이 많아 선전 한 번 하지 않았어도 입소문을 타고 사람들이 찾아온다고 했다.

“물건을 대충 보면 어디가 이상이 있을지가 보인다. 잘 안 될 땐 집에 가기 전에 소주 반 병 정도 마시고 잊어버린다. 아니면 그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리고 다음 날 다시 그 기계와 찬찬히 대화를 나눈다. 어디가 아프냐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한 번에 고칠 때 그 희열은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래도 일은 쉽지 않아 하루에 한두 개밖에는 고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일이 ‘쎄다’고 말한다.

그가 손보는 오디오 제품들은 대부분 30~40년을 훌쩍 넘겼고 때로는 그의 나이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세상을 버틴 기기들이다. 진공관부터 트랜지스터, 지금의 디지털 소자까지 작동원리와 생김새, 설계와 출력까지 같은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원리만 알면 패턴은 거의 같다고 말한다.

50년 넘은 세운상가에는 아직도 기술자들이 남아있다. /김천

호기심으로 전자제품 회로 독학

50년 넘게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었던 힘을 호기심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동네 형이 배터리를 주워와 꼬마전구에 불을 밝히는 것을 보고 마음 속 심지에 불꽃이 일었다. 우여곡절 끝에 군대 통신학교 교재를 구할 수 있었는데 책을 통해서 독학으로 전자제품 회로를 통달할 수 있었다. 한 번 이치와 원리를 터득하자 부품 사이를 잇는 길이 보이고 막힌 곳을 뚫는 방법을 알아챘다. “많이 연구해야 한다. 배우지 않고 경험만을 고집하면 길을 놓친다. 또 배움만을 앞세우고 경험이 없다면 실수를 많이 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금도 새로운 기기와 회로가 나오면 공부한다. 덕분에 디지털 기기들도 대충은 눈으로 훑어 알 만큼은 된다고 했다.

작업실에서 그를 위한 공간은 책상 하나, 나머지는 고물 기계들과 부품들로 가득했다. 곁에 서 있을 공간조차 부족해 보이지만 그는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를 훤히 알고 있었다. 물건을 맡겼던 손님이 찾아오자 쌓여 있는 기기 속에서 오래된 앰프 하나를 꺼내 잘 작동되는 것을 보여준다. “또 고장 날 수 있다. 지금은 손을 봐서 소리가 잘 나오지만 고장 나면 다시 가져오라.” 도사라 불리지만 황종진씨는 수리가 완벽하다고 단언하지 않았다. 다시 고장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고장 나면 또 고쳐주겠다는 약속만은 잊지 않았다.

수리비를 깎아달라는 말에도 그는 그냥 알겠다고 받아들였다. 그는 천성이 사람들과 다투지 않으려는 듯 보였다. 옆에서 보기에 무리한 요구도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알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자신이 아는 기술과 지식을 나눠주는 것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놀러온 업자 하나가 그의 낡은 부속통을 뒤지며 오래된 트랜지스터를 찾고 있었다. 트랜지스터 초창기의 부품들이 담긴 통이다. “거기엔 진짜 귀한 것들만 있다”는 말에 업자의 손길은 더 바쁘게 움직였다. 남이 보기에는 버려진 부품 같았지만 그에겐 보석만큼 가치 있는 물건들이다. 이런 것들은 다 버리라는 업자의 타박에 그는 “다 쓸데가 있다”며 입을 닫았다. 생산된 지 30~40년 된 오디오 기기들은 우선 수리용 부품 구하기가 힘들다. 오래 하다 보니 누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대충의 경로를 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그래도 구할 수 없는 것들은 다른 기계에서 떼어내서 쓴다. 덕분에 작업실은 사람 하나 서 있을 공간이 없이 오래된 기계들이 점령했다.

기기들에는 각각 어디에서 온 것인지 연락처가 붙어 있었다. 얼핏 봐도 부산, 대구, 청주, 제주까지 전국 곳곳의 지명들이 명찰처럼 붙어 있었다. 황종진씨가 출근하기 전 낮 시간에는 그를 돕는 직원 하나가 자리를 지킨다. 찾아오는 손님을 대하고 기계를 맡아 둔다. 다 고친 물건들은 내어주기도 하고 택배로 부쳐주기도 한다. 아주 오래전 그의 딸이 아버지를 도와 일하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소설가가 된 그 딸은 문학을 모색하던 시절 한때를 이곳에서 보냈다. 아버지에게 찾아오는 물건과 사람들의 사연을 보며 어쩌면 그의 문학 한 부분이 자라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낡고 고장난 오디오에 새생명을 주는 황종진씨./김천

잠깐 한눈 팔다 호된 대가 치르고 돌아와

고물로 보이지만 오래된 앰프를 사람들은 빈티지라는 호칭까지 붙이며 환호한다. 그 고물 빈티지를 찾아 인터넷으로 보물찾기에 나선다. 겨우 구한 제품이 고장이 나면 그를 찾아온다. 빈티지 오디오 마니아층은 줄지 않고 계속 생겨나고 있다. 새것이 넘치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이런 일들은 왜 일어날까. “옛날 향수도 있을 것이고, 일종의 컬렉션이기도 하다. 오디오에 입문하면서 어떤 장비가 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찾아서 들어봐야 직성이 풀리지 않겠나. 기기를 자꾸 바꾸다 보면 그 자체로 중독이 될 때가 있다.” 오디오의 성향은 취향 따라 달라진다는 그의 주장이다. 정답이 없고 무엇에서 만족할지 알아야 하는데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더 좋은 소리를 찾아다니는 것이 오디오 마니아들의 꿈이다.

그는 매장에서 듣는 소리가 가장 좋다고 했다. 집에 가져가서 들어보면 그렇게 좋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실망한다는 것이다. 같은 기기라도 분위기에 따라 천차만별의 소리를 들려주는 것이 오디오의 세계이다. 그 사람을 망하게 하려면 오디오 취미를 가르쳐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마니아들의 소리에 대한 집착과 투자는 한이 없다. 부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자의 취미로 오디오를 꼽는 것은 그런 기기 바꿈증 때문이라고 했다.

세운상가에는 아직도 옛날 오디오기기를 파는 가게들이 남아있다. 그리고 황종진씨처럼 그 물건들을 고쳐 생명을 연장하는 기술자들이 살아있다. 현업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도 있고 붙박이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와 같은 사람도 있다. 세월이 흘러 고물이 됐다 해서 그 안에 담긴 내용마저 낡아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30년 이상 된 국산 인켈 앰프 하나를 꺼내 스피커에 연결해 소리를 들려줬다. 겉모습과 달리 소리는 아름답고 윤기가 흐른다. “겉에 붙은 상표와 이름을 가리고 소리만 들어보면 진가를 알 수 있다. 어느 오디오나 사실 소리는 다 좋다. 성향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다만 듣는 사람은 만족하지 못한다.” 절대적으로 좋은 소리란 없다는 것이 그의 단언이다. 지족도솔천, 만족을 알면 어디나 천국이 된다지만 만족은 멀고 사람들은 망상을 찾아 헤매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사연들을 접어두고 한 길을 걷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도 70년대 청계천 전성시대를 겪으면서 운명에 주어지지 않는 선택을 했던 적이 있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참전용사들은 일제 오디오와 카메라를 사오던 것이 관례였다. 중동건설 현장에서 돌아온 산업전사들에게도 외제 오디오를 사올 수 있는 특권이 주어졌다. 그런 물건들이 세운상가로 몰려들고 돈이 돌아가는 중심이 됐다. 외제 제품이 정식 수입되지 않던 때라 그런 물건만 잡으면 돈벼락을 맞을 수 있었던 시절이다. 그는 “잠깐 한눈 팔았다가 호된 대가를 치렀다”며 말을 삼켰다. 돈을 좇아 전자제품 대리점을 열었지만 사람을 잃고 빚을 얻었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것이 지금의 작업책상 앞이다.

사람보다 기계와 대화하길 좋아하는 성격도, 빚을 갚기 위해 밤을 새며 일해야 했던 어제의 일도 그에겐 지나간 시절의 자취일 뿐이다. “기술이 있으니 이 나이까지 일할 수 있어 행복하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고 고쳐야 할 기계들이 앞에 있다. 고장을 고쳐 가면 사람들이 너무나 기뻐한다. 그러니 더할 나위 없다.”

인생도처유상수

어느 영역이건 고수들이 들려주는 삶의 원칙은 비슷했다. 황종진씨는 “하는 일에서 기쁨을 찾고, 쉬지 말고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새벽 4시에 심야버스를 타고 귀가하면서 그 시간에도 가득 찬 버스 속의 사람들 사이에서 그는 오늘의 현실을 본다. 어제의 번영은 단지 그가 다루는 기계 속에 깃들어 있을 뿐이고, 현실은 모두가 살아가기 힘들어졌다. 음악은 그 속에서 작은 위안을 줄 수 있고 그의 기술은 아직 쓸모가 있다. 세월은 먼지와 추억만을 남긴다. 먼지는 털어내고 추억은 살릴 수 있도록 하는 힘이 그가 오늘도 일하는 이유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