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처유상수]분장사 임동륜씨 “막 뒤에 분장사가 있어 좋은 작품이 나오죠”

하나의 드라마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쓰는 작가부터 연기자까지. 그리고 그와 같이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막 뒤의 인물까지 누구나 최선을 다할 때 빼어난 작품이 나온다.

드라마와 연극, 오페라와 영화 현장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최고의 장면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100여종에 이르는 분야의 현장 스태프들이다. 그 중에서 분장은 배우의 얼굴과 성격을 만들어낸다. 임동륜씨는 40년 넘게 분장사로 일하고 있다.

그가 처음 분장 일에 발들 디딘 1972년은 분장사라는 직종이 희귀하던 때였다. 임동륜씨는 “당시 정식 분장사는 모두 9명 정도가 고작이었다. 한 방송국에 3명씩 3개 방송사에서 일했고, 그들이 영화·연극 등 분장이 필요한 분야를 독점하던 때가 있었다”고 회상했다. 영화촬영소 인근에 집이 있던 터라 어릴 적부터 배우들이 오가는 모습을 자주 보았고, 그 덕에 임씨는 배우가 꿈이었다고 한다. 소질이 없었던 탓일까, 임씨는 배우가 되지 못했지만 친지를 따라 MBC 분장실에서 일을 배우게 된 것이 그의 평생 직업이 됐다.

그동안 임씨의 손을 거친 작품은 약 5000편. 어떤 작품을 했는지 기억조차 흐려졌지만 나이 70을 훌쩍 넘긴 지금도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며칠 전까지 지방에서 연극 분장을 하고 왔다. 공연을 따라 어떤 때는 서너 달 객지를 떠돌 때도 있다. 일이 예전 같지 않아 요즘엔 소소한 일이라도 기꺼이 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방 연극무대의 일은 보수도 많지 않아 어떤 때는 제 돈으로 술과 밥을 사줄 때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예술의 언저리에서 작품을 빛낼 수 있고 열정을 가진 이들과 이야기하고 술 한 잔이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이 자기 직업의 장점이라고 강조한다.

임동륜씨는 대본을 읽고 파악하는 일부터 분장사의 역할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70을 훌쩍 넘긴 지금도 여전히 현역

일이 과거와 같지 않게 된 데는 동업자들이 너무 많아진 탓도 있다. 그는 “요즘 분장을 가르치는 학원들이 많아졌다. 6개월 속성과정을 통해 분장사라는 이름을 얻고 일거리를 찾아 나선다. 전국에 연극·영화 관련 학과가 180여 군데나 있다. 1년이면 5000명 이상의 졸업생이 쏟아져나오고 그 중에서 상당수가 분장 일에 뛰어든다. 그러니 9명이 독식하던 시장에서 수천 명이 경쟁하는 세상이 됐다”고 설명한다. 실제 일하는 분장사의 수는 수천 명이 넘지만, 이익을 대변할 제대로 된 단체조차 없는 것도 분장 일이 저임금의 고된 일로 변하게 된 한 원인이다. 제대로 된 품셈도 없이 영원한 을의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는 “70년대 방송국 분장사 월급이 3만7000원 정도 됐다. 내 하루 일당이 5000원이었으니 수입이 엄청 좋았다. 선배들은 방송국 월급 외에도 바깥 일을 몰아서 했던 터라 2년 일하면 집 한 채씩을 샀다고 했다. 지금은 꿈도 꾸지 못할 시절의 일이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금 받는 보수는 정해진 바 없이 작품 제작비에 따라 달라지고, 그마저도 깎기가 일쑤다. 일을 따내도 더 싸게 해주겠다는 이가 나서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놓칠 수 있다. 100명의 스태프 인건비가 여배우 한 사람의 출연료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배우들에게 분장사들의 인기는 높았다. 자신의 얼굴을 돋보이게 해주니 당연한 일이다. 해외여행이 어렵던 시절 외국에 다녀오면서 분장에 필요한 물건을 사다 주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가 수십 년을 쓰고 있는 화장솔 주머니는 배우 한인수씨가 파리에서 사다 준 것이다. 손때가 묻고 가죽이 닳아질 정도로 오래됐지만 임씨는 그의 고마움을 잊지 않으려고 그의 사진을 붙여두었다.

그는 “대한민국 배우 중에서 얼굴을 만져보지 못한 분은 딱 한 사람밖에 없다. 최불암씨 분장은 한 번도 하지 못했는데, 일을 배우던 시절 나중에 대장 되면 해달라는 이야기를 했다. 후에는 일하던 방송국이 달랐던 탓도 있고 연극무대에서도 마주칠 기회가 없었다. 내가 손을 대면 배우들은 두말 없을 정도로 불만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여배우들은 특히 예민해서 얼굴이 어둡게 비춰지지 않고 어리게 보이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런 여배우들에게 그의 인기는 최고였다고 한다.

초기의 분장사들은 얼굴 분장뿐 아니라 의상과 소품까지 전체적인 분위기를 꾸미는 역할을 했었다. 의상의 색깔에 따라 피부톤과 분위기가 달라져서 분장사들이 예민하게 살피는 부분이기도 했다. 임씨는 “컬러TV가 처음 나왔을 때 대부분 붉은 계열의 옷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붉은 옷을 입으면 젊게 보이고 피부색도 밝게 보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표준색이 정해져 있고 세밀하게 색보정을 하지만 예전에는 부족한 조명 여건도 분장사의 붓 터치로 커버하는 일이 많았다”고 설명한다. 피부색이 서로 달라 한 화면에 두 연기자의 얼굴을 함께 보여주지 못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는 것이다. 배우 얼굴이 검게 나와도 분장사 탓이고, 연기가 살지 않는 것도 분장사를 탓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고 한다.

그가 아끼는 붓주머니는 배우 한인수씨의 선물이다.

여배우는 어려 보이는 분장을 좋아해

분장사에게는 저마다 특기가 있다고 한다. 그의 스승 중에 전예출 선생은 상투를 최초로 만들었고, 박수명씨는 왕비와 상궁들의 머리 모양을 고증해서 만들어냈다. 지금 드라마와 영화 등에 보이는 복식과 장신구들이 만들어지는 이면에는 분장사들의 노력이 배어 있다고 했다. 임동륜씨는 수염을 만들고 붙이는 실력이 최고라는 평을 받는다. 임씨는 “사극에서 인물을 드러내는 데 수염이 필수적이다. 수염 모양에 따라 신분과 성격에 개성이 생긴다. 많은 것 같아도 수염은 모두 100개로 정리된다. 윗수염 10개에 아랫수염 10개. 그 둘이 조합되어 100개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수염이 제일 어렵다는데 원리를 알면 가장 쉽다”고 설명했다.

임씨는 “분장용 소품 중에 내가 최초로 만든 것이 또 하나 있다.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게 쓰는 망건은 배우에게 맞춰서 만들기도 사나웠고, 썼다 벗을 때도 번거로웠다. 망건을 찍찍이라고 하는 벨크로로 뗐다 붙였다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분장사들의 아이디어와 손길이 간 물건들이 많다. 과거 현장 상황은 워낙 열악해서 분장사들이 하나하나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지금은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지만 누군가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라는 사실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분장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제대로 표현하려면 스태프들도 연출자만큼 대본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 “대본이 나오면 최소 세 번은 읽어본다. 전체 이야기를 파악하고 인물의 성격을 그려낸 후, 주변과의 관계를 알아야 제대로 된 분장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좀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서 역사책도 읽고 직접 현장을 찾아가 분위기를 살필 뿐 아니라 전문가의 조언도 반드시 듣는다.

그는 어떤 드라마가 제작되고 이야기가 유행하는 데는 사회의 분위기나 시대 상황이 숨어 있다고 강조한다. 군사정권 시대에는 이성계의 조선 건국 이야기나 대원군을 내세운 드라마가 반드시 만들어졌고, 최근 민주화운동 관련 영화들이 제작되는 것도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대원군을 가장 좋아한다. 시대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성격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대원군과 관련된 장소는 발품을 팔아 다 찾아다녔다. 덕분에 관련 작품을 제작할 때 분장 일로 참여하지 않더라도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내시가 나오는 작품을 할 때는 곳곳에 남아있는 내시촌을 찾아가 보고 왕실 인물들의 묘를 찾아가 묘비명이라도 읽어보았다고 한다. 덕분에 한문 실력과 역사 상식이 늘었고 그것이 일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강조한다. 지금도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무조건 찾아보고 인물을 그리기 위해서는 옛날 영화라도 다시 본다.

이야기뿐만 아니라 분장의 조류도 시대와 나라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는 분장이라 하고 중국에서는 화장, 일본은 미장, 서양에서는 메이크업으로 부른다. 나라마다 좋아하는 색채와 화장술이 다르다. 그뿐 아니라 흑백에서 컬러로, 그리고 화면 해상도가 높아지면서 분장도 더 섬세하게 진화하고 있다”며 배우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면 분장사들도 쉽게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임씨는 일을 하지 않을 때면 책을 읽는다. 특히 고전작품을 좋아해서 얼마 전에는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고 한다. 그는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나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을 좋아한다. 빼어난 문학이기도 하지만 어떤 부분은 쓸쓸한 내 인생과도 많이 닮아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 일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이뤘다고 자부하지만 현실의 삶은 무겁고 아직도 갈 길은 멀다는 것이다. 문학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좋은 작품에 참여할 때 힘을 얻는다고 말한다. 그가 아직도 책을 놓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삶의 뿌리가 문학에 있기 때문이라고 들려줬다.

분장가방 하나에 그의 일생의 경험과 기술이 담겨 있다.

“위대한 이야기꾼들이 사라져버렸어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마음먹고 제대로 감상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연극이 진행될 때 막 뒤에서 항상 대기한다. 배우가 들고 날 때 분장을 고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본무대를 보게 되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드라마가 진행될 때면 화면 속 분장상태를 모니터해야 하기 때문에 작품에 감정을 몰입할 수 없는 게 이 일이다”라고 한다. 하지만 그의 분장 덕에 인물이 살아나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의 시대와 달리 지금은 수없이 많은 후배들이 분장사의 길을 걷고 있다. 덕분에 그의 일도 점점 줄어들었다. 임동륜씨는 하루에 서너 군데를 뛰어다니며 일하던 것도 줄었고, 벌이도 줄었다. “해볼 만한 작품들은 거의 다 해봐서 큰 욕심은 없다. 다만 인간의 내면을 다룬 정극, 특히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한 해에 한 편씩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인생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무래도 대원군과 햄릿을 좋아하는 만큼 현장에서 일할 때의 분위기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역시 그는 연출자들과는 자주 다툰다고 했다. 작품을 보는 세세한 부분들이 충돌할 때도 있단다. 덕분에 고집 세고 잔소리 많은 늙은 분장사의 입지는 점점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가장 존경하는 연출자와 배우가 있다고 했다. “많이 물어보고 고민하는 감독이 가장 좋다. 분장할 때 작은 것 하나라도 물어보는 연기자를 만날 때 기쁘다. 서로 다른 분야지만 내가 경험한 이야기들을 아는 대로 말해준다. 후에 보면 그런 이들이 크게 성공하더라”고 말한다.

하나의 드라마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이들의 보이지 않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야기를 쓰는 작가부터 연기자까지. 그리고 그와 같이 이름조차 기억되지 않는 막 뒤의 인물까지 누구나 최선을 다할 때 빼어난 작품이 나온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인생도처유상수

그가 50년 가까운 세월을 분장에 쏟으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는 내용은 다소 의외였다. 임씨는 “위대한 이야기꾼들이 사라져버렸다. 소설이나 드라마까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일깨우는 큰 이야기들이 점점 나오지 않는다. 무대 뒤편에서라도 그 이야기의 현장에 서고 싶은 것이 나의 바람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 빛날 새로운 이야기가 태어날 때까지 그의 일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김천 자유기고가 mindtempl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