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갈수록 세지는 전광판의 괴력

우리는 달리 눈을 둘 곳이 없다. 전광판 속의 정치적 약속, 전광판 속의 에로티시즘, 전광판 속의 유토피아에 대하여 당연히 그 모든 것이 허위이고 기만이며 단지 명멸하는 이미지의 연속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다시 전광판을 올려다 본다.

서울의 도시 풍경. | 정윤수

비가 오려나,
하늘을 보는데
옥외 전광판이 보인다
풀 칼라 고해상도로
발광하는 건물들
시사뉴스와 광고와 스포츠 영상을 끝없이
전송하고 있다
잠시도 무료할 틈이 없는 거리
여기선 멍청하게 하늘을 보는 게 허용되지 않는다

손택수 시인의 시 ‘광화문 전광판’이다. 거대한 스펙터클의 도시 서울, 한마디로 전광판의 도시다. 어디 서울뿐이랴. 경향 각지의 크고 작은 도시들이 밤마다 요란한 전광판 불빛을 밝힌다. 화려한 전광판이 스스로 명멸하고 발광하며 내보내는 신호들, 기호들,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강력한 시지각적 충격을 준다.

긴급 뉴스를 전하는 전광판은 진짜 긴급 뉴스를 전하는 게 아니라 ‘긴급 뉴스를 전하는 전광판’이라는 기호를 긴급히 전달한다. 그 안의 메시지는 도시인들이 이미 텔레비전이나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다 확인한 사항들이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이지만 전광판이 굵은 고딕체로, 압축적인 문장으로, 두 번 세 번 명멸하며 쏘아대는 순간, 그것은 시각을 통해 전달되는 사실을 넘어 마음 깊이 각인되는 이미지가 된다.

음향 없는 전광판 영상의 역설
뉴스들 사이에 광고 영상이 흐른다. 대체로 텔레비전을 통해 익히 본 광고 영상물이지만 도시의 거대한 빌딩 꼭대기에서 흘러넘치는 영상이기 때문에 독특한 맥락에서 작동하는 기호가 된다. 이 기호들은 일단 텔레비전에서 보았던 음향이 제거된 상태다.

그 악조건, 즉 확성기를 통하여 광고 음성이나 음향까지 다 들려줄 수는 없다는 제약 때문에, 전광판은 큼직한 자막으로 그것을 대체한다. 음향 없는 영상, 자막 효과를 입은 전광판은 오히려 역설의 힘을 갖는다. 그 자막을 읽게 되고, 광고 영상 속의 인물들이 입을 벙긋거리는 것을 운전석에 앉아서 따라 하게 된다. 이때 기호는 허공을 날아와서 망막을 강하게 통과하여 심장 속에 박히는 메시지가 된다. 수신자는 때로 어리둥절해지고 과도한 영상 작용들 때문에 짜증이 나기도 하며 그러다가 대체로는 심드렁해진다. 무감각해지는 것이다.

이런 지각 작용을 학술적으로 처음 주목한 학자는 한 세기 전의 독일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이었다. 그는 1903년에 ‘대도시와 정신적 삶’이라는 짧은 강의록에서 그 당시 급발전한 대도시의 현란한 이미지들의 홍수를 주목했다. “급속도로 이미지들이 교체되면서 밀려오거나, 하나의 이미지 안에서 포착되는 내용의 변화가 급격하거나, 밀려오는 인상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것일 때 도시인은 ‘신경 과민증’에 시달리게 된다. 전통적인 농촌 공동체의 느리고 완만한, 별달리 시선을 자극할 만한 것이 없는, 고즈넉하다 못해 자연의 소리 외에는 딱히 들려오는 것도 없는 고요한 공간에 머물던 인간이 대도시에 몰려와서는, 곧장 화려한 이미지의 홍수에 내몰려 신경 과민증까지 겪게 된다고 짐멜은 썼다.

광화문 광장. | 정윤수

살인적 경쟁사회일수록 위력 배가
그는 “대도시에서는 건물과 교육시설들, 공간을 뛰어넘는 기술의 기적과 편의시설들, 공동체적 삶의 형태들, 그리고 국가의 제도들 안에 엄청난 양의 정신이 비인격적인 결정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개인은 그것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물론 짐멜은 도시 이미지의 타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도시인의 방어 기제를 모색했다. “인격의 심층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정신적 기관”, 즉 이성이 외부의 자극들을 적절히 통제하게 하고, 바로 그 ‘인격의 심층’, 곧 도시인의 내면 세계는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심미적 공간을 찾게 된다고 썼다.

그런데,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짐멜의 기대와 달리 21세기의 현대 도시는 끝없는 자극을 더 크게, 더 집요하게, 더 세련되게 펼쳐놓는다. 살인적인 경쟁이 전면화된 사회일수록, 그러니까 개인의 독특한 내면세계를 전혀 존중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사회일수록 전광판의 위력은 배가된다.

맨 앞에 소개한 손택수 시인의 시 ‘광화문 전광판’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부정할 수 없는, 전광판 아래의, 쓸쓸한 도시 풍경이다.

정윤수의 도시 이미지 읽기

저물어가는 노을 대신 화려하게
명멸하는 이미지들을 따라가기 바쁘다
언젠가 밤하늘 별을 보면서도
뉴스나 광고를 생각하겠구나
광고 하나 나 하나
광고 둘 나 둘
리모컨으로 꾸욱 눌러 꺼버릴 수도 없는 전광판을 헤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구나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