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오키나와 민족의 교사 ‘이하 후유’

이하 후유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그의 묘지는 오키나와 최초의 전설 속의 왕인 영조의 무덤이 있는 우라소에 시에 있다.

지난겨울, 오키나와에서 이하 후유 선집을 샀다. 마키 시장의 구석길을 걷는데, 헌 책방이 있었고 그곳에서 이하 후유의 책을 발견했던 것이다. 오키나와 타임스에서 편집한 이 선집을 한국에서 읽어나가려고 했지만, 생각보다 글은 더디게 읽혔다.

<오모로소시> 때문이었다. 16세기 류큐왕부에서 편찬한 이 신가집은 일본의 <만엽집>에 뒤지지 않게 ‘고류큐’ 시대를 고스란히 시화(詩化)하고 있었다. 이하 후유는 동경제국대학 국문과 1회 졸업생이었다. 류큐 출신으로 일본 본도에서 설움을 받으며 학위를 마치고 오키나와로 귀환해 오키나와 현립박물관에서 학예사로 일했다.

이하 후유 생전의 모습. | 오키나와현 공문서관

학예사로 일하면서 그가 집중한 것은 오키나와 역사의 독자성과 문화의 유구성을 해명하는 일이었다. 이하 후유가 연구하기 전까지, <오모로소시>를 제대로 해석한 사람은 없었다. 근대 학문의 방법론이 없었기에 <구양>이라든가 <오모로소시>라든가 <금석문>이 있다고 해도 그것을 체계적으로 읽은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과 오키나와인 동일민족 제창
이하 후유는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로, 그의 묘지는 오키나와 최초의 전설 속의 왕인 영조의 무덤이 있는 우라소에 시에 있다. 지난여름 우라소에와 이하 후유의 묘지를 방문해 유심히 그곳의 풍광을 살폈다. 오키나와 최초의 왕성인 우라소에 성에서는 계유년 고려 도공이 제작한 기와가 수천개 발견되었는데, 일본의 민속학자인 노구리치 시노부의 유추에 의하면, 아마도 영조의 정전을 건축할 때 대다수의 고려기와가 사용된 것으로 유추된다.

<계유년 고려와장조 명문와>(癸酉年高麗瓦匠造銘文瓦)는 오키나와사의 미스터리다. 이것은 영조의 출신과 관련하여 오키나와와 일본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아 있다. 대체로 일본 학계에서 유추하는 것은 2차에 걸친 항몽과정 속에서 패배한 삼별초의 잔류부대가 오키나와로 이주하는 과정에서 도공들이 함께 온 것이 아닌가 하는 해석들이 존재한다.

반면 현재의 가고시마 지역을 지배했던 사쓰마 번이 오키나와를 침공한 이후 오키나와에서는 야마톤츄(일본인)와 우치난츄(오키나와인)가 공통의 민족이라는 이론이 형성되었다.

이 이론에 따르면 기원전 300년에 큐슈를 거쳐 도래인들이 오키나와의 북부에 입도(入島)함으로써 류큐의 선사시대가 열렸는데, 아마도 아마미 대도(大島)를 거쳐온 게 아닌가 추측된다. 오키나와 본도의 시조신은 ‘아마미쿄’와 ‘시네리쿄’로 자매신이다. ‘아마미’란 곧 아마미 대도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하 후유의 주저 <고류큐>의 표지. | 오키나와현 공문서관

하지만 현재로부터 무려 2300년 전에 분기된 두 민족을 동조동근론에 입각해 하나의 민족이라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민족(nation)과 종족(ethnic)은 다르다. 이런 식으로라면 유럽인들은 다 같은 민족일 뿐만 아니라, 시베리아로부터 오키나와에 이르는 알타이어계의 우리 모두는 같은 민족인 것이다.

폐번치현 이후의 근대적 민족 개념을 과거로 투사하여, 예부터 동일 민족이니 일본제국에 의한 오키나와 멸망을 역사시대 이전에 헤어졌던 두 민족의 재결합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데 이런 논리를 가장 강력하게 제창했던 것은 이하 후유였다. 이하 후유가 이런 주장을 펼친 것은 1908년 8월 1일 오키나와신문 지상에 연재한 ‘류큐사의 추세’라는 논문에서였다. 이 논문이 발표된 때는 류큐왕국이 사쓰마 번에 의해 멸망한 후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되었으나 야마토인들이 오키나와인들에 대한 멸시의 감정을 아직 노골적으로 피력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이하는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 이하의 글에서 유독 강조되는 것은 아이누와 생번족에 대한 대타의식이다. 홋카이도의 원주민인 아이누인들과 타이완의 원주민인 생번족은 일본에 의해 오키나와와 함께 복속된 민족이다. 하지만 오키나와와 아이누, 생번족들은 다른 게 있었다.

식민주의적 편견에 최대한 저항
오키나와는 일본제국에 의해 식민화되기 벌써 수백년 전에 류큐왕국을 이루고 선진 중국 문화를 체화한 데 비해, 아이누와 생번인들은 국가를 형성한 적이 없다. 이런 점에서 이하 후유는 아이누와 생번인들과 우치난츄를 동일 선상에서 차별하는 야마토인들의 식민주의적 편견에 최대한 저항하고자 했다.

일본과 오키나와인이 같은 민족이라 하면 일본의 오키나와 차별은 근거가 없어진다. 일제 말기 이광수의 ‘조선과 일본이 동조동근이라면 조선이 일본에 불교와 한자를 전승해주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식의 역(逆) 식민주의도 가능해진다. 물론 이하 후유와 이광수는 같은 상황이 아니었다.

이하 후유의 <진화론에서 본 오키나와의 폐번치현>을 보면 이완용 등 조선인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이하는 자신의 처지를 이완용과 같은 상황과 대조한 후 오키나와의 미래를 전망한다. 이완용과 자신에게 동일한 상황이라면, 조선과 류큐왕국이 500년 이상 전개해 왔던 문명국가라는 점뿐이다.

이하는 오키나와인들을 문명인이라 생각했고, 이런 점에서 야마토인들이 자신을 야만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 일들을 일본인들은 자행했고, 그래서 폐번치현 이후의 오키나와 사족(士族) 모두가 퇴폐적인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는 오키나와의 미래에 희망을 걸었다. 그는 채온과 같은 오키나와의 정치가들은 에도 시대의 정치가와 비교할 수 없는 역량의 소유자라 주장했다. 채온 등 오키나와의 사족들은 왕국을 관리했으나, 에도 당시의 각 번의 사족들이란 일개 번의 행정관에 불과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그런 관점에서 이하가 폐번치현을 ‘노예해방’으로 비유한 것이 이해가 될 것 같다. 나는 이 노예생활을 중국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했는데, 차분히 꼼꼼히 읽어보니 그것은 사쓰마 번에 대한 것이었다. 막부도 아니고 일개 번이 류큐왕국을 침략해 통치하다니 그것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게 이하의 생각이었다.

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

이하는 마지막으로 류큐의 교사의 몫이 크다고 역설한다. 류큐와 같은 자부심 있는 민족이 일본과 같은 대제국에 통합되어 멸시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자면 교사들이 중세의 채온과 같은 대유학자와 정치가를 배출해야 한다. 그 몫은 오로지 교사들에게 있다고 결론내렸다. 생각해 보면, 이하야말로 오키나와 민족의 교사였다.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