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책갈피]왜 떠나는지 생각하고 떠나라

여행의 숲을 여행하다

김재기 글·사진 | 향연 펴냄

여행준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돈·시간·체력이라는 하드웨어, 둘은 정보· 배경지식·언어라는 소프트웨어, 마지막은 인격·교양·자세다.

산벚꽃이 바람에 흩날린다. ‘봄날의 행락은 어느 곁으로 떠나 버렸는가?(三春行樂在誰邊)’ 스스로를 묶어 떠나지 못하는 사이에 봄날은 간다. 세계관광기구(WTO)는 올 한 해 전 세계 여행자 수가 10억을 넘을 것으로 예측했다.

여행안내서 <론리 플래닛>의 창간자 토니 휠러에게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곳이 어디였습니까”라고 물었다. “공항의 출국장입니다.”
여행은 길을 떠나면서 시작된다. 저자가 생각하는 여행의 제1계명은 ‘왜 떠나는지 생각하고 떠나라’이다. 그렇다면 왜 떠나는가.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꿈을 이룸과 동시에 꿈에서 깨어난다. 저자에게 있어 여행은 “환상과 현실 사이의 줄타기” 같은 것이고, 여행자는 “언제나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떠도는 불안한 나그네”다. 책의 경계는 얼핏 모호하다. 여행만큼이나 불안한 줄타기다. ‘인문학의 눈으로 바라본 여행의 모든 것’이라는 부제가 좌표다. 여행에 관한 인문학적 성찰을 꿈 꾼 듯하다. 그러나 호기심을 통해 여행을 안내했고, 기자 출신답게 우리 사회의 ‘관광’ 현실을 외면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책은 저자의 일기다. 스페인 여행길에서 누군가는 한번쯤 꿈꾸었음직한 만남이 전개된다. 밤 늦은 이방의 항구도시. 목적지를 향한 마지막 버스는 길이 끊겼고, 우중충한 불빛 아래 거리의 여인들이 포구를 배회하는 부두 건너편 뒷골목. “죄송합니다, 손님. 지금 방이 하나밖에 없네요. 다른 방은 다 찼거든요.” 통속을 넘어서 심장은 뛴다. 그래서 여행의 가장 큰 매력은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것이라 했을 것이다.

HRMMS 증후군이란 말이 있다. ‘Hotel-Restaurant-Monument-Museum-Shop Syndrome’의 약자다. 여행 가서 ‘호텔, 식당, 기념물(명소), 박물관, 상점’에만 돌아다니는 행태를 슬쩍 비틀어 만든 말이다. 남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작정 떠나지 말라는 것. 저자는 철학의 담장을 넘는다. 인간이 지혜로운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라면 본래는 준비하는 인간인 호모 프레파란스(Homo praeparans)이기에 여행 준비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훈계한다. 여행준비는 크게 세 가지다. 하나는 돈·시간·체력이라는 하드웨어, 둘은 정보·배경지식·언어라는 소프트웨어, 마지막은 인격·교양·자세다. 이 정도면 전인격이다. 여기에다 가상훈련까지 주문한다. 저자의 논리에서야 당연하다. 여행은 “때때로 생존을 위한 전투”라고 했다.

산업혁명은 마차에서 철도 시대를 열었다. 부르주아들의 여가생활이 가능해졌다. “자신을 해방시키고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자신에게 친숙한 양식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그때야 비로소 진짜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이것이 여행과 관광의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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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가는 곳마다 한식당을 찾는 나는 뻔하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디지털카메라의 셔터를 눌러 대는 것 또한 상습이다. 길에서 만난 현자의 충고다. “내 나이가 벌써 70이 넘었소. 게다가 우리 집에는 지난 40년 동안 세계 곳곳에서 찍은 사진이 수만 장이나 있다오. 방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야. 그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는 것도 어려운 판국에 이제 내가 사진을 더 찍어서 뭐 하겠소?” 꿈과 현실, 인문과 실용의 줄타기는 절묘하다. “술은 내가 마시는데 취하긴 바다가 취하”는 성산포처럼 여행은 저자의 일이었으되 여행의 가슴 떨림은 독자의 몫이다. 나도 떠날 수 있을까. “우리 앞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는 끝까지 다 온 것이다. 우리 뒤에 아무것도 없다면 그때는 앞에 시작이 놓여 있는 것이다.”(칼 샌드버그) 어차피 떠나야 하고 언젠가 떠나야 할 인생이라면 떠나는 훈련은 계속돼야 한다. 꽃이 지기에는 그래도 봄이다. 책을 덮고 난 뒤 떠나야 할 이유를 찾았으면 좋겠다.

최재천<변호사> cjc4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