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베스트 원]한국 최고(最古) 브랜드 ‘부채표 활명수’

국민 뱃속 지키는 소화제의 대명사

연대별로 변해온 활명수.

‘고잉 온 시어리(Going on theory)’는 한때 풍미했던 경영학 이론 중 하나다. 기업이 만들어지면 풍상을 겪더라도 조직 자체는 해체되지 않고 지속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이론이다.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않는 기업의 시장 퇴출이 다반사인 세계화 시대에 맞지 않는 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이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를 입증하는 기업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단연 동화약품이 꼽힌다. 한국 최고(最古) 기업인 동화약품(사장 조창수)은 지난 9월 25일 111주년 창사기념식을 했다. 안양 만안동 안양공장 대강당에서 150여 명의 임직원과 가족들이 참석한 기념식은 특별한 이벤트조차 없는 조촐한 행사였다. 다만 동화약품은 홍보실을 통해 1897년 9월 25일 궁궐에서 고안한 활명수가 한국 최초의 등록상품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됐음을 언론에 알렸다. 회사 창립일이 곧 활명수를 처음 상품화한 날인 셈이다.

‘부채표 활명수’는 한국 최고(最古) 브랜드다. 물론 소화제의 대명사로 통한다. 활명수가 탄생하던 1897년은 고종황제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던 해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조선을 ‘독립국가’로 선언한 것이다. 한국 최초의 신약이 마침 그 해에 탄생한 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돌리기에는 부족하다.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는 노천 민병호 선생이 국민구제의 열망을 담아 만들었다. 그는 20대 초반에 무과에 급제한 뒤 선전관으로 일했다. 선전관은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 요원과 비슷한 직책이다. 그가 궁궐을 자유자재로 출입할 수 있는 업무를 맡았던 것은 행운이었다. 의학에 관심이 많던 그는 궁중한방의 비법을 익혀 한약 지식에 달통했다. 거기다가 한국 최초의 서양식 국립의료기관인 광혜원을 설립한 미국 선교의사 알렌이 갑신정변 때 피격돼 사경을 헤매는 금위대장 민병익을 빠른 시간에 완치시키는 것을 보고 양의학에도 관심을 가졌다. 노천 선생이 그간 터득한 궁중 비방과 서양 의학을 접목해서 만든 게 바로 활명수다.

궁중비방과 서양 의학 접목 탄생

활명수 방어용 활명액 상표 등록증. 최초의 상표 등록은 1909년 10월이었다. <동화약품 제공>

노천 선생이 활명수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당시 가장 흔한 질병으로 위장장애, 소화불량이 손꼽혔다. 구한말 먹을거리는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대다수 국민은 가을걷이 때를 제외하고 초근목피로 배를 채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오죽했으면 19세기 말 영국 여행가 이사벨라 비숍이 ‘조선과 그 이웃들’이라는 저서에서 “한국 사람은 못 먹는 게 없다”고 기술했을까.

활명수는 위장병에 신통한 효력을 발휘했다. 활명수 이전에는 급체, 소화불량이 흔한 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약이 없었다. 민간요법에 의지하거나 약이라고는 달여서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기였다. 이러한 때에 소화불량에 탁월한 효과가 있으면서도 복용이 간편한 활명수는 브랜드 이름처럼 ‘생명을 살리는 물’이 됐던 것. 현대식으로 말하면 한국 최초의 ‘스낵 컬처(Snack Culture) 상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낵 컬처’란 짧은 시간에 간편하게 무엇인가를 즐기는 문화를 말한다.

1910년대 60㎖ 활명수 한 병 값은 무려 50전이었다. 설렁탕 두 그릇에 막걸리 한 말을 먹을 수 있는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에는 활명수가 매우 귀한 제품이었던 것이다. 활명수를 만들게 했던 국민 구제정신은 독립운동으로 이어진다. 일제강점기에 활명수를 팔아 번 돈 중 상당 부분이 독립자금으로 쓰였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의 초대 사장인 민강 선생은 1919년 회사에 상해 임시정부의 비밀 연락처인 연통부를 만들었으며 독립자금을 조성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 때문에 회사가 존폐의 위기를 겪기도 했다.

유사품 난립 속에도 총 80억 병 판매

지난 9월 25일 경기 안양공장에서 열린 창립 111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윤도준 회장(가운데), 윤길준 부회장(왼쪽), 조창수 사장(오른쪽)이 다과회에서 케익 커팅을 하고 있다. <동화약품 제공>

“활명수는 큼직한 가마솥에 위장약 계통의 각종 한약재인 계피,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 등 11가지 순수 생약을 넣은 다음 물을 붓고 한참 달이면 생약의 약물이 우러나와 진한 팅크(丁幾·용액)로 변한다. 이것이 복방방향팅크(複方芳香丁幾)다. 이 팅크를 솜을 놓은 고운 체로 걸러내는 여과 과정, 그리고 곱게 빻아낸 수입 약재 아선약(阿仙藥)과 정향(丁香)가루를 타고 멘콜(박하)을 묘미 있게 배합한다.”

이는 당시 활명수 비방의 내용 중 일부다. 당시 집에서 다려 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시대상에 비춰 보면 양약의 제조방법을 적용해 탕약의 과학화를 시도한 획기적인 제조방법이었다. 물론 오늘날의 활명수는 제조 기술의 발전에 따라 많은 변화를 해왔다. 초창기에는 가내수공업적인 체제에서 생산했으나 현재는 전자동 생산라인에서 연간 1억 병 생산, 연매출 400억 원, 시장점유율 70%(2007년 기준)를 점하는 빅브랜드가 됐다. 기존 활명수의 약효에다 탄산가스를 첨가해 청량감을 보강한 ‘까스활명수’를 1966년에 발매한 데 이어 1989년, ‘까스활명수-큐’를 발매, 소화제 시장에서 활명수의 위치를 더욱 굳혔다. 또 2002년에는 기존 활명수 11가지 생약 성분에 오약(烏藥), 지실(枳實), 감초(甘草) 등을 추가해 소화력이 한층 강화된 프리미엄 브랜드 활명수 골드를 내놓았다. 지금까지 팔린 활명수는 자그마치 80억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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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는 생산 기술의 발전과 제품 업그레이드를 통해 긴 세월만큼 많은 변화를 해왔다.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약효다. 활명수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이 등장했다. 1910년대에도 활명회생수, 활명액 등 60여 종의 유사제품이 난립했다. 양규식 동화약품 홍보부장은 “활명수의 역사는 유사 제품과 전쟁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종 업종과 경쟁도 치열했지만 이종 업종에서 뜻하지 않은 도움을 얻는 일이 생겼다. 일명 ‘활명수 칵테일’이 한때 주당의 인기를 끌었다. 1960년대 한 소주 업체의 영업판촉팀이 판촉활동의 일환으로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자사의 제품에 활명수를 타서 마시는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소주의 쓴맛을 없애주고 속을 편안하게 해주면서 소주의 색깔을 노르스름하게 해 마치 양주를 마시는 것과 같은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김경은 기자 jj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