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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진수 편집장

홍진수 편집장

뒤늦게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회고록을 읽고 있습니다. 개인의 호오나 평가를 떠나서 역사에 기록될 자리에 머물렀던 사람은 의무적으로 회고록을 썼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필자의 주관적 의견, 일방적인 주장이 많이 담기겠지만 그 자체로 사료가 될 테니까요.

1~2권을 합쳐 700쪽이 넘는 <이회창 회고록>(김영사·2017년)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띈 일화는 달랑 5쪽가량으로 정리한 2000년 ‘의약분업과 의료대란’입니다. 자연스럽게 요즘 상황이 겹쳐집니다.

김대중 정부는 논란이 많던 의약분업을 2000년 7월 1일부터 강행하기로 방침을 정합니다. 명분은 의료시스템 개혁입니다. 야당인 한나라당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광역시와 도 중 몇 군데 표준지를 선정해 6개월간 시범 실시하고 거기에서 실제로 생기는 문제점을 추출해 이를 보완한 후 전면 실시하자’고 주장합니다.

의사들은 의약분업에 반대하며 집단행동에 나섭니다. 먼저 동네 의원들의 집단 폐업이 시작됐고, 이어 대학병원의 의사와 전공의의 진료 거부로 확산합니다. 긴급 투입된 의대 교수 등도 장시간의 진료로 지치고, 응급실을 폐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는 토요일인 2000년 6월 24일 가톨릭대 여의도성모병원을 찾아가 의사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당사로 돌아오자마자 총재 비서실장에게 청와대에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라고 지시합니다. 놀랍게도 청와대에서 바로 답변이 옵니다. 당일 오후 5시에 만나자고 합니다. 이 전 총재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습니다. “상황이 긴박하기도 했지만 야당 총재가 아무런 사전 타진이나 협의도 없이 토요일에 긴급회담을 요청하고 대통령이 즉각 이를 받아들여 당일로 회담 일자를 잡아 만난 일은 앞으로도 보기 힘든 사례일 것이다. 급할 때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즉각 회담 일정을 잡아준 김 대통령의 결정을 나는 지금도 높이 평가한다.”

이회창 총재는 김대중 대통령에게 ‘6개월간 시범 실시’를 다시 권고합니다. 김 대통령이 완강하게 거절하자 이 전 총재는 ‘임시국회 회기 안 약사법 처리 약속’ 등 차선책을 제시합니다. 김 대통령이 이를 받아 합의하고, 다음 날인 6월 25일 의사협회는 찬반투표를 거쳐 폐업 철회를 결정합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의료대란이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우여곡절이 있었고, 2차 의료대란도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사회적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또 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이야기라 회고록 전체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총선을 앞둔 현재 ‘정치가 사라졌다’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서로를 혐오하고 적대시하는 양대 정당이 이번 선거에서도 많은 지지를 받고, 갈등은 더 커져만 갈 겁니다. 그래도 선거를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 자체를 혐오하지는 말아야겠습니다.

<홍진수 편집장 soo4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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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뒤척인다. 겨우내 마음 편히 잠을 자지 못해 머리에 스모그가 낀 듯 무겁다. 창밖을 보니 눈이 내린다. 이상기온이 일상이 돼간다. 기후변화의 징후인 3월 중순 눈 쌓인 풍경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불길하다. 자연 시스템의 불안정성만큼이나 정치와 사법 시스템 또한 아슬아슬하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을 둘러싼 사회적 긴장은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한 불안정성을 드러낸다. 일만 년간 이어온 기후 안정성과 40여 년이 채 안 된 한국의 민주주의는 기간으로는 비할 데 아니지만, 우리 삶에 당연히 주어지는 조건으로 여겨졌던 점은 흡사하다. 이번 겨울 기후환경이든 정치체제든,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이 얼마나 쉽게 흔들릴 수 있는지 여실히 드러났다. 기후위기와 정치위기라는 무관해 보이는 두 위기는 사실 그 원인 면에서도 맞닿아 있는데, 효율과 성과가 최우선시되는 과정에서 다른 중요한 가치는 간과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회는 산업화하는 과정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법을 배웠지만, 화석 연료 중심의 에너지 구조를 전환하는 데 게을렀고, 정치적 다양성과 세대 간의 이해를 구현하지 못했다. 우리는 경쟁을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방식의 성장이 우리 사회를 갉아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