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극장전]과거는 침묵으로 덮을 수 없다

2022년 3월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의 과거사 관련 입장이 계속 도마 위에 오르내리고 있다. 특히 군사정권 출신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가 뜨거운 감자다. 혹자는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가자고, 다른 이들은 후속세대를 위해 역사 바로 세우기를 놓쳐선 안 된다고 목청을 높인다. 이런 역사 논란은 우리만의 숙제가 아니다. 격동의 근현대사를 거쳐온 동아시아 나라 공통의 문제다. 우리의 주요 파트너인 인도네시아 또한 그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침묵의 시선> 포스터

네덜란드와 오랜 독립투쟁 끝에 건국된 인도네시아는 수하르토의 군부쿠데타로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가 실각하면서 1965년 전후 대대적인 ‘빨갱이 사냥’이 일어난다. 반대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지식인과 노조원, 농민 위주로 100만명 이상이 학살당한다. 하지만 이 참극은 현재도 거론되지 못한다. 정치세력 간 타협으로 맺어진 ‘침묵 협약’의 결과다. 학살 주범들은 지금도 큰 세력을 갖고 떵떵거리고 피해자는 숨죽이는 현실이다.

조슈아 오펜하이머 감독의 <액트 오브 킬링>(2012), <침묵의 시선>(2014) 연작은 바로 그 모순을 파헤친다(두 영화 모두 네이버 VOD와 다큐 전문 OTT ‘VoDA’에서 관람 가능). <액트 오브 킬링>은 파격적 구성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학살을 실행한 정치깡패 두목 안와르 콩고가 자신의 무용담(!)을 자랑스럽게 재연한다. 감독은 2편의 영화 작업을 동시에 진행한다. 하나는 할리우드 영화 키드인 주인공이 활약하는 가해자 중심 판타지, 다른 하나는 (감독의 의도인) 가해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당시 학살 전모와 살인자들의 시선이 구현된 다큐다. 그 외에도 주인공의 수하인 현재의 정치깡패와 보다 고위층이 된 자를 등장시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침묵의 시선>은 파격적 구성으로 화제가 된 전작에 비해 희생자의 가족이 주인공인 정석적인 전개를 취한다. 형을 대학살 당시 잃은 이발사 아디의 가족은 50년이 지났지만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다. 그는 치유와 화해를 위해 감독이 주선한 가해자 가족과 만남을 시도하지만, (안와르 콩고처럼) 감독 앞에서 과거의 활약을 자랑하던 그들은 막상 아디가 등장하자 대화를 거부한다. 아디와 대화하면 자신들의 범죄를 인정하는 꼴이 될까봐 심적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 섬뜩한 장면은 주지사급 고위인사가 된 과거 가해자와의 면담이다. 과거를 캐묻는 아디에게 그는 어느 지역에 사느냐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인다. 감독은 주인공 가족의 신변을 염려해 망명까지 고려하며 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그런 시련을 거쳐 영화는 인도네시아에서 개봉했고, 군부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민선 대통령이 관람하는 등 큰 화제가 됐다.

방구석 극장전

두 영화 엔딩 크레딧엔 무수히 많은 ‘익명(Anonymous)’이 등장한다. 아직도 해당 소재를 자유롭게 발언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이런 시도가 변화의 촉매가 될 것임은 분명하다. 가해자가 과거를 묻지 말라며 아무리 포장해봤자, 피해자가 용서하기 위해선 가해자가 누구인지부터 명백히 정리돼야 할 것이다. 공과가 다 있다는 식의 두루뭉술한 이야기 이전에.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