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오오쿠(大奧)>-200년 전 에도시대 “어디 남자가 정치를!”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어머니 하루사다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남자는 “태어나는 족족 일이든 아이를 낳는 것이든 전부 여자에게 떠맡기고”, “그저 여자에게 들러붙어 아이만 만들 뿐”이어야 한다고.

“이에나리, 내 늘 그대에게 말해 왔을 터인데, 자식은 어머니를 따르고, 남자는 쓸데없이 정치에 참견해서는 안 된다고.” 에도시대 최고 통치권자인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에게 그의 어머니 하루사다가 싸늘한 표정으로 하는 말이다. 조선 식으로 바꾸면, 고종의 ‘어머니’ 흥선대원군이 비슷한 말을 한 셈이다. 어딘가 이상하고 방송인 김숙의 가부장 미러링 “어디 남자가!”가 생각나 우습기까지 한 이 발언은 역시나 실제 역사는 아니다. 도쿠가와 막부가 전국을 통일해 쇼군(將軍·현 군대의 장군과 달리 실질적 통치권자였다)으로서 다스리던 에도시대(1603~1868)를 무대로 해 200년이 넘는 가상의 역사를 구축한 만화 <오오쿠(大奧)>의 설정 속에서 나온 발언이다. 게다가 실제 역사에서 하루사다는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이런 ‘이상한’ 장면이 만화 속에서 그려진 연유를 살펴보자.

일본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 「오오쿠」의 한 장면. / 서울문학사

무서운 전염병으로 남성 인구 급감

사연은 이렇다. 에도시대 초기인 1630년 무렵, 3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통치하던 때 무서운 전염병이 돌기 시작했다. 온몸이 빨간 종기로 뒤덮여 사망에 이르는 이 병은 이후 적면포창이라고 불리는데, 주로 젊은 남자가 발병하면 십중팔구는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 이로 인해 짧은 시기 동안 남성 인구가 급감했으며 이 병이 100년 넘게 퇴치되지 않았던 탓에 도쿠가와 일본은 남녀 비율이 1대 5에 이르는 극심한 여초 사회가 되어버리고 만다. 자연히 남성 노동인구가 부족해져 여성이 일을 해야 했고, 이에 따라 소수의 남성은 인구 재생산을 위해 소중한 존재로 신주단지처럼 ‘모셔지고’ 재생산에도 쓸모가 없는 남성은 ‘버림받게’ 된다. 그 외에도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위치와 지위에 크고 많은 변동이 생겨난다.

뿐만 아니라 정치도 격변했다. 적면포창이 터진 직후 당시 쇼군 역시 같은 병으로 급사했는데, 후계를 이을 도쿠가와 가문의 남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에미츠의 유일한 딸이 쇼군을 임시 대리하고 이에미츠의 유모 가스가노 츠보네가 섭정을 맡아 ‘여인천하’가 시작된다. 이어 다음 쇼군 도쿠가와 이에츠나(4대)부터 도쿠가와 이에하루(10대)까지 도합 150여년 동안은 정식으로 여성 쇼군이 일본을 통치하게 된다. 또한 그동안은 현대의 국무총리라 할 로쥬(老中)도 여성이, 각 지방의 영주인 다이묘(大名)도 여성이 맡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오오쿠>는 이런 방식으로 가짜 역사를 실제 역사에 방불하도록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일본 역사의 여러 굵직한 사건들이 남녀 역전의 설정 속에서 재해석된다. 오랫동안 이어진 도쿠가와 막부의 쇄국정책이 전쟁에 동원할 남성 인구가 적다는 것을 외국에 숨기기 위해서였다는 해석이 대표적이다. 또 실제로 후사가 많지 않아서 후계자를 찾는 것이 어려웠던 도쿠가와 가의 사정을 쇼군이 여성이었기에 임신과 출산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해석해낸 것은 실로 그럴 듯하다. 그 속에서 11대 쇼군 이에나리는 적면포창에 걸리지 않은 도쿠가와 가의 남자로, 마땅한 도쿠가와 가의 여성이 없는 가운데 즉위한, 150여년 만의 남성 쇼군이었다. 그간 정치무대의 소수자였던 남성에게 섭정인 ‘여성’ 하루사다가 내뱉은 “어디 남자가 정치를!”이라는 말은 그러한 (가상의) 역사를 배경으로 했을 때 자연스러운 말이 되는 것이다. 하루사다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남자는 “태어나는 족족 일이든 아이를 낳는 것이든 전부 여자에게 떠맡기고”, “그저 여자에게 들러붙어 아이만 만들 뿐”이어야 한다고.

이처럼 <오오쿠>에서 특히 주목할 것은 일본 연구자 김효진이 지적하듯 사회적으로 구성되는 성차인 젠더(gender)의 해체와 재구성이다. 만화 <오오쿠>는 ‘남성다움’과 ‘여성다움’에 대한 사회 구성원들의 인식이 특수한 조건 속에서 특정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엔터테인먼트이자 교과서라 할 만하다.

남자라는 이름만으로 종마 취급 받아

150년간 ‘자연스러웠던’ 여성의 우위를 해체하기 위해 <오오쿠>의 세계를 사는 사람들은 여러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150년 만의 남성 쇼군 이에나리가 ‘어머니’ 사후 남성 쇼군과 다이묘의 정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는 적면포창의 예방을 통한 남성 인구의 회복이라는 과학(의학)적 방식 외에도 외국 사례의 발견이 필요했다. “최근 읽은 해외 소식에 따르면 서구 열강 중 여자 군주를 모시는 나라는 드물고, 한 대에 그치는 게 대부분이라더구나.” 이와 함께 이에나리는 남성의 정치를 복원하기 위해 다이묘 역시 장녀가 아닌 장자 상속을 명하기에 이른다. 정치가 다시금 한쪽 성별에 의한 정치의 독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제도를 작동하는 것이다.

하지만 적면포창이 어느 정도 극복된 후에도 여성이 다이묘나 관직에 오르는 것을 단번에 막을 수는 없었는데, 150년 동안 이어진 여성 귀족에 대한 정치교육이 하루아침에 무위가 될 수 없는 까닭이다. <오오쿠> 13권의 주인공 격인 여성 당주 아베 마사히로는 병약한 장자 대신 가문을 이으며 쇼군의 재가를 받는 자리에 선다. 쇼군 이에나리는 상속을 예외적으로 허락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이라는 말로 자신의 정책을 씁쓸하게 정당화한다. “그대처럼 총명한 여자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가독(가장의 권리)을 물려받지 못하게 된 것도 시대의 흐름이라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마사히로의 답이 아름답다. “그렇다면 전에는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정치에서 경원시되고 종마 취급 받아온 유능한 남자들이 있었겠지요.”

스스로 소수자로서 정치에 나선 마사히로가 과거의 소수자들을 돌아봄으로써 쇼군 이에나리의 과거 입지를 헤아려 주는 현명하고 사려 깊은 답변이다. 더불어 어떤 성별도 그 성별을 이유로 정치무대에서 배제되거나 반대로 그 무대를 독점할 수 없다는 인식을 담고 있다. 이를 확장하면 하루사다와 이에나리를 비롯한 여러 인물들의 성차별적 발언에 대한 <오오쿠>의 비판으로까지 읽을 수 있다. 남자를 정치에 참여할 자격이 없는 종마로 대하는 하루사다도, 그런 어머니는 “비인간적이었고” (비인간적인 어머니에 대항한 계책으로 이에나리의 권위를 찾아준) 아내는 자신을 “오랫동안 속여 왔”다며 “여자는 믿을 수가 없”고, “끔찍”하다는 이에나리도 틀렸다.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며 그 자체로 당연하거나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성별도 성 정체성도 그 사람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가능성을 제한하고 한 가지 역할을 강제할 기준이 될 수 없다. 상식 정도가 아니라 페미니즘이 인류에게 가르쳐준 공리다.

이 공리를 붙잡고 한국을 본다. 이른바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의 지금 한국에서 <오오쿠>를 다시 읽는 것은 여러 정리되지 않는 상황들을 이국의 가상역사 속에서 ‘과거로써’ 다시 만나려는 일일지 모른다. 성소수자를 차별할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에 대한 연대와 지지를 이단으로 몰아가는 어느 기독교단(들)의 행태도, ‘여성 대통령’을 자임한 박근혜의 정치 참사를 ‘여성 정치인’의 불가능성으로 환치하는 어처구니없는 인터넷 댓글도 곧 과거가 될 일이다. “어디 남자가 정치를!” 못지않게 “어디 여자가 정치를!”도 이상하다고 여기는 당신에게라면 이미 과거일 테지만, 사회는 다양한 인식을 지닌 사람들로 들어차 있다. 그래도 그런 당신이라면, 명절 제사상을 차릴 일꾼 혹은 종손을 낳을 도구로 ‘며느리’를 호명하는 일도, 여성 국회의원이 전체의 17%에 그치는 일도, 문화콘텐츠가 여성을 천편일률적으로만 그려대는 일도, ‘페미니스트’를 멸칭으로 부르는 일도 곧 과거로 만들어낼 것이다. <오오쿠>의 200년간을 지켜보다 보면 그런 미래가 한국에서도 눈앞에 닥칠 것만 같다.

만화로 본 세상

*참고문헌 김효진, ‘요시나가 후미의 <오오쿠>’ (<일본비평> 11호, 2014. 8.)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