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배트맨 킬링 조크」-평생을 ‘그림자’와 실랑이하며 사는 배트맨

배트맨은 자신의 ‘그림자’를 조커에게 투사하고 있다. ‘그림자’가 타인에게 투사되면 이유 없이 불쾌하고 꺼림칙한 감정을 느낀다. 유독 싫고 혐오스러운 누군가가 있다면 실은 내가 내 ‘그림자’를 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의 실수에 관해서 종종 놀랄 때가 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 당황한다. 알고 보니 그런 사람이었다며 실망한다. 앞뒤가 다른 사람이라는 비난이 따른다. 미디어나 여론의 뭇매는 가혹해 안쓰럽다. 알려진 인물이 아닌 경우에도 비슷한 상황은 발생한다. 뜻하지 않은 부모의 모습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믿었던 친구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창피하기도 하다. 존경스러워야 할 스승의 뒷모습에서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신뢰를 하루 아침에 잃은 한 개인은 허둥대게 마련이다.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이해하기도 받아들이기도 어렵지만 동시에 수습을 해야 한다. 불행히도 평범한 우리 모두 그런 처지가 될 수 있다.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칼 구스타프 융은 ‘그림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그림자’는 자아로부터 배척되어 무의식 속으로 밀려난 열등한 인격을 뜻한다. ‘내가 의식하는 나’와 비슷하면서도 반대되는 ‘나의 어두운 측면’이다. 위에서 말한 그런 실수들은 한 개인의 ‘그림자’가 만들어낸 결과로 볼 수 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는 짙은 법이라, 자아의 의식이 한쪽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할수록 ‘그림자’ 역시 반대편에서 그만큼 힘을 키우게 된다. 정의와 도덕을 평생 부르짖던 이가 한순간 부정한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는 경우를 본다. 원래 추악한 그런 사람이었다고 손가락질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도 무엇에 홀렸는지 모르겠다며 어리둥절해 한다. 뒤늦게 자책해 보지만 되돌릴 수 없다. ‘그림자’가 자아의 경계를 뚫고 제 목소리를 낸 사건이다.

앨런 무어의 「배트맨 킬링 조크」 중 한 장면. / 세미콜론

‘그림자’ 조커와 배트맨은 어떻게 다른가

평생을 ‘그림자’와 실랑이 벌이며 살아가는 한 인물을 떠올린다. 만화로도 영화로도 사랑받는 캐릭터 배트맨이다. 배트맨은 현실 속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줄 수 있을까. 악역 조커의 탄생을 알려주는 작품으로 유명한 <배트맨 킬링 조크>를 살펴보자.

만화는 배트맨이 아캄 수용소에 갇혀 있는 조커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배트맨은 고백한다. “요즘 들어 부쩍 생각이 많았지. 네놈에 대해서, 나에 대해” “결국 우리는 서로를 죽이고 말 거다”라고. 배트맨은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그림자’인 조커를 의식해 왔다.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자아가 틈을 보이는 순간, ‘그림자’는 한 발 앞서 행동을 한다. 이미 조커는 아캄 수용소를 탈출했다. 자아가 최선을 다해 ‘그림자’를 외면하고 무의식 속에 억누르고 살지만, 그림자는 결국 길을 찾아낸다. 억압과 통제를 벗어난 그림자는 조커처럼 사고를 일으킬 것이다.

정신을 차린 배트맨은 집으로 돌아와 온갖 데이터를 뒤지며 조커의 정체를 알아내려 애쓰지만 소득은 없다. “두 사람이 서로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그토록 싫어할 수 있는 걸까?” 독백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배트맨은 자신의 ‘그림자’를 조커에게 투사하고 있다. ‘그림자’가 타인에게 투사되면 이유 없이 불쾌하고 꺼림칙한 감정을 느낀다. 유독 싫고 혐오스러운 누군가가 있다면 실은 내가 내 ‘그림자’를 투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어떤 사람의 작은 실수나 행동이 지독하게 거부감이 들고 몸서리치게 싫다면 역시 내 ‘그림자’를 타인에게서 나도 모르게 발견하고 있지 않은가 고민해 보아도 좋겠다.

‘그림자’ 조커와 배트맨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른가. 만화에서는 악당 조커의 과거사를 그린다. 아무도 웃기지 못하는 삼류 코미디언은 임신한 아내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 강도의 길잡이로 한몫을 챙겨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려는 날, 아내는 누전사고로 죽는다. 코미디언은 아내의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강도들의 협박에 길잡이를 하다가 배트맨에게 쫓긴다. 화학약품 속에 빠진 그는 녹색 머리카락에 기괴하게 웃는 표정을 가진 조커로 돌변한다. 배트맨은 어떤가. 만화 <배트맨 킬링 조크>에 나오지는 않지만 다른 영화와 만화를 통해 우리는 알고 있다. 악이 횡행하는 도시 고담에서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 브루스 웨인은 겉은 백만장자이나 비뚤어진 내면을 가진 성인으로 자랐다. 박쥐 굴에 은둔하는 신경쇠약 직전의 남성은 아무리 봐도 평범하지 않다. 조커에게는 박쥐 분장을 한 배트맨이 공포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배트맨에게는 어둠 속에서 부모를 겨눈 총구가 두려움과 복수의 대상이 되었다.

배트맨은 정의와 평화를 부르짖는다. 악당과 범죄조직을 소탕하는 것이 자신의 운명이라 생각하고 어둠에서 일하는 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배트맨은 불면의 늪에 빠져 밤새 CCTV를 보며 우울한 고담시를 감시하는 편집증 환자처럼 보인다. 스스로 모든 사건에 개입하여 해결하려는 과대망상에 빠진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한 번 범죄자의 낙인이 찍힌 사람들은 늘 공포에 떤다. 언제 어둠 속에서 망토 입은 괴인이 나타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칠지 모르기 때문에. 범죄 해결을 위해 배트맨에게 인권이나 법의 테두리는 없다. 부모를 앗아간 세상을 저주하고, 부모를 죽인 범인을 고담시의 모든 범죄자로 설정하고 그저 화풀이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자’도 우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자

오히려 조커는 배트맨과 자신의 관계를 잘 알고 있다. 조커의 ‘그림자’가 배트맨이기도 하니까. 질문한다. “네놈 역시 운수 나쁜 날을 겪었고, 모든 게 바뀌었던 거지. 그게 아니라면, 네놈은 도대체 왜 그 날아다니는 쥐새끼 옷을 차려 입고 설치는 거지?” 조커 역시 운수 나쁜 하루 사이에 벌어진 일로 한순간에 악의에 찬 미치광이가 되어버린 자신을 보며 세상을 저주한다. 고담 시민을 모두 자신과 같은 처지로 만들고자 범죄행각을 벌인다. 우선 조커가 착수한 것은 배트맨의 ‘의식적 자아’일지도 모르는 고든 경찰서장을 납치하는 일이다. 서장을 신체적·심리적 한계상황까지 밀어놓고 자신처럼 스스로를 놓아버리기를 기대한다.

‘그림자’ 조커는 자신을 몰라주고 자신을 방해하는 배트맨이 섭섭하다. 계속 질문한다. “네놈은 도대체 왜 그런 거지? 도대체 뭣 때문에 그렇게 된 거지? 혹시 악당에게 여자친구를 잃기라도 했나? 어떤 강도한테 형제가 난도질당하기라도 했나?” 자신은 이 세상이 암울하고 끔찍한 농담임을 깨닫고 미쳐버렸음을 인정하는데 왜 배트맨은 같은 경험을 해서 이 지경이 되었으면서 아직 인정을 하지 않고 세상을 비웃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조커는 세상을 구하는 배트맨의 ‘그림자’가 세상을 파괴하는 자신임을 간파하고 있다.
다들 알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고든 서장도 배트맨도 스스로를 놓아버리지는 않았다. 조커도 배트맨을 죽이지 못했다. 최후의 순간 겨눈 총구에서는 “찰칵 찰칵 찰칵” 외치는 장난감 깃발이 나왔다. 그림자는 나의 일부니까 죽일 수 없다.

이제 배트맨도 조금은 상황을 이해하는 듯하다. “반드시 이런 식으로 끝낼 필요는 없어. 나로선 도대체 무엇 때문에 네놈 인생이 일그러져 버렸는지 알 수 없군. 누군들 알겠나? 어쩌면 나도 비슷한 일을 겪어봤겠지. 어쩌면 내가 도울 수도 있겠고. 함께 노력해 볼 수도 있지. 네놈에게 재활치료를 받게 할 수도 있고. 네놈은 더 이상 그런 극단에 서 있지 않아도 된다는 거다. 혼자 있어야 할 필요도 없고.” 조커에게 제안한다. ‘그림자’를 부정하거나 억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듬어 안고 달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느끼는 모습이다.

배트맨이 이후 ‘그림자’와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다른 만화를 통해 확인할 일이다. 조커를 다시 수용소에 집어넣고 없는 존재로 잊고 산다면 조커는 결국은 수용소를 탈출해서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무시당한 우리의 ‘그림자’가 그렇게 하듯이.

만화로 본 세상

지질하고 못난 우리의 ‘그림자’도 우리의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기억하고 산다면 스스로와 타인을 난처하게 할 일은 좀 줄어들지 않을까. 자신에게서 발견하는 타인에 대한 근본 없는 혐오심에 대해서도 덜 당황할 수 있으면 좋을 터이고.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