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미술의 한 지류에는 정치·사회적 폭력과 경제적 억압, 권력의 횡포를 그리거나 인간의 이중성과 현대라는 거대한 덩어리가 생성시킨 유무형의 사건들을 도발적인 재료와 애증의 시선으로 압축해 표현한 그림들이 수없이 많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오줌통 속에 넣고 찍은 사진으로 자본주의에 침몰한 종교에 일침을 가한 안드레 세라노의 ‘오줌 예수(침례)’(1987), 인종차별과 편견에 맞서는 저항을 담고 있지만, 흑인 성모 마리아에 코끼리 배설물을 발라 신성모독이라는 비난에 직면해야 했던 크리스 오필리의 ‘성모 마리아’(1996), 학살의 역사에 드리운 비극과 추악함을 스산한 리얼리즘으로 표현해 온 고트프리트 헬른바인의 ‘Epiphany’ 연작 등이 대표적이다. 이외에도 자아의 탐구와 깃털처럼 가벼운 인간 생사의 관념을 예술과 사회적 통념의 틈으로 옮긴 마크 퀸의 조각을 비롯해 정치·경제·사회 영역을 넘나들며 각종 악덕과 부조리를 폭로해온 좌파예술가 한스 하케의 다양한 작업들, 종교와 인간을 향한 진한 애정을 제식을 통해 재현하고 있는 빈 행동주의 작가인 헤르만 니치의 극적인 퍼포먼스들, 유머러스함 속 날카로운 역설이 빼어난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설치작품들, 중국 정부의 탄압과 통제에 강하게 항거해온 중국 혁명 예술가이자 반체제 인권운동가인 아이웨이웨이의 탈장르적 작업 등도 도발적인 조형언어로 어두운 세상의 민낯을 묘사한 사례로 꼽힌다.

안드레 세라노의 1987년 작 '오줌 예수(침례)'. Walter Otero Gallery 소장.
이들 작품에는 지독하게 욱신거리는 실존의식과 삶을 지배하는 비자율적인 것들과 마주한 페이소스가 투영되어 있으며, 부조리함이 넘치는 광기와 폭력의 시대가 적나라하게 적시되고 있다. 예술과 반예술의 경계에서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진단이 배어 있고, 예술과 종교, 기득권을 비판하면서도 현대인의 불안과 광적 편집증, 정신적 외상과 같은 병리적 현상에 대한 치유의 가치마저 추출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서구의 얘기다. 정작 비극적 환경과 위기가 낯설지 않게 출현하는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자가 노동자로 살아가기조차 버거운 현실도, 선출되지 않은 자본권력의 철없는 후예들이 가하는 유무형의 폭력이 만연한 사회에 대한 독설도, 독재의 망령과 검열 앞에 무기력한 군상들을 대리하고 변호하며 투쟁하는 예술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살과 피가 식어버린 시대에 관한 절망적 인식, 억압과 강제가 만연한 권력에 대한 분노, 우울함과 괴리감을 유발하는 사회구조에 대한 발언마저 좀처럼 접하기 쉽지 않다. 대신 자리하고 있는 건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치부하는 기성의 무책임함, 철이 지난 서양미술의 뒤꿈치에 머물면서도 창의인 양하는 시각적 기묘함, 희박한 전위가 얄팍한 대중적 안위로 대체된 예술 확장 속에서 자의식을 상실한 채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 표상들이다.

크리스 오필리의 1996년 작 '성모마리아'.
그런 점에서는 소위 미술계 식자들의 행태도 매한가지다. 말로는 부조리하고 기이한 세상에 대해 한탄하지만, 그 기이함을 짓누르는 비평의식을 발견하긴 힘들다. 되레 기괴함의 원인이기도 한 문화권력과 자본권력에 종속된 채 제도적 사다리를 수여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한 것에 감사해 하는 것이 다반사요, 주류지향과 보신주의에 빠져 미래를 꿈꿀 수 없기에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후배 세대의 암울한 현실을 회피하기 바쁜 게 사실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사회에서 예술이 과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고찰할 시점이 왔음을 가리킨다. 당대 한국 미술계 지식인들이 진정 제 몫을 다하고 있는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홍경한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