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1만4000년을 살아남은 ‘이야기’

제롬 빅스비의 원작을 바탕으로 2007년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올 겨울 최용훈 연출에 의해 무대에 올려진 연극 <맨 프롬 어스>는 여러 가지 면에서 참 ‘경제적’인 작품이다. 무려 1만4000여년의 시간과 유럽, 인도, 미국 등 전 세계를 공간적 배경으로 다루면서도 극중 무대는 주인공 존 올드맨의 거실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다. 또 단 몇 명의 등장인물만으로 이 이야기는 전 인류가 겪은 가장 충격적인 사건과 급격한 변화를 무대 위에 생생하게 펼쳐낸다. 실제로 이 작품은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 “초저예산으로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SF를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전체적인 스토리는 단순하다. 10년간 재직하던 대학에 갑자기 사직서를 낸 역사학 교수 존 올드맨의 거실에 같은 대학의 동료교수들이 모여 송별회를 연다. 갑작스레 떠나는 이유를 집요하게 묻는 동료들에게 올드맨은 자신이 신석기 시대부터 1만4000년 동안 죽지 않고 살아온 존재라고 이야기하며 늘 10년 단위로 이동해왔다고 밝힌다. 고고학, 미술사학, 생물학, 인류학, 심리학 교수로 이루어진 존의 동료들은 각기 자신의 전문지식에 기대어 존의 의견을 반박하지만, 존은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내고 반신반의하던 동료들은 점점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에 심취한 이들의 상태가 심각해지자, 존은 모든 것이 지어낸 이야기였다고 밝히고 이들을 떠나보낸다.

연극 <맨 프롬 어스> | 올라운드엔터테인먼트 제공

‘1만4000년을 죽지 않고 살아온 존재’라는 테마가 얼핏 SF나 미스터리 장르를 떠올리게 하지만, 사실 이 작품은 이를 통해 무엇보다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인문학적 이야기이고, 또 한편으로는 ‘이야기’의 힘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메타스토리적인 작품이다. 사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존이 정말 죽지 않고 1만4000년을 살아남은 존재인지 아닌지, 그가 진실을 말한 것인지 거짓말을 한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1만4000년을 살아왔다는 이 불멸의 존재, 무한의 시간 앞에서 우리 인간이 어떤 생각과 태도를 보이는가이며, 이는 극중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는 교수들을 통해 드러난다.

이 작품은 ‘이야기’의 힘과 매력을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맨 프롬 어스>는 처음부터 끝까지 존 올드맨이 들려주는 ‘이야기’로만 이루어져 있다. 처음엔 반신반의했던 등장인물들이 불멸의 존재를 믿게 되는 것도 존 올드맨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홀려서이고, 무대를 바라보던 관객 역시 어느 순간 올드맨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존 올드맨을 ‘사람’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란 상징으로 바라보게 되면, 사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역사에 대한 스토리텔링이 된다.

연극 <맨 프롬 어스> | 올라운드엔터테인먼트 제

문화내시경

먼 옛날, 인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냈던 선사시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1만4000년의 시간 동안 ‘이야기’는 태어나고 자라나고 변화해왔다. 때론 이곳의 이야기가 저곳으로 옮겨가 변하기도 하고, 때론 상상이 덧보태져 신화나 전설이 되기도 하면서 이야기는 결코 죽지 않은 채 1만4000년을 살아왔다. ‘이야기’는 극중 등장하는 인류학, 고고학, 생물학, 심리학, 그리고 예술 모두와 관련이 있으면서도 이들 모두를 아우르는 영역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야기의 진실 여부는 오로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만 유효할 뿐,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극중 ‘동굴’ 같다고 묘사되는 존 올드맨의 어두운 거실 난롯가에 모여 1만4000년의 역사를 듣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은 그 자체로 먼 옛날, 이야기가 생겨나고 전해지던 그 시절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2월 22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