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 50년전

여든을 넘긴 작은 체구의 노 화가는 몸이 불편하다. 손도 떨리고, 귀도 어두워졌다. 흰수염에 백발이 성성하다. 노 화가는 “오른손이 흔들리면 왼손으로 받친다. 필력이 젊을 때와는 다르지”라며 무심하게 말한다. 하지만 세월의 흔적이 오롯한 노 화가의 육신과 달리 그가 평생 일관되게 그려온 그림 속 물방울들은 여전히 영롱하다. 노 화가 자신의 온 몸과 마음, 모든 것을 담아낸 물방울들은 지금도 캔버스를 훅 불면 똑 떨어져 내릴 듯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물방울 작가’ 김창열 화백(84)이 화업 50년을 정리하는 개인전을 연다. 8월 29일부터 9월 25일까지 갤러리 현대(서울 사간동)에서다.

회고전 성격이 짙은 작품전은 그를 상징하는 물방울이 처음 캔버스에 탄생한 1970년대 작품부터 최신작까지 40여점이 망라돼 선보인다. 2009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초기작부터 신작까지 시대별로 물방울 작품의 변천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 첫 전시회다.

자신의 작품 앞에선 김창열 화백. | 갤러리 현대 제공

1960년대 후반 미국 뉴욕에서의 김 화백 작품은 거칠고 강렬한 추상이었다. 고향을 등지고 남쪽으로 피난온 한 청년에게 각인된 전쟁의 고통·상처·분노가 강렬한 색채, 굵은 선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의 작품에 물방울이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다.

“1972년쯤인가, (형편이 어려워) 파리 근교의 마굿간에 살 때다. 세수도 밖에서 물을 받아 하는데, 어느 날 아침 대야에 물을 담다가 옆에 뒤집어 둔 캔버스에 물방울들이 튀었다. 캔버스 위에 뿌려진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아침 햇살에 비쳐 찬란한 그림이 되더라고….” 물방울 그림은 1972년 살롱 드 메에 입선했고, 이후 본격적인 물방울 시리즈가 시작됐다.

1980년대엔 마대의 거친 표면에 물방울을 그리기도 했고, 한자나 색점·색면이 배경에 등장했으며, 물방울도 투명했던 70년대와 달리 색채가 들어가 입체감이 도드라지기도 했다. 90년대엔 인쇄체의 천자문 한자를 배경으로 삼았으며, 2000년대엔 높은 채도와 형태의 변주로 좀 더 화면 전체가 화사해진다. 지난 40여년 물방울의 바탕이나 배경은 바뀌었지만 특유의 영롱함과 투명성은 변하지 않았다.

김창열의 <물방울 ENS801>, 캔버스에 오일, 91×73㎝, 1980년. | 갤러리 현대 제공

평생 물방울에 매달려 온 김 화백에게 물방울은 어떤 의미일까. “물방울은 무색무취다. 투명하고, 뜻도 없다. 본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내 욕심은 그 물방울을 가지고 그림을 만드는 일이었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다. 화가들은 착각이 심한데, 어떤 때는 ‘(물방울을 그리면서) 영혼과도 닿을 수 있겠구나’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저렇게 그리다보면 도에 이르는 것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물방울이 지겹지 않느냐”는 물음에는 “지루하지도, 지겹지도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말한다. 천자문의 한자를 배경으로 삼은 것은 “어린시절 천자문을 배웠다. 아직 향수로 남아 있다. 또 글자 자체가 뜻이 있는 데다, 조형성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김 화백에게 “어떤 화가로 기록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너절하지 않은 화가로 남았으면 한다”고 강조한다. “있으나 마나 한 화가가 아니길 바란다”는 말이다.

문화내시경

제주도는 현재 부지를 확보, 김창열 미술관 건립을 추진 중이다. 김 화백은 작품 200여점과 화구 등을 기증했다. 김 화백은 한국전쟁 당시 1년 6개월간 피난생활을 한 제주도를 평소 “제2의 고향”이라고 말해 왔다.

<도재기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