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길]시골 시인 문병순, 시비를 세우는 마음

사실 나는 남도여행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남도에는 세 가지 금기사항이 있기 때문이다. 보성(정확히 말하자면 벌교)에 가서는 주먹자랑 하지 못하며, 순천에 가서는 인물자랑 하지 못하고, 여수에 가서는 돈자랑 하지 못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이 세 가지밖에 없는 나로서는 남도길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웬걸, 이번에는 한 가지가 더 늘었다. ‘장흥에 가서는 글자랑 하지 말라’다.
- ‘유성문의 로드포엠-누군들 따뜻한 남쪽마을이 그립지 않으랴(뉴스메이커 698호)’ 중에서

전라남도 장흥이 기어이 ‘문학특구’(정식 명칭은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되었다. ‘특구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하고많은 특구가 있지만 하필 문학특구라니! 문학이 어느 지역만의 특산물일 수도 없고, 흔히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특구의 목적으로 보더라도 문학이야 대표적인 저부가가치 상품이니 좀 뜬금없다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다른 한 편으로 생각하면 앞으로 문화콘텐츠의 시대라고도 하고, 진부해서 별로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보통의 특구들보다야 차별성이 있으니, 그 역발상이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게다가 글쟁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노력이 가상타 못해 눈물겹기까지 한 것이다.

시인은 최근 블루베리 삽목에 공을 들이고 있다.

장흥이 문학특구가 된 것은 이곳이 우리 가사문학의 발원지이기도 하고 현대문학 최대의 작가 배출지로서 유서 깊고 방대한 문학 유산을 지니고 있는 데 연유한다. 지금만 해도 송기숙, 한승원, 이청준 같은 대가에다 시인 김영남, 소설가 이승우와 같은 중견이나 신예들, 김석중 같은 재향작가까지 장흥 출신의 글쟁이는 이 고장 안팎으로 차고 넘친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화가 김선두와 같은 유명 무명의 예인들, 비록 이 고장 출신은 아니지만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비롯해 ‘서편제’와 그 후속작 ‘천년학’ 등 꾸준히 이 고장 출신 작가의 작품을 이 고장을 무대로 영상화해온 임권택 감독까지 거드니, 장흥 어느 구석 예향(藝香)과 맞닿아 있지 않은 곳은 없다. 보성 소리의 본산도 원래는 장흥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에서 화순을 거쳐 장흥으로 들어오는 관문 격인 장평면 봉림리에 ‘계명성(鷄鳴聲) 문학찻집’이 있다. 황토벽에 기와를 얹은 집 모양새야 그렇다 치고, 이 집 한켠에는 그리 넓지 않은 부지에 갖가지 형상의 시비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 만한 또는 잘 모르겠는 여러 시인의 시가 새겨져 있는데, 그 중 ‘문병순’이란 시인의 이름이 여럿 눈에 띈다. 그가 바로 이 찻집의 주인이며 작은 시비공원을 조성한 주인공이다.

문병순 시인(72)은 이곳 장평에서 태어나 ‘나 어릴 때’ 잠깐 서울살이를 한 것을 빼고는 줄기차게 고향을 지켜왔다. 시인 말고 그의 원래 밥벌이 직업은 나무 농사로, 지금도 찻집 인근에 대평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겉으로 보아선 농사꾼이 훨씬 더 어울리겠다 싶은 면모지만 이제껏 무려 8권의 시집을 내고 700편에 이르는 시를 발표했다고 하니 시인으로서도 결코 예사로이 볼 일은 아니다. 평가야 나름이겠지만 그의 시 또한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여준다.

하늘이 파란 눈을 뜨고 내려다보고 있는데/옥희는 적삼을 벗어 울타리에 걸어놓고 하는 말이/시암가에 비단개구리도 암놈 아랫도리 휘어감고/헤엄치고 다니더라!//하기야 음력 칠월은 오죽이나 더운 계절인가/엉겁결에 등물이 끝나고 옷을 입으려는데/한쪽 바짓자락을 걷어올린 할아버지 다리가/장독 사이로 보이지 않는가//주섬주섬 옷을 걷어쥐고/굴뚝 옆 기둥 뒤에 숨으려는데/낮잠 자던 두꺼비를 밟아 기절초풍한 나머지/할아버지!/하고 소리치고 말았으니//그 소리를 듣고/어느 놈이냐 하며 달려와/웃통을 벗은 손녀를 보자 담뱃대로 내리치려는 순간/할아버지도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한 대 맞았더라면 머리통 속으로 마알간 하늘이/쏟아져 들 뻔했다 - ‘비단개구리도 암놈 아랫도리 휘어감고’ 전문

농장일을 돕고 있는 둘째아들 광웅씨를 시인은 ‘농민운동가’라고 부른다.

시인의 할아버지는 동학 접주였다. 그러고 보면 장흥의 석대들은 동학농민혁명 최후의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시인의 아버지를 비롯해 가족들이 화전을 일구고 농사를 지어 벌어들인 돈은 알뜰히도 할아버지 뒷자금으로 들어갔다. 그랬으니 집안 살림이야 말할 필요도 없었다. 8남매 장손이었던 시인은 뒤늦게 학교를 다녔다. 열여덟인가 열아홉 때 시인은 중학교 졸업을 1년 앞두고 서울로 도망쳤다. 고향에 남아 있어 봐야 농사나 짓고 살 게 뻔했는데, 체격이 왜소한 자신으로선 도무지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시인은 서울 인근 구로에서 ‘양아치’들과 어울려 다니며 미군 부대 근처에서 미군이 버리는 물건을 줍기도 하고 고철을 수집해 팔기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어떻게 인편에 중학교 교장선생님이 “학교는 안 다녀도 좋으니 졸업장은 타라”고 간곡히 부탁하더란 말을 전해 듣고는 마지못해 고향으로 내려왔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시인은 아버지에게 붙들려 농사를 지으면서 결혼까지 했다. 어차피 그리 된 마당에 자기만의 농사나 지어보자고 시작한 것이 그때까지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토마토 농사였다. 하지만 3년간 내리 죽을 쒔고, 아버지는 아예 자식 취급을 안했다. 그래도 아내가 몰래 해준 밥 먹고 다니며 매달린 끝에 4년째부터 크게 재미를 봤다. 2년 만에 그때로서는 거금인 60만 원을 벌어 농지 30두락을 사 턱 하니 아버지께 내놓았다. “아버지, 이제 원풀이하십시오.” 아버지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래, 네가 돈을 벌어버렸으니 이제부터는 다 네 맘대로 하거라.” 그때부터 시인은 집안의 가장 노릇을 했다.

소설가 김석중씨는 시인이 속해 있는 별곡문학동인회 회장이다. 시화 전시 및 낭송실은 지역 문인들을 위한 공간이다.

1977년부터 시인은 나무 농사에 뛰어들었다. 밤, 감, 매화 같은 유실수를 접목해 전문 묘목장사로 나섰다. 면허도 없으면서 덜컥 1t 트럭을 사들여 전국을 누비고 다니기도 했다. ‘밤나무 고접묘목’이라는 냉해 방지기술을 개발해 산림청의 인정을 받기도 했다. 그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빚을 내본 적이 없다.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을 해본 적도 없다. 그렇듯 순박하고 진솔한 농투성이의 삶을 살아오던 그가 왜 갑자기 문학이라고 하는 늦바람이 나버린 것일까.

학교를 다닐 때 시골 자연 속에서 어줍지 않은 시상에 잠겨본 적은 있지만 자신도 다 늦은 나이에 시를 쓰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2002년 <한맥문학>에 시가 당선하면서 소위 ‘등단’이란 걸 했다. 같은해부터는 내친 김에 더 나아가 아예 ‘계명’이라는 자신의 아호를 딴 문학찻집을 열고 사비를 들여 시비공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지금껏 세운 시비가 120여 기, 3억 원이 넘는 돈이 들어갔다. 누구 하나 제대로 알아주는 이 없어도 그는 마치 나무 농사를 짓듯 시비를 세워나갔다.

계명성(鷄鳴聲). 새벽닭이 울면 날이 밝아온다. 시인이 기다리는 아침은 어떤 것일까. 그에게 시란 어떤 것일까. 시인은 말없이 빙그레 웃을 뿐이다. 옆에 있던 소설가 김석중씨가 ‘진정한 행복, 소박한 기쁨’ 아니겠느냐고 조심스레 덧붙여도 여전히 덤덤히 웃을 뿐이다. 하긴 시심에 무슨 이유 따위가 있을 것인가. 정남진 장흥의 그 맑은 바다와 유장한 산세 속에 스며 있는 문기(文氣)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조차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돌이 아무리 못났어도 시만 좋으면 그 시비는 아름답다. 돌 속에 묵묵히 묻혀 있는 시심, 그것이 바로 시골 시인 문병순이다.

사람의 길

새들이/강을 건너갔다/건너간 새들은 갈대밭에 숨었다는데//마리 수를/세어두지 않았다/거기에는 발톱을 곧추세운/살쾡이가 살고 있다고 한다//강을/다시 건너오기 시작하고/한 마리가 되돌아갔는데/친구를 구하러 간 모양이다//건너가고 건너오고/갈대밭에 남은 새 한 마리/이제는/어둠이 짙어지니 강물만 깊어가고… - ‘강을 건너간 새들’ 전문

<글·사진 유성문 편집위원 rotack@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