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이야기]뉴트로 열풍 중심엔 X세대가 있다

90년대 문화 콘텐츠 ‘추억 소환’… 더욱 막강해진 복고의 위력

먼지 쌓인 LP 음반들을 다시 꺼내 들을 수 있게 됐다. 직장인 전창욱씨(46)는 중국계 전자상거래 사이트에서 주문한 턴테이블을 며칠 전 받았다. 새 기기에 올릴 첫 음반을 무엇으로 고를까 고심한 끝에 가수 이문세의 7집 <옛사랑>을 골랐다. 전씨가 가지고 있던 이문세 LP 음반 중에선 가장 최근의 것이기도 했고, 당시 이문세에 열광했던 누나와의 추억을 떠올리게 했던 음반이기도 해서였다. 다행히 중국산 저가 턴테이블이지만 LP만의 음색을 감상하기엔 손색이 없었다.

4인조 댄스그룹 ‘환불원정대’의 ‘돈 터치 미’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 / MBC

신구세대의 절묘한 조합 ‘환불원정대’

“전문적으로 감상하는 건 아니니까 비싸고 음질 좋은 기기를 사는 대신 LP판을 걸어놓고 바늘을 올리는 그 과정을 다시 맛보고 싶었던 거죠.” 그동안 집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던 음반 중에는 중고시장에 내놓으면 새로 산 턴테이블 가격보다 더 비싸게 팔릴 것들도 몇장 있다. 전씨 본인이 사춘기 시절 직접 샀던 대중가요 음반부터 부모님이 모아뒀던 1980~1990년대의 팝 음악까지, 돌아가는 턴테이블을 따라 흘러나오는 음악들이 묘하게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킨다. ‘추억 소환’을 너무 실용적으로 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전씨는 “가수의 진짜 노래는 아낀 돈으로 콘서트장 가서 들으면 된다”며 “점점 나이가 들어가니 왕년의 우상들도 같이 늙어가는 모습을 보는 게 재미있다”고 말했다.

LP는 X세대, 또는 그 이상 연배 세대의 추억 소환용 아이템만은 아니다. 새롭게 재해석된 복고를 뜻하는 ‘뉴트로’ 유행이 갈수록 위세를 떨치는 현상을 대변하는 물건이기도 하다. 9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았던 여성 연예인 엄정화·이효리가 MZ세대(밀레니얼+Z세대)를 대표하는 화사·제시와 함께 결성한 4인조 프로젝트 그룹 ‘환불원정대’가 신곡 ‘돈 터치 미’로 음원순위 1위를 차지한 일만 봐도 그렇다. X세대의 선두주자와 이후 세대가 만나 만든 신곡은 세계적인 음악인 반열에 올라선 방탄소년단마저 제치고 위용을 떨쳤다. 이 ‘돈 터치 미’가 LP로도 싱글 음반을 발매한 것까지 보면 신구의 조합이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읽을 수 있다.

지난 4월엔 가수 신승훈의 30주년 앨범 LP판이 예약판매를 시작하자마자 품절되기도 했다. 신승훈은 X세대의 전성기인 90년대 가요계를 휩쓸며 한국 가요 음반 사상 최대 누적 판매량인 1700만장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디지털 음원의 시대가 오며 4년 넘게 CD를 포함한 실물 음반을 내놓지 않았던 신승훈처럼 왕년의 대형 가수는 물론 방탄소년단 같은 현재 인기 절정인 가수들까지 너나없이 뉴트로 마케팅에 나설 정도로 문화산업계에서 복고의 위력은 더욱 막강해지고 있다.

이 흐름의 중심에는 X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X세대라는 세대 호칭이 빠르게 퍼지던 90년대 새로운 대중문화와 소비유행을 선도하던 세대였다는 특징이 이들 X세대가 현재의 신세대인 MZ세대와 함께 여전히 높은 소비 영향력을 미치는 현실과 맞물린 셈이다. X세대가 과거 소비하던 대중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출판만화 시장 역시 비슷한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허영만·이상무·신문수 등 이들 세대가 유소년기에서 청년기에 걸쳐 즐겨보던 출판만화 복간판들이 잇따라 재출간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한국만화 <제7구단> <달려라 꼴찌> <20세기 기사단> 등의 복간이 이어지고 있다. / 김태훈 기자

‘한국만화걸작선’이란 이름으로 절판된 고전 만화를 선정해 복간하는 프로젝트는 소년용 명랑만화를 대표하던 신문수 화백의 <도깨비 감투>를 비롯해 지금은 작고한 이상무 화백의 야구만화 <달려라 꼴찌> 등 X세대 이후로는 한동안 잊혔던 작품들을 다시 현대의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는 “웹툰의 인기가 전 세대를 아우르고 있지만 출판만화는 특유의 작법과 서사 전개, 읽는 방식 등에서 웹툰과는 다른 출판만화만의 특색과 매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이 매력에 빠졌던 세대가 향수를 느껴 다시 찾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고전 출판만화 복간 프로젝트

만화로 보면 웹툰이라는 새로운 물결이 이미 시장을 장악했고, 대중음악 역시 디지털 음원과 유튜브 등 영상공유 사이트를 통해 음악과 영상을 동시에 감상하는 등 변화가 밀어닥친 와중에도 고전적인 콘텐츠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이유로 X세대 문화가 꽃피던 90년대의 문화적 상황을 지목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과 홍콩 등의 영화·음악 같은 문화산업 콘텐츠가 실시간으로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했고, 90년대 후반 들어선 음지의 경로를 통해 유통되던 일본 대중문화까지 개방되면서 말 그대로 국내 문화계에서도 세계화의 세례를 본격적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현재 한류 전파의 선두에 선 K팝도 이러한 세계적 유행에 동참하는 동시에 전문적인 음악 매니지먼트 체제가 마련되면서부터 이 시기 원형을 갖추기 시작했다. 힙합과 뉴잭스윙, 레게, 하우스 등의 장르가 국내에서도 댄스음악의 인기를 선도했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으로 가요계 전반에 번진 뮤직비디오 열풍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변화의 시초를 알렸다. 1995년 개국한 엠넷이나 KMTV 같은 케이블TV 채널은 보는 맛이 있는 댄스음악뿐 아니라 정통 발라드 가수들의 음악까지 영상 및 방송과 결합시키는 결과를 이끌었다. 90년대 가요계 변화를 몸소 경험한 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싱어송라이터든, 아니면 철저히 작·편곡과 보컬, 댄스를 분업화하는 식이든 기획사가 사전에 인재를 발굴하고 키우는 방식이 나타난 것은 90년대 연예계의 대표적인 변화였다”고 말했다.

‘온라인 탑골공원’이라 불릴 정도로 90년대 X세대의 문화 콘텐츠를 추억하는 세대가 인터넷에서도 고유한 흐름을 이끄는 현상은 특히 대중음악계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유튜브 화질을 144P로 낮춰서 보면 최신 아이돌 가수 영상도 그 시절 감성으로 볼 수 있다”는 식의 기상천외한 조언이 나오는 것 역시 현재의 대중문화가 당시와 코드를 공유하고 있어서 가능한 셈이다. 김현수 문화평론가는 “유독 90년대의 가요가 최근 다시 소환되는 데엔 당시 문화계에서 문학은 전통적인 영향력을 서서히 잃어가던 시기라는 점, 드라마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활동하는 탤런트 개인의 캐릭터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대비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국내 음악산업이 한류를 바탕으로 빠르게 성장하는 배경에 X세대 출신 프로듀서들이 힘을 발휘하고 있어 90년대의 감성이 은연중에 녹아 있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본다”고 분석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