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 과감히 탈피 ‘전혀 새로운 개념과 안목’으로 신제품 개발
이화여대 통섭원에서 참석자들이 자유스럽게 대화하고 있다.
'깊은 우물을 파기 위해 여럿이 함께 넓게 파자.’
최근 학계를 넘어 정계·재계 등 전 사회적으로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통섭’의 개념을 설명할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학문에서 개념 정립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개념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그 학문연구의 방향성과 정체성, 목표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학문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식의 대통합’이라 불리는 ‘통섭’이라는 용어는 간학문적 혹은 학제적(Inter-disciplinary), 다학문적(Multi-disciplinary), 범학문적(Trans-disciplinary)이라고도 불린다. 한마디로 여러 분야의 담장과 경계를 허물어 새로운 지식과 가치를 만들자는 취지다.
휴대전화에 생물학 응용한 ‘모프’
통섭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을 연결하고자 하는 통합학문 이론이다. 이러한 생각은 우주의 본질적 질서를 논리적 성찰을 통해 이해하고자 하는 고대 그리스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두 관점은 그리스 시대에는 하나였으나, 르네상스 이후부터 점차 분화되어 현재에 이른다.
통섭의 어원은 1840년에 윌리엄 휘웰이 ‘귀납적 과학’이라는 책에서 ‘Consilience’란 말을 처음 사용했는데, 설명의 공통 기반을 만들기 위해 분야를 가로지르는 사실들과 사실에 기반한 이론을 연결함으로써 지식을 통합하는 것을 뜻한다. 이후 통섭이란 말은 최근 에드워드 오스본 윌슨의 1998년 저서 <통섭, 지식의 대통합>을 통해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윌슨의 제자인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가 윌슨의 책을 번역하면서 한국에 통섭의 개념을 본격적으로 알리기 시작했다.
통섭이라는 단어는 성리학과 불교에서 이미 사용해온 용어로 ‘큰 줄기를 잡다’라는 뜻을 지닌다. 최 교수는 “‘Consilience’를 설명하는 단어를 찾기 위해 사전을 뒤지다가 원효대사가 화엄사상을 설파하면서 많이 사용했다는 ‘통섭’을 인용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통섭이라는 말에 대해 반발하는 학자도 적지 않다. 상지대 최종덕 교수는 통섭이 마치 학문 간 동등하고 상호적이며 양방향적 관점의 합일로 오해하게 하고 있으나 원래 윌슨의 개념은 인문학이 자연과학에 흡수되는 통합을 의미한 것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시인 김지하씨는 ‘통섭’에 대해 에코파시즘의 대표 브랜드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통섭 개념에 ‘비(非)호감’을 표시하는 학자들 사이에 윌슨의 통섭은 생물학제국주의이고, 다른 학문에 대한 생물학의 폭력적 점령이며, 법칙 없는 일원론일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현실이다.
통섭의 개념 논쟁이 학계에서 아직도 진행 중이라면 산업계에서 ‘통섭’은 이미 화두를 떠나 실용화된 지 오래다. 기업에서 통섭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아닌 제품과 기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과감히 버리고 ‘전혀 새로운 개념과 안목’으로 무장한 신개념제품들을 출시하기 위해서다. 고정관념을 깨고 새로운 개념과 안목을 제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편적 지식이 아닌 복합적 사고와 통찰력이 필요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기반으로 한 상상력과 창의력이 필요하고, 21세기 디지털경제 시대에 맞게 글로벌 감각이 필요하다. 이런 ‘넓고 깊은’ 사고 유형은 한 종류, 혹은 한 가지 분야에만 안주해서는 얻을 수 없다. 다양한 학문 분야를 아우르고, 혹은 전혀 이질적인 생각과 관습을 더 높은 차원에서 바라볼 줄 아는 시각, 즉 ‘통섭의 관점’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노키아가 개발한 미래형 휴대전화 모프(Morph). 상황에 따라 모양과 색깔이 바뀌는 이 휴대전화는 생물학을 응용함으로써 통섭을 멋지게 적용했다고 평가받는다. 모프는 상황에 따라 모양이 변할 뿐 아니라, 필요한 경우 색깔도 바뀐다. 또 펼치면 자판으로 사용할 수도 있고, 둘둘 말아 팔찌처럼 찰 수도 있다. 이 휴대전화를 어떻게 개발했을까. 노키아는 이 모프를 개발하기 위해 카멜레온의 보호색 기능,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거미줄의 원리를 응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를 바탕으로 플렉시블 트랜지스터(flexible transistor)라는 새 기술을 적용하기도 했다. 최첨단 기술에 생물학의 기본원리를 차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신기술과 디자인에만 의존하지 않고, 생물학이라는 전혀 새로운 분야의 특성을 원용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업이 원하는 통섭의 한 사례다.
2007년 타임지가 선정한 ‘올해의 상품’에 선정된 도마뱀로봇 ‘스티키봇’(Stickybot). 미국 스탠퍼드 대학 김상배 연구원이 오랜 고민 끝에 만들어낸 역작이다. 그는 한 번 달라붙으면 절대 떨어지지 않으면서 발걸음을 옮길 때면 매우 사뿐하게 움직이는 도마뱀의 발바닥에서 영감을 얻어 유리벽을 수직으로 올라갈 수 있는 로봇을 개발했다. 로봇공학에다 도마뱀에 대한 생태연구가 합쳐져 도마뱀 로봇이 탄생한 것이다.
이런 로봇 도마뱀은 사실 기술로만 보면 새로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서로 다른 두 학문 영역의 경계를 가로질러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한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그것을 실현해낸 점이다.
강철섬유는 거미줄서 착안
지금 기업은 이런 안목을 제시하는 제품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 다른 새로운 발상과 사고의 방식’이 필요한데, 통섭이 그 기반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허다하다. 찍찍이로 불리는 벨크로(Velcro)는 먼 곳으로 이동하기 위해 동물의 털에 들러붙도록 진화한 식물의 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벨크로는 의류,·신발 등에 다용도로 활용되고 있다. 또 태양전지는 식물의 잎을, 강철섬유는 거미줄을 인간이 흉내내어 만들었다. 미국에서는 ‘통섭(Consilience)’이라는 이름의 와인과 통섭이라는 이름을 채택한 컨설팅회사까지 생겼다.
이밖에 통섭을 모태로 한 예는 수 없이 많다. 일본의 신칸센은 물총새의 일종인 킹피셔의 주둥이를 모태로 만들어졌으며, 돌핀 보트는 돌고래의 몸통을 흉내냈고, 흰개미탑을 모방한 ‘가우디성당’도 대표적인 자연 모사의 예다.
이처럼 산업계는 신제품 개발, 신사업 발굴 등 모든 분야에 통섭의 개념을 활용하고 있다.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SK텔레콤으로부터 전혀 새로운 개념의 휴대전화 공동개발을 제의받아 작업 중이다. 한국의 휴대전화 제조 기술은 이미 세계 최고 수준에 도달해 있으므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4년여 전부터 미래기술연구회를 열고 있다. 이 모임에서는 물리학·행정학·경영학·화학·기계공학·애니메이션 등 아무런 연관이 없을 것 같은 이질적인 분야의 학자와 삼성 임원들이 매달 한 차례씩 모여 토론한다고 한다. 참석자는 각자 전공 분야를 알기 쉽게 설명하거나 최신 흐름을 발표하는 방식으로 모임을 진행한다. 외부 인사를 초빙해 토론을 벌일 때도 있다. 이화여대 통섭원 의생학연구센터에서는 CJ와 함께 식품분야에서 연구를,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화장품과 관련된 공동연구를 수행 중이다. 산업계가 이처럼 통섭이란 개념에 매달리는 것은 통섭이 상상력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팔방미인형 ‘통섭형 인재’ 필요
로봇도마뱀 ‘스티키봇’, 모프(왼쪽).
그런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재가 필요하고 어떤 인재를 양성해야 하는가. 학문에서의 통섭이란 학문 간 경계 없이 서로 가로질러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기업경영에 접목한다면, 기업에 필요한 통섭적인 인재는 ‘경계를 넘나드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기업이 요구하는 인재는 과거의 한 우물만 파는 전문가가 아니라 다른 분야의 지식에도 능통한 인재, 팔방미인형 인재, 즉 ‘통섭형 인재’를 필요로 한다.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은 경영학ㆍ경제학ㆍ자연과학ㆍ공학ㆍ심리학이라는 학문의 한 굴레에 갇히지 않고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시도를 하기 위해 자신이 속해 있는 기존의 영역을 과감히 벗어날 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학문 간 영역 파괴를 말하는 통섭이론은 기업의 채용 패턴에도 접목되어 기존 전공영역을 파괴하는 ‘초영역 인재’의 채용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근 기술신용보증기금은 기존 틀에서 벗어나 기술과 금융을 함께 꿰뚫는 인재가 필요함을 강조했다. 기술신용보증기금은 우선 공학박사 출신을 영입한 뒤 금융 마인드를 접목시키겠다며 신입사원 채용 때 공학박사 학위자 15명을 채용했다.
삼성생명에는 의사자격과 변호사 자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보상직원 외에도 자격보유자, 의사 출신 보험설계사 등 다양한 이색 인재들이 포진하고 있다. “갈수록 지능적이고 복잡해지는 보험 사기에 대응하기 위해 ‘의료’와 ‘법률’을 함께 꿰뚫는 ‘퓨전형 인재’가 필요하다”는 것이 회사 측 설명이다. 스타급 펀드매니저로 통하는 모 투신운용사의 한 팀장의 전공은 신문방송학이며, 우수 벤처기업을 발굴하는 데 일가견이 있다는 한 창투사의 IT투자팀장은 공대 출신이다. 그는 금융과 회계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채용됐다. 산업은행에서 파생금융상품의 일종인 ‘스와프 거래’를 맡고 있는 한 직원은 기계항공공학부 출신이다. 이처럼 최근 금융계는 경제경영이나 법학 전공자 외에 공대 출신을 적극 영입하여 상경계 마인드에 공학 마인드를 접목시키고 있다.
디자인업계에서 통섭은 컨버전스라는 이름으로 이미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 올해 10월 9~29일에 열릴 예정인 서울디자인올림픽 2009에도 통섭의 바람은 거세다. 이 기간 중에 열리는 컨퍼런스에는 ‘혼류와 통섭(Interflow and Consilience)’이라는 주제 아래 전 세계 디자인 주역들이 서울에 모여 세계 디자인의 현재와 미래를 논하는 국제디자인교류의 장이 마련된다. 디자인 측면에서 통섭을 적용한 신제품은 전혀 새롭고 창의적인 제품을 내놓는다.
나이키와 애플은 서로 손잡고 나이키 신발에 아이팟 기능을 합친 제품을 내놓았고, 한경희 스팀청소기는 전기포터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의 스팀과 걸레를 합치면 엎드려서 걸레질하지 않고 진공청소기로 청소하듯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였다. 즉, 전기 포터+걸레의 만남이다. 전자제품 중에서도 아트 제품이라고 불리는 냉장고에 예술 작품을 입히는 것, 이런 것은 소위 ‘디자인 경영’이라고 하는데 디자인 경영도 통섭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다. 옷에도 예전 디자인 문양을 같이 넣어서 디자인하는 경우를 ‘아티젠’이라고 하는데 현대미술계의 거장으로 불리는 앤디 워홀이 즐겨 사용하는 방식이라고한다. 예술 분야에서 통섭을 실천한 예다.
통섭형 CEO 누가 있을까
왼쪽부터 칼리 피오리나 전 HP 회장, 스티브 잡스 전 애플사 CEO, 안철수 카이스트 석좌교수. 칼리 피오리나 전 휴렛팩커드 회장은 “나는 경제학이 아니라 중세철학에서 비즈니스에 대한 분석력을 키웠다. 중세가 르네상스 시대로 이행한 것에서 디지털시대의 도래에 대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의 전공이 경영학이 아니라 역사학과 철학이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애플의 CEO인 스티브 잡스 역시 그의 창의력의 많은 부분은 종교적 직관에서 나왔다고 한다. 문학ㆍ역사ㆍ철학과 같은 인문학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이것만큼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빌 게이츠라 불리는 안철수 박사도 대표적인 ‘통섭형 인간’으로 분류할 만하다. 의사 출신인 안 박사가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해 기업을 일군 것도 본질적으로는 학문 간을 넘나드는 창의적 관심에서 나온 산물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업경영도 인간의 문제라고 본다면 인간을 이해하고, 인간을 움직이고, 인간을 만족시키는 것. 그것이 경영의 본질이다. 그래서 기업경영에서는 인간을 이해하는 통섭을 통해 인간을 다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스스로 CEO가 아닌 CIO(Chief Idea Officer)로 불리기를 원하는 제일기획 김낙회 대표이사도 통섭의 중요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대표적인 CEO이다. 김 대표는 기업 비전의 화두를 통섭에서 찾는다. 김 대표가 기업에 적용하는 통섭경영의 태도는 새로운 기회와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더 개방적이고 유연한 관점을 먼저 취하는 것과 그런 다음 나의 역량과 외부에서 받아들인 역량을 활용해서 더 포괄적인 사업역량을 펼치면, 그것이 바로 기업의 통섭이 되는 것이라고 설파한다. 그는 기업도 통풍이 잘 되어야 한다는 말을 즐겨 한다. 집이나 사무실도 바람이 잘 통해야 좋은 공간이듯이, 구성원 간에도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져야 문제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생명인 광고회사에서 소통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포스코 정준양 회장은 기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문리(文理)통섭형’ 인재가 많아져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정 회장이 취임 후 신입사원을 1년 가까이 제철소 생산 현장에 배치해 제철소에서 다양한 업무를 경험하게 하는 것도 통섭의 중요성을 조직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다. LG전자의 미래를 책임진 서초동 R&D캠퍼스에는 엔지니어와 함께 디자인 조직도 같이 근무한다. LG전자가 곳곳에 흩어져 있던 R&D와 디자인 부서들을 한 곳에 모아놓은 이유는 ‘통섭’을 꾀하기 위해서다. 배원복 LG전자 디자인경영센터장은 “요즘엔 R&D에서 D가 디벨로프먼트(Development)가 아니라 디자인(Design)이라고 할 정도로 디자인 중요성이 커졌다”며 “R&D 부서와 디자인 부서가 한 몸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영기획과 상품전략 파트 등에서 일해온 배 디자인경영센터장이 디자이너들을 이끄는 디자인 책임자가 된 것도 통섭의 연장이다. |
| 통합과 융합, 통섭의 차이점 통섭이라는 단어를 만든 이화여대 최재천 교수는 “통합은 ‘통합 신당’, 융합은 ‘기술 융합’처럼 쓰이고, 통섭은 김치나 장 등 발효식품 같은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한다. ●통합(Unification, Integration) ●융합(Syncretism, Convergence) ●통섭(Consilience) |
<김태열 기자 yolkim@kyunghyang.com>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