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실에서]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의 ‘재벌질’

조현아 대한항공 전 부사장을 보면 아침드라마에서 주인공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악역이 떠오릅니다. 이기적이고, 안하무인이며, 돈이면 다인 줄 아는 캐릭터로 그려지곤 하는 안타고니스트 재벌 딸 말입니다. 지난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땅콩 회항’ 사건은 드라마와 현실의 경계를 헷갈리게 했습니다. 주인공이 재벌 딸이었고, 그 내용과 역할 역시 드라마 속 악역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오히려 현실이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했습니다. 땅콩을 봉지째 갖다 주자 서비스 매뉴얼도 모른다며 비행기를 돌려 사무장을 내리게 했다는 스토리는 전 세계 언론들이 대서특필할 정도로 흥미진진한 요소들로 가득찼습니다. 드라마를 생중계로 보는 느낌까지 들었으니까요.

땅콩 회항 사건이 연말 드라마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다면 조 전 부사장은 최소 여우조연상은 받아야 할 겁니다. 그 어떤 배우들보다 ‘악역’을 실감나게 보여줬으니까요.

조 전 부사장에 대해 ‘슈퍼갑질’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지만 저는 그 용어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직장의 상하관계를 갑을관계로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램프를 떠난 비행기를 회항시켜 승무원을 내리게 할 수 있는 갑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오너 딸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점에서 ‘슈퍼갑질’보다 ‘재벌질’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벌질’은 재벌이 자신의 분이나 화를 참지 못하고 그냥 폭발시켜 버리는 것입니다. 맷값을 주고 전 노조원을 야구방망이와 주먹으로 폭행한 모 재벌 2세를 비롯,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재벌 인사들은 한두 명이 아닙니다. ‘재벌질’이라는 카테고리에 넣고 생각하면 이들의 행태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땅콩 회항의 본질 역시 조 전 부사장이 분을 참지 못하고 성질을 부린 것입니다. 분을 참지 못하는 것, 이건 재벌가 패밀리들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입니다.

재벌질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조 전 부사장은 부사장 자격으로 비행기에 탄 것이 아닙니다. 비행기에 오르는 순간 그도 한 명의 승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조 전 부사장은 부사장, 오너 딸로 승무원들을 윽박지르고, 비행기까지 돌립니다. 250명의 승객들도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사무장이 태블릿 컴퓨터의 비밀번호까지 생각해내지 못했다니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비행기 문을 닫는 순간 비행기 운항의 모든 책임을 지는 기장도 오너 딸의 서슬에 눌려 기수를 돌립니다. 그때 조 부사장은 이렇게 비행기와 승무원, 기장, 그리고 승객까지 완벽하게 사유화해버립니다. 이 순간 이들은 조 부사장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이자 종, 하인이 되고 맙니다.

사과문도 코미디였습니다. 대한항공이나 조 부사장이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잘 모르고 있다는 것만 보여줬을 뿐입니다. 사과문의 요지는 ‘부사장의 문제제기 및 지적은 당연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와 승무원을 하기시킨 점은 지나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아니다’라는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대한항공이 오너 딸 눈치를 보며 보호에 급급하는 순간 대한항공 역시 사유화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글로벌 기업이라는 대한항공이 이 정도이니 오너 일가의 위세가 어느 정도일지 알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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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전 부사장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사람들에게 어떤 상처를 줄지에 대한 감수성이 없었습니다. 이 증상은 코골이와 비슷합니다. 코를 심하게 고는 걸 남들은 다 아는 데 자기만 모릅니다. 그러니 상황 판단을 못하고, 남의 괴로움은 알지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겠지요. 조 전 부사장이 보직만 사퇴하고 부사장직과 등기이사직은 유지했다가 여론이 악화되자 뒤늦게 사표를 제출한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기사 댓글 중에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글이 있었습니다. ‘승무원 교육 이전에 가정교육부터 시켜야 한다.’ 백번 옳은 말입니다. 아, 그런 게 있다면 말입니다.

<류형열 편집장 rhy@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