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박태환 ‘로마의 굴욕’

한국 수영의 희망 박태환이 로마에서 침몰했다. 세계선수권대회 자유형 400m와 200m에서 저조한 기록으로 결승에도 오르지 못하는 참패를 당했다. 한국인 최초의 올림픽 수영 금메달리스트로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던 그가 침몰한 이유를 놓고 이런저런 말이 많이 나돈다. 하지만 그는 이제 스무살이다. 더 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스무살 청년의 ‘성장통’을 이번 한 번으로 끝낼 수 있도록 어른들의 손길이 필요한 시점이다.

로마발 충격이었다.
근원지는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박태환(20·단국대)이었다.
박태환은 최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2009년 수영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예상 밖으로 극심한 부진에 시달렸다.

주 종목 자유형 400m에서는 예선 탈락했다. 기록(3분46초04)도 베이징올림픽 금메달 때 자신이 세운 아시아 기록(3분41초86)에 4초 이상 뒤졌다. 자유형 200m도 잘못했다. 자존심 회복을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결승행 티켓조차 손에 넣지 못했다.

물에 빠진 박태환 자유형 400m는 박태환이 2007년 세계선수권과 2008년 올림픽에서 모두 금메달을 딴 종목. 그래서 예선 탈락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자유형 200m도 박태환이 베이징올림픽에서 마이클 펠프스(미국)에 이어 은메달을 획득한 종목이었다. 1년 전에 박태환이 온 국민에게 안겨 준 기쁨과 희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씁쓸한 뒷맛뿐이다. 지난 1년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던 선수가 1년 사이 평범한 선수로 전락했을까.

최대 패인은 훈련 부족 진정한 땀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이승엽, 박지성 등 슈퍼스타들이 한결같이 마음에 담고 있는 교훈이다. 그런데 최근 1년 동안 박태환에게는 이것이 없었다.

박태환은 최근 “수영장이나 수영복 문제를 떠나서 다른 선수들이 무척 열심히 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 대회가 열린 곳은 야외 수영장. 야외 수영장에서는 좋은 기록이 나오기 힘들다. 그리고 박태환은 다른 선수들과 달리 첨단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이런 두 가지 사실은 박태환이 부진한 데 대한 핑계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박태환은 훈련 부족이 주요 패인이었음을 간접적으로 시인했다. 그의 말대로 훈련을 열심히 하면서 턴 동작, 잠영 등 단점을 보완했다면 메달 획득 여부를 떠나 기록은 좋아졌어야 했다. 이 모두 박태환이 19세 어린 나이에 올림픽 챔피언이 된 뒤 목표의식을 잃은 결과였다. 목표의식이 부족하면 동기부여가 안 되고, 동기부여가 안 되면 게을러질 수밖에 없다.

박태환은 이제 어느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는 존재로 컸다. 훈련하기 싫으면 쉬었고, 연예인을 만나고 싶으면 만났다. SK텔레콤 스포츠단 전담팀도, 그를 발굴해 키워낸 노민상 국가대표팀 감독도, 심지어 부모조차 쓴소리를 하지 못했다. 목자 없이 온갖 유혹이 도사리는 넓은 초원에 내던져진 양 꼴이었다. 박태환은 지난 1년 동안 갈 길을 잃은 채 이곳저곳을 헤맸다.

박태환에게 스승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강한 지도자가 필요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박태환은 그런 스승이 없었다.

전담팀은 지난해 10월에 결성됐다. 전담팀은 박태환 연봉 8억원(추정치)을 비롯해 전지훈련 비용, 전담팀 스태프 운영비 등으로 1년 동안 15억~20억원을 투자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을 전담하는 박사도 있었고, 박태환의 몸을 만져줄 마사지 스태프도 있었다. 그런데 정작 박태환을 가르칠 코치가 없었다. 출발부터 ‘무늬만 전담팀’이라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전담팀 스태프는 박태환의 비위를 맞출 뿐 그가 게으르거나 꾀를 부릴 때 야단치고 다그치지 못했다. 이번 대회 부진은 예고된 셈이었다.

사공만 많았다 왜 박태환을 가르칠 코치가 없었던 것일까. 사연은 2006년 도하아시안게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박태환은 3관왕에 오르는 등 메달 7개를 따면서 최우수선수(MVP)에 뽑혔다. 그런 그에게 흑심을 품은 어른들이 몰렸다. 그때부터 박태환 전담팀이 바뀌고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에서 친연맹파와 반연맹파 간에 노골적인 밥그릇 싸움이 벌어졌다. 보수 문제로 전담팀 코치가 계속 바뀌었다. 친연맹파와 반연맹파 간 폭행사고도 벌어졌다. 모두 ‘박태환을 소유하면 수영계를 쥐고 흔들 수 있다’는 정치적 노림수가 화근이었다. 박태환이 더욱 막강한 선수로 발전하도록 도와주기는커녕 그를 이용해 출세하고 돈을 벌려는 게 어른들의 음흉한 심보였다. 노민상 대표팀 감독이 “모두 어른들 책임”이라고 말한 이유다.

한 지붕 두 가족, 불편한 두 집 살림 상황이 이렇다보니 전담팀과 대표팀 간 관계가 좋을 리 없었다. 전담팀은 소위 돈을 낸다는 명분으로 모든 걸 도맡으려는 경향이 강했다. 그리고 사실상 속수무책으로 이런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대표팀 코칭스태프는 뒤에서 궁시렁대며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다. 양측 간 소통은 오랜 시간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고 올해도 마찬가지였다.

박태환은 올해 두 차례 미국 전지훈련을 갔다 왔다. 그런데 노 감독은 훈련 계획, 훈련 결과 등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받지 못했다. 노 감독은 “미국에서 박태환을 가르친 데이비드 살로 감독이 쓴 책을 읽고 박태환이 어떤 훈련을 받을지 간접적으로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며 답답해 했다. 미국 전훈을 마친 박태환은 약 40일 동안 태릉선수촌에서 노 감독과 훈련했다.

7월 26일 오전(현지시각) 이탈리아 로마 포로 이탈리코 메인풀에서 열린 남자 자유형 400m 예선에서 3위로 들어온 후 전광판을 바라보고 있는 박태환 선수. 자신의 주종목에서 예선탈락하는 아픔을 맛보았다. <연합뉴스>

이 과정에서 훈련의 연계성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박태환은 베이징올림픽 이후 장거리 훈련에 집중했다. 두 차례 미국 전지훈련도 장거리 능력 배양에 맞춰졌다. 그런데 대표팀에서는 단거리 스피드 훈련을 주로 했다. 박태환이 “대표팀과 전담팀 사이에서 힘들었다”면서 “파벌싸움이 너무 많아 마음고생이 심했다”고 토로한 이유다. 훈련의 초점은 흐려졌고, 박태환은 혼란스러웠다. 스승은 없었고, 사공만 많았다.

박태환과 같은 동시대 스타 김연아(19·고려대)는 달랐다. 김연아는 지금까지 브라이언 오서 등 전담코치진에게서 일관된 훈련을 받고 있다. 사생활은 어머니가 철저히 관리한다. 김연아에 대해서는 “광고를 너무 많이 찍는다”는 걱정스런 비판 이외에 사생활에 대한 잡음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그렇게 훈련에 집중했으며, 항상 좋은 성적을 냈다. “박태환이 김연아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올 수밖에 없다.

앞으로 3년, 길지만은 않다 박태환의 최종 목표는 2012년 런던올림픽 2연패다. 그의 나이는 이제 스무살로 발전 가능성이 충분하다. 관건은 앞으로 얼마나 효과적으로 준비하느냐에 달렸다.

일단 박태환이 이번 대회 졸전으로 큰 자극을 받은 것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교훈이다. 관중석에서 불과 1년 전 자신에게 뒤졌던 선수들이 결승전에 나가 선전하는 것을 보는 그의 눈에는 후회와 독기가 서렸다. 운동은 흘러내려가는 물을 거슬러 오르는 것과 같다. 잠시라도 노를 젓지 않으면 제자리에 머무는 게 아니라 아래로 밀려나고 만다. 박태환이 그랬다. 그런 박태환은 이번에 정신을 차렸다.

이제 남은 것은 ‘원죄’를 안고 있는 어른들이 어떻게 박태환을 효과적으로 도와주느냐다. 이번 대회에서 드러난 지도자 부재, 훈련의 연계성 부족 등 주변 여건을 하루 빨리 개선시키는 게 절실하다.

전담팀은 박태환과 2012년까지 계약돼 있다. 좋든 싫든 앞으로 3년 간은 같은 배를 타야 하는 운명이다. 전담팀이 보여줄 향후 행보가 중요한 까닭이다. 전담팀은 “ 전담 코치를 선임하고 새로운 전담팀 운영 방안을 마련해 구체적으로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세계 정상급 지도자를 모셔라 핵심은 전담 코치 선임이다. 무엇보다 세계 정상 수준에 오른 박태환에게 기술적 지도를 할 수 있는 지도자여야 한다.

현실적으로 국내 지도자 중에서 전담 코치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전 전담팀 지도자였던 지도자들이 대부분 박태환과 관계가 껄끄럽다는 게 원인이다. 노민상 감독은 서울시청 감독과 대표팀 감독을 겸하고 있어 박태환을 전담으로 지도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박태환이 국내 지도자들을 얼마나 따를지는 미지수다. 고질적인 수영계 파벌 싸움이 다시 불거질 개연성도 있다. 결국 해외 지도자에게 무게가 쏠릴 수밖에 없다. 파벌 싸움에 지친 박태환에게도 좋은 선택이 될 것 같다.

관건은 국제적으로 지명도가 높고 실력있는 지도자가 과연 박태환 단 한 명만 보고 한국에 오겠느냐다. 그래서 또 다른 당근책이 제시돼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그의 이름을 딴 수영교실을 여는 등 박태환을 지도하는 것 말고 자신의 수영 철학을 펼칠 수 있는 또 다른 메리트가 필요하다는 의미다. 적잖은 추가비용이 들지만 SK가 재정이 넉넉한 곳이어서 다행이다.

박태환만 맡을 수 있는 적임자를 찾지 못하면 다른 세계 정상급 선수들을 지도하는 지도자에게 박태환을 함께 맡기는 방안도 괜찮다. 경쟁자들과 함께 훈련하면서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다는 부가적인 효과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고액 과외교사가 시험을 앞두고 벼락치기로 요령만 가르치는 식은 절대 안 된다는 점이다. 박태환에 대한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를 자신의 아들처럼 박태환을 돌봐줄 사람이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박태환이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따는 데 큰 도움을 줬던 체육과학연구원의 참가도 요구된다. 체육과학연구원은 올림픽 이후 전담팀과 대표팀 요구에 따라 박태환에게서 아예 손을 뗐다. 첨단 과학이 없이 메달을 딸 수 없다. 그게 기록 종목이라면 더욱 그렇고, 그 무대가 세계대회라면 더더욱 그렇다.

전담 코치가 선임되고 과학적 연구가 뒷받침되면 국내 수영계는 욕심을 버리고 박태환을 밀어줘야 한다. 박태환을 놓고 사리사욕만 채우려 할 때 어떤 재앙이 오는지 이번 대회를 계기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박태환을 놓고 또다시 욕심을 부리기에는 박태환이 안쓰럽다. 또 이제는 그럴 시간조차 없다.

마지막으로 팬들도 박태환을 올림픽 2연패를 이루기 위해 훈련에만 전념해야 하는 선수로 보기에 앞서 평범한 스무 살 청년으로 봐주는 아량을 갖췄으면 좋겠다. 박태환은 수영을 시작하는 어린 시절부터 품어왔던 인생 최고 목표인 올림픽 챔피언의 꿈을 불과 19세 나이에 이뤘다. 그리고 그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놀고 싶은 것도 많고, 가고 싶은 곳도 많은 나이다. 그런 그에게 주위 환경을 제대로 구축해 주지 못한 채 투혼, 투지, 희생만 강요하지 않았나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박태환은 지금도 강하고 앞으로도 더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닌 선수다. 이번 대회를 쓰디쓴 보약으로 삼고 초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물과 치열하고도 외로운 싸움에 돌입하면 그는 언제든 수영역사를 새로 쓸 수 있다.

19세 때 세계 정상에 올랐던 청년이 스무 살에 끝 모를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리고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비상할 준비를 하고 있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꺾인 날개를 치료하고 상처받은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손길이다. 그래야 스무 살 청년의 성장통은 이번 한 번으로 끝날 수 있고,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어른들의 실수도 되풀이되지 않을 수 있다.

<체육부·김세훈 기자 sh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