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수영 세계신기록, 참 쉽죠잉~

첨단 수영복 힘입어 연일 쏟아져… 스포츠 정신에 반하는‘기술 도핑’ 비판

남자 자유형 400m에서 세계신기록 수립과 함께 금메달을 딴 독일의 파울 비더만 선수가 착용한 첨단 수영복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연합뉴스>

툭 하면 세계신기록이다. 이젠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었다는 감동조차 반감됐다.

최근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2009년 세계수영선수권대회에서는 세계신기록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첫날 8개 종목에서 6개 세계신기록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신기록 행진은 거의 매일 이어졌다. 경영 32개 세부종목 중 절반 가량의 세계신기록이 바뀌었다. 10년 가까이 깨지지 않았던 해묵은 기록들도 결국 새 주인을 맞았다.

세계신기록은 인간의 한계가 확장됐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선수들은 찬사를 받고 팬들도 그의 초인적인 능력에 감동한다. 그런데 그런 세계신기록도 너무 자주 나오면 감동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더욱이 신기록이 선수 개인의 노력이나 운동 기술의 진보가 아니라 첨단 과학에 의존한 기록이라면 감동은커녕 의구심만 생길 수밖에 없다.

최근 2년간 국제 수영계가 그랬다.
지난해 1년 동안 수립된 수영 세계신기록은 무려 108개였다. 평균 20개 이하이던 예년에 비하면 5배 이상 늘었다. 남자 신기록 평균수명 372일, 여자는 160일이라는 분석은 힘을 잃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만 무려 25개 신기록이 나왔다. 올해 수립된 신기록도 40개 안팎이다.

부력 높이고 물의 저항 최소화

여자 접영 100m 우승과 함께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스웨덴의 사라 요스트렘 역시 첨단 수영복을 입고 출전했다. <연합뉴스>

이런 무더기 신기록은 첨단 수영복에서 비롯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수영대회가 선수들이 기량을 겨루는 대회가 아니라 첨단 기술이 만들어 낸 수영복의 경연장으로 변질됐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됐다. 선수도, 지도자도, 물론 과학자들도 모두 똑같이 인정하는 대목이다.

국제 수영계는 지난 2년 동안 치열한 수영복 전쟁을 치렀다. 지난해 2월 스피도가 미국항공우주국(NASA)과 함께 폴리우레탄 같은 첨단 재질로 만든 ‘스피도 LZR’ 수영복을 시장에 내놓은 게 도화선이 됐다. 결국 이 제품은 2008년 세계신기록을 양산하는 ‘슈퍼맨 옷’이 되면서 국제 수영복 시장에서 잇달아 대박을 터뜨렸다. 다른 업체들도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아레나가 ‘X-글라이드’ 등 비슷한 효과를 지닌 제품을 출시하면서 맞불을 놨다.

본질을 무시하고 불붙은 수영복 전쟁에 기름을 부은 것은 어이없게도 국제수영연맹이었다. 국제수영연맹은 수영복 제조업체 로비에 현혹돼 첨단 재질로 만든 수영복 사용을 승인했다. 냉각수 역할을 해야 할 연맹이 오히려 화를 자초한 꼴이었다.

선수들로서는 첨단 수영복이 국제공인을 받은 만큼 이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0.01초로 승부가 갈리는 대표적인 수영 종목에서 찰나의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수영복을 입지 않을 선수는 거의 없었다.

많은 선수의 몸에 과학을 입히자 신기록은 끝없이 터져 나왔다. 대표적인 예가 베이징올림픽이다. 당시 작성된 25개 세계신기록 중 23개가 첨단 수영복을 입은 선수들에게서 나왔다. 당시 금메달리스트 94%, 전체 메달리스트 89%가 첨단 수영복을 입었다. 이번 로마 세계선수권에 선수들이 입은 전신수영복은 대부분 이 같은 첨단 수영복이었다.

이번 대회 끝으로 첨단수영복 금지
첨단 수영복 효과는 크게 두 가지다. 부력을 높여 몸을 잘 뜨게 하는 것과 피부 표면을 매끄럽게 만들어 물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간이 물고기 부레를 달고 물고기 비늘까지 두른 셈이다. 부력이 좋아지면 몸을 띄우는 데 소요되는 에너지를 전진하는 데로 돌릴 수 있다. 게다가 몸에 닿는 물의 저항까지 줄면 같은 힘으로 좀 더 먼 거리를 갈 수 있다. 과학적으로 첨단 수영복은 기록을 2% 단축시킨다는 게 정설이다. 결국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과학의 발전으로 신기록 행진을 이룬 셈이다. 지금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레베카 애들링턴(영국)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첨단 수영복은 ‘기술 도핑’”이라는 목소리가 국제 수영계에서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노민상 한국대표팀 감독은 “사람의 몸을 물고기로 만들어서 경쟁을 하도록 하는 게 과연 스포츠 정신과 부합하는가”라며 “첨단 수영복은 수영계 정의를 위해 분명히 없어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일리노이대 조너선 더거스 박사는 인터넷 사이트 ‘스포츠사이언티스트닷컴’을 통해 최근 이어지고 있는 세계신기록 경쟁을 “무의미한 게임 같다”고 혹평했다.

수영계 질서를 넘어서 인간의 한계를 향한 끝없는 도전이라는 스포츠 본질까지 훼손시킨 첨단 수영복은 다행스럽게도 올해를 끝으로 철퇴를 맞는다.

국제수영연맹은 이번 로마 선수권대회에 앞서 “첨단 수영복을 허용한 대회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면서 “내년부터는 보통 직물로 만든 수영복을 입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올해 초 첨단 수영복 논란을 일으킨 100여 종의 수영복 사용을 금지시킨 뒤 이어진 추가 조치로 앞으로도 더욱 강력한 제재 방침이 공포될 것으로 보인다. 직물로 만든 수영복은 부력을 높이는 효과가 없다.

그리고 물을 대부분 흡수하는 재질이기 때문에 물의 저항을 그대로 몸에 전달한다. 세계 언론계는 “수영계 시계가 뒤로 돌려지더라도 수영은 첨단 도구가 아니라 인간 능력에 의존하는 종목으로 회복돼야 한다”면서 “첨단 수영복을 금지해야만 국제 수영계가 지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정글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며 환영 의사를 밝혔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세운 세계신기록은 어떻게 될까. 취소될까, 유지될까. 일단 유지되는 쪽으로 결론이 난 분위기다. 국제수영연맹은 첨단 수영복에 대한 금지 조치를 밝히면서 “과거를 바꿀 수는 없지만 미래는 바꿔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연맹 스스로 인정한 수영복을 입고 세운 기록인 만큼 일단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최근 2년 동안 세워진 세계신기록들이 영원한 세계 기록으로 남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결국 세계신기록을 깨기 위한 인간의 노력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아무런 성과 없는 도전이 되고 말지도 모른다. 인간 한계를 향한 끝없는 도전이 없는 스포츠는 생명을 잃는 꼴이다. 앞으로 이와 비슷한 일이 어느 종목에서도 재현돼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다.

<체육부·김세훈 기자 shkim@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