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극장전]인권영화 산실 ‘HRflix’를 아시나요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던 해 출발한 다른 영화제가 있다. 그 주인공인 서울인권영화제는 인권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영화제의 목적을 유지하며 건재하다. 그런 영화제가 인권영화 전문 온라인 상영 플랫폼 ‘HRflix’를 열었다는 안내 e메일을 받았다. 별도의 회원가입이나 서비스 이용 경비 없이 누구에게나 개방된 상설 플랫폼이다. “다양한 인권영화를 언제 어디서나”, “보다 많은 이들이 차별 없이 누릴 수 있도록” 영화제의 고민을 실천하겠다는 문구가 새 플랫폼에 새겨져 있다.

서울인권영화제 ‘HRflix’ 일정 알림표 / 서울인권영화제 제공

오픈 직후 ‘차별금지법 연내제정 쟁취 농성’ 연대 차원으로 노량진수산시장 상인들의 현실을 다룬 <시장으로 가는 길>, 11월 20일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맞이해 해외 사례를 소개한 2편의 다큐를 상영했고, 11월 29일부터 12월 9일까지 ‘BDS 연대 상영회’가 기획돼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처럼 작품을 나열하기보다는 주제별 큐레이션에 가까운 방식이다.

BDS 연대 상영회는 ‘HRflix’가 아니면 기획하기 힘들 주제다.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탄압에 저항하는 BDS 운동은 보이콧(Boycott), 투자 철회(Divestment), 제재(Sanctions) 등 약자를 조합한 비폭력 직접행동이다. 2005년 시작된 BDS 운동에 동참한 단체와 개인은 이스라엘 제품 불매 및 학술·문화교류 금지 활동을 펼치고, 이스라엘 정부는 2018년부터 BDS 동참 단체들의 입국을 금지하고 있다.

요즘 영화계에선 이미지 세탁을 일컫는 ‘핑크 워싱’이 화두다.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자국이 LGBTQ(레즈비언·게이·양성애자·트랜스젠더는 물론이고 무성애자·간성 아직 자신의 성정체성에 의문을 품은 사람까지 합해 부르는 단어)에 열린 유일한 국가라는 걸 부각하며 국제사회 평판을 개선하려 자원을 투입 중이다. 실제 성소수자 인권 존중보다 이미지 세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면을 규탄하고 불참을 독려하는 활동인 바, 국내외에서 이스라엘의 관련 영화제에 초청받거나, 이스라엘 정부가 프로그램과 재정을 지원하는 행사에 대한 논쟁은 뜨겁다.

기획전 상영작은 이 ‘핑크 워싱’ 문제를 고찰하는 작품과 함께 BDS 운동에 동참한 국내 영화인들의 작품으로 구성된다. 전자에선 2018년 암스테르담국제다큐영화제 단편 다큐상 수상작, 마흐디 플레이펠 감독의 <이름의 무게>가 돋보인다. 세계적 록그룹 ‘라디오헤드’에게 이스라엘 공연 중단을 요청하는 청원 연명을 놓고 감독과 친구 사이 대화를 기록한 10분여 단편이다. 일방적 정당성을 주장하지 않고 토론을 통해 BDS 운동의 의의와 한계까지 소개하는 사려가 돋보인다. ‘불매운동’ 논쟁에도 그대로 대입해볼 수 있다.
국내 연대작품 중 신승은 감독의 2019년 단편극 <마더인로>가 볼 만하다. 동성연인과 동거하던 집에서 연인 엄마와 맞닥뜨린 주인공이 겪는 실내극은 상황을 국면별로 분할해 팽팽한 긴장은 물론, 험난한 수용 과정을 상징하는 열린 결말에 이르기까지 코미디와 스릴러, 드라마를 오간다. 소통과 배려의 소중함이 부각되는 작품이다.

방구석 극장전

속속 상륙 중인 글로벌 거대 OTT 행보 속에 ‘HRflix’는 백사장 모래처럼 눈에 띄지 않겠지만, 때로는 대형서점 컬렉션보다 독립책방의 한권 추천이 더 와닿는 법이다.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인권과 관용에 관심 가진 이들의 관심과 활용이 이어지길 기원하며.

<김상목 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