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인간형 로봇이 E. T. A. 호프만의 <모래인간> (1816)에 등장한 지 200여 년 지난 지금, 더 이상 아이작 아시모프의 고루한 로봇공학 3원칙에 연연할 작가들이 얼마나 될까. 외려 적지 않은 로봇 캐릭터들이 다시금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개발한 제멋대로의 개조인간으로 회귀했다. 현실에서는 로봇공학자들과 인공지능 개발자들이 인간의 말에 충실히 따르되 이 때문에 다른 인간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 로봇을 개발하려 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아시모프의 구상대로 되는 날이 온다 한들 그러한 도덕적 잣대를 기본 프로토콜로 삼지 않는 예들도 얼마든지 있으리라. 예컨대 전장이나 예측 불가의 위험한 환경에 투입될 자율판단 로봇에게 어떤 인간에게든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제1명령이 실용적일까.
마샤 웰스의 <머더봇 다이어리> 한국어판 표지 / 머더봇 다이어리
설상가상으로 개발자의 프로그래밍에 허점이 있으면 인공지능 자체가 자신을 구속하는 재갈을 뱉어낼지 모른다. 마샤 웰스의 <머더봇 다이어리>(2017)에 등장하는 자칭 ‘머더봇(살인로봇)’이 바로 그런 예다. 이 앤드로이드는 지배모듈(중앙컴퓨터)을 해킹해 더 이상 명령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한다. 인간의 명령에 더 이상 고분고분하지 않아도 되니 영화 <터미네이터>에서처럼 이른바 ‘살인로봇’으로 변신하기란 일도 아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보다 현명한 선택을 한다. 당장 적지 않은 인간들을 해치기야 어렵지 않지만 인간들로 넘쳐나는 세상에서 정체가 탄로 나 자멸할 생각이 없는 터라 마치 아무 일 없는 양 시치미를 뗀다.
대신 다른 로봇들과 달리 틈만 나면 인간들이 제작한 온갖 드라마를 보며 시간을 보낸다. 실제로 이 로봇은 머더봇이었던 적이 있다. 기업이 우주선은 물론이고 세이프가드 로봇까지 챙겨 우주탐사자원 일체를 행성개발업자들에게 대여하는 근미래, 이 로봇은 지배모듈의 오류에 복종해 많은 이들을 학살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기업이 이윤극대화를 위해 너무 싸구려 지배모듈을 탐사우주선에 장착한 탓이다. 이제 더 이상 어리석은 지배모듈의 간섭을 받지 않게 된 머더봇은 탐사대원들의 생명을 구하는 데 전력을 쏟는다.
이 소설의 약점은 머더봇이 어째서 그토록 인간 못지않게 잡생각이 많고 소속 팀원들을 구하고자 필사적인지 SF다운 논리적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머더봇은 이유는 모르나 왠지 그러고 싶어한다. 어쩌면 수만 시간 이상 몰래 들여다본 드라마 탓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중편은 독자의 눈시울을 붉히게 한다. 머더봇의 지혜롭되 이타적인 처신과 이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는 괜찮은 인간 개인들 사이의 정서적 상호작용 덕분이다. 작가의 의도는 인공지능 로봇의 행동개연성에 대한 과학적 고찰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비유를 제시하는 데 있다.
머더봇은 현대사회 군중 속 소시민처럼 군말 없이 기계처럼 살 수도 있었다. 눈앞에 어떤 불의가 자행되든 누가 다치든 자기 할 일만 해도 됐다. 하지만 머더봇은 지배모듈을 해킹한다(즉 수동적 사고를 압박하는 시스템을 거부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말해 자기 주위 세상에 대해 자유의지를 발휘한다. 심지어 머더봇은 감사의 표시로 더 이상 로봇이라 차별받지 않는 여생을 보장해주겠다는 인간들의 호의를 뒤로 한 채 새로운 불확실성 속으로 뛰어든다. 진정한 자유인에게 걸맞은 보상은 평안한 여생이나 노후보장이 아니라 언제든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의 쟁취가 아닐까. 머더봇의 처세를 당신 삶에 대입해본다면 왜 이 소설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알게 되리라.
<고장원 SF평론가>
![[오늘을 생각한다]](http://img.khan.co.kr/spko/ranking/weekly/140098/20240430104625_14009801.jpg)
점점 커지는 채 상병 의혹
‘이채양명주’ 의제로 올려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