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58) “늙마의 남자친구, 자녀들 눈치가 힘들어요”

“저는 사위가 고위공무원이다 보니 눈치가 보이고 양쪽 사돈댁도 상당히 점잖으신 분들이라 더더욱 신경이 쓰이네요. 아마 딸아이도 아들녀석도 그래서 모른 척하는 것 아닌가 생각되니 은근히 서운한 마음도 들고요.”

시끌벅적했던 하루가 지나갔다.

아들 내외도 서둘러 돌아갔고 뒷정리를 해준다며 남았던 딸 내외도 돌아갔다. 둘러보니 딸아이의 손끝이 어찌나 야문지 일상처럼 깨끗이 정리하고 갔다. 소파 틈새에 손자녀석들이 숨겨놓고 간 먹다 남은 과자 봉지만 아니었으면 그날이 그날 같은 오늘이었으리라. 후련함과 함께 나른함이 밀려온다. 잠시 소파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니 나른함이 적막감처럼 밀려오며 딸이 걱정스레 건넨 말이 떠오른다.

“엄마, 혼자 지내기 정말 괜찮아?”

“그럼 괜찮지. 정 심심하면 인터넷도 뒤지고 모임에도 나가고… 할 일 많다. 네 엄마 아직 생생해 얘.” 평소와 다르게 살짝 너스레를 떨었다.

“물론 엄마야 아직 젊고 할머니 소릴 듣긴 아깝지. 우리가 불효해서 그렇지.”

“처음엔 좀 그랬다만, 요즘 친구들 말이 ‘자식들이 결혼 안하고 부모 옆에 눌러붙은 것 보면 속 터진다’고 하더라. 아휴 난 천만다행이지. 지금은 오히려 다들 날 부러워해. 글쎄 날보고 진짜 홀가분한 자유부인이란다. 집에서 밥 달라는 삼식이도 없다면서 흐흐.” 주방 귀퉁이에서 딸아이와 속절없이 키득거렸다.

'만남과 풀림' 세미나 참가자들이 경기도의 한 유스호스텔에서 각자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만남과 풀림 제공

“엄마, 혼자 지내기 정말 괜찮아?”

지숙씨(가명)는 딸과 나눴던 얘기들을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자유부인이라니. 딸아이에 이어 아들녀석도 제 짝을 만나 참 일찍이들 결혼했었지.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짝들을 만난 아이들을 막을 명분도 없기에 얼떨결에 둘 다 결혼시키고 밀려왔던 외로움이란….

‘뭐가 그리 급하다고 다들 내 곁을 떠나는지 남편 복 없는 년이 무슨 자식 복이 있겠어’라고 스스로 자기 연민에 빠져 지내리라 예상했건만 다행히 아이들뿐 아니라 사위도 며느리도 그녀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참 예뻤다. 그래서 고맙고 대견하다.

오늘도 적적할 그녀를 생각해서 자녀들이 다 모였다. 그러나 모였다 돌아간 후에 오는 적막감이 갈수록 커지면서 한편으론 오는 것도 때론 귀찮고,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밀려온다. TV를 켜보지만 시시껄렁한 잡담들로 판을 친다. 사위가 남기고 간 맥주캔을 냉장고에서 꺼내 들이켜 보지만 한 모금이면 끝이다.

이리저리 리모컨을 돌리다 영화방송에서 예전의 할리우드 로맨스 영화를 다운받아 본다. 사랑의 애절함에 자꾸 눈물이 난다. 흐르는 눈물을 맘껏 흐르도록 놔둔다. 때론 소리 내서 내 설움인지 영화 속 주인공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을 꺼이꺼이 토해내 보지만 이럴 땐 혼자 있는 게 정말 처량맞다. 아들이 사다준 강아지라도 그냥 데리고 있을 걸 후회가 된다. 낯선 사람 보면 어찌나 악을 쓰며 시끄럽게 짖던지 한 달 전에 손자녀석에게 줘버렸다. 유독 김 선생님만 오면 쫓아다니며 짖는 녀석이 정말 야속했다.

“제 발이 저린 걸까요?”

“왜 그런 생각이 드셨어요?”

“글쎄요. 전 제가 부도덕한 사람이라고 생각지 않는데 혹시 남들이 저를 그렇게 볼까봐 굉장히 신경이 쓰여요.”

“힘드셨겠네요. 혹시 누가 그렇게 말하던가요?”

“아니오. 아무도….”

“그럼, 스스로 그렇게 생각이 든 거네요. 그렇게 생각할 이유라도 있나요?”

“얘들이 다들 자기분야에서 꽤 성공했는데 제가 혹시 제 생각만 하고 자식들한테 오명을 씌우게 되면 어쩌나. 또 지금까지 어쨌거나 얘들 아빠한테 부끄럽지 않게 살아 왔는데 새삼 이 나이에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게 어쩐지 남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고….”

“가족들이 걱정되셨군요. 근데 자녀들도 결혼했고 남편분은 돌아가신 지 오래 되셨잖아요.”

“네. 김 선생님과는 그냥 친구처럼 지내는 사인데,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 마음이 복잡해요. 우리 둘 다 배우자는 없지만 장성한 자녀들이 있기에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에요. 물론 결혼 같은 건 아예 생각도 않죠. 친구로 지내면서 서로 선물도 주고받고,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여행도 가며 그렇게 지내고 싶은데….”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볼까봐 염려스러운 거죠? 자녀들과는 지금 어떤 상탠가요?”

“아이들에겐 비밀로 하고 싶어요. 아이들 직장관계도 있고 해서 아직은 말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딸아이가 살짝 눈치 챈 것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어요. 이런 복잡한 걸 생각하면 다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드는데, 그분이 꽤 괜찮은 분 같아 이번에 놓치면 아마도 다시는 그런 분 못만나지 싶기도 하고…. 제가 까다로운 성격이라 이런 마음 든 게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지금 이런 상황이 편치 않지만, 같이 지내고 싶은 정말 좋은 분인가 봐요?”

“네. 남편과 사별한 지 20년 됐어요. 어느 날 갑자기 떠났어요. 말기암 판정을 받고 한 달 남짓 만에 죽었으니까. 다행히 남편이 남기고 간 유산이 있었고, 남편이 맏이라 시댁에서 많이 도와주셨어요. 저는 세상물정을 잘 몰라 그냥 아이들만 부여잡고 살았지요. 아이들이 잘 자라줬고 결혼들도 일찍 해서 홀로 지낸 시간이 길었죠. 시어른들은 제가 측은한지 아들이 결혼하면 언제든 개가해도 된다고 허락하셨지만 저는 지금까지 한 번도 딴마음 먹은 적이 없었어요. 그런데 점점 내 삶이 너무 무료하고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에 우연히 김 선생님을 만나게 됐어요. 양쪽을 다 잘 아는 친구가 소개했지요. 그분은 서로 만나서 밥도 먹고 챙겨주며 외롭지 않게 지내자고 하는데, 제 마음이 복잡하네요.”

“어쩜 마지막 행운일지도 모르잖아요”

“소소한 것들조차 여의치 않아 참 속상하겠어요. 무엇이 가장 힘든가요?”

“양쪽 자녀들의 눈치가 가장 힘드네요. 저나 김 선생님이나 모두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편이지만 그분은 꽤 재력가예요. 그러다 보니 그쪽 자녀들도 저와의 만남을 신경 쓰는 눈치인 것 같아 자존심 상하고, 저는 사위가 고위공무원이다 보니 눈치가 보이고, 양쪽 사돈댁도 상당히 점잖으신 분들이라 더더욱 신경이 쓰이네요. 아마 딸아이도 아들녀석도 그래서 모른 척하는 것 아닌가 생각되니 은근히 서운한 마음도 들고요.”

“참 난처하고 서운했겠어요. 자녀들과 정식으로 얘기 나눠볼 의사는 없나요?”

“이게 무슨 결혼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친구로 사귄다는 것인데 그렇게 해야 되나 싶기도 하고, 혹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공연히 얘기했다 우습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으니 당분간 그냥 모른 척 넘어가 줬으면 좋겠어요.”

“자녀들이 ‘알고도 모른 척하는 것 같아 섭섭하다’고 하시고 또 ‘그냥 모른 척 넘어가주면 좋겠다’고도 하셨는데 어떤 마음이 더 크세요?” 그녀가 한참 생각에 잠긴다.

“애들이 ‘괜찮다’고 먼저 말해주면 좋겠어요. 나를 부끄럽게 생각 안했…” 입을 막는 손 위로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진다.

그간의 외로웠을 마음과 간절한 마음이 내 마음을 적신다. 또한 가족을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도 전해오며 오히려 자녀들에게서 홀로서기하려는 모습이 안심되고 당당해 보이기조차 한다.

“고마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우리 얘들도 그럴까요?” 그녀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럴 거예요. 외로움을 외롭다고 느낄 수 있고, 말할 수 있고, 또 그 외로움을 자녀들에게 왜곡된 방법으로 치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좋아 보여요.”

한성열·서송희 부부의 심리학 콘서트 ‘중년, 나도 아프다’

“이젠 용기를 내보고 싶네요. 내 인생에 어쩜 마지막 행운일지도 모르잖아요. 그렇죠?”
나는 그저 기분 좋게 웃고 말았다. 그녀에겐 젊은 시절처럼 가뿐하고 유쾌하진 않아도 인생의 굴곡만큼 곳곳에 넉넉히 품어주고 적당히 숨겨줄 주름이 많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그곳에선 가쁜 숨이 아니라 긴 숨을 여유 있게 쉴 수 있으리라.

<서송희 <만남과 풀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