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꼭두각시 저택>-조종당하는 삶은 편하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조종자가 알아서 처리해 주는 인생은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꼭두각시의 삶이나 조종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면 지금의 현실은 대본에 없는 일이어서 당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진료실 창 너머 바깥은 오늘도 시끄럽습니다. 매번 터져 나오는 새로운 소식을 소화하기도 버거운 날들이 이어지는데, 편안한 마음을 가지려는 시도는 부질없습니다. ‘너무 염려하지 말라’는 위로는 공허합니다. 정확히 상황을 이해해보려 애쓰지만 어렵습니다. 국민의 대표인 대통령이 스스로가 아닌 타인의 의지에 조종을 당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의 아찔한 경위를 알게 되면서 분개합니다. 촛불을 손에 들고 광장으로 모여듭니다. 국민으로서 정당한 요구를 외치면서, 관계된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속이 좀 풀립니다.

그런데 의문이 남습니다. 실제로 두 개인이나 집단이 조종하고 조종당하는 관계라면 어떨까요? 사람은 영향 받기 쉽고, 암시에도 약한 존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도 전적으로 한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하는 상황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본 작가 이토 준지의 자선 걸작집

늘 그래왔듯이, 잘 모를 때는 훌륭한 작가들의 작품에서 실마리를 얻게 됩니다. 이번에는 일상의 공포를 극단으로 끌어올려 표현하는 일본 작가 이토 준지의 자선 걸작집을 펼쳐 봅니다. 단편 여럿 중에 <꼭두각시 저택>이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옵니다.

주인공은 떠돌이 인형극단 가족의 둘째 아들입니다. 가족은 아버지, 형, 여동생과 주인공 이렇게 네 사람입니다. 형은 가출하고, 쇠약해진 아버지는 병사합니다. 여동생과 둘 만 남게 된 주인공은 공장에 취직해서 겨우 살아갑니다. 시간이 흐른 어느 날 형에게 편지가 옵니다. 형은 우연히도 같은 동네에 대저택을 가진 부자가 되어 나타납니다. 주인공은 동생과 함께 형의 집을 찾아갑니다.

일본 작가 이토 준지의 단편만화 <꼭두각시 저택>의 한 장면. / 미우

형의 집에 들어가 처음 만난 것은 과거에 극단에서 형이 조종하던 마법사 인형 ‘장 피에르’입니다. 누군가 높은 천장에서 ‘장 피에르’를 조종하고 있습니다. 거실로 들어가 만난 형과 형수, 조카는 천장에서 길게 늘어진 줄에 매달려 있습니다. 역시 누군가의 조종을 받고 있습니다. 의아해 하는 주인공에게 형은 설명합니다. 형이 고용한 사람들이 위에서 피아노 선을 이용해 자신과 가족을 움직이고 있다고. 이를 위해 집 천장에 공간을 따로 두어 만들었다고. 자신은 손가락 외엔 완전히 힘을 빼고 있지만 자유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다고 자랑합니다. 형은 “조종자는 자신이 인형을 조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인형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는 거야. 꼭두각시 인형이야말로 진정한 조종자인 셈”이라고 강조합니다.

생전 아버지는 ‘인형극이라는 것은 인형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형은 ‘인간이 인형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인형이 우리를 움직이고 있다’는 의문을 토로하고 가출했습니다. 주인공은 집에 돌아와서도 조종자보다는 꼭두각시 인형의 위치를 선택한 형의 모습이 영 불편하고 신경이 쓰입니다. 반면 어린 여동생은 형의 집에서 맛본 음식과 예쁜 발레리나 인형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다시 형의 집을 방문한 날, 발레를 추고 싶던 동생은 형 가족처럼 조종 받는 삶을 선택합니다. 주인공은 화를 내며 동생을 만류해보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형은 주인공도 설득하기 위해 갖은 애를 씁니다. 주인공은 혼자 집으로 돌아와 실의에 빠집니다.

다시 형을 찾아간 날, 여동생은 이미 꼭두각시처럼 조종당하며 발레를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발레리나 인형들은 주인공에게 끊임없이 자신들과 같이 꼭두각시 인형이 되는 길을 선택하라고 권합니다. 그 무렵 주인공의 여자친구가 주인공을 수상히 여겨 형 집에 찾아옵니다. 손님을 맞기 위해 나온 마법사 인형 ‘장 피에르’는 그 얼굴을 기억해 냅니다. 어렸을 때 주인공의 집에 놀러 온 여자 친구가 자신을 내팽개쳐 버렸던 일을 떠올립니다. 분노에 휩싸인 ‘장 피에르’가 여자친구에 대한 복수에 정신을 빼앗기면서 전체적으로 가족들을 조종하던 균형이 깨집니다. 인형도 사람도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공중에 버둥버둥 매달려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마법사 인형 장 피에르의 술수였을까요. 형은 자신이 조종하던 인형 중에 장 피에르를 가장 아꼈고 장 피에르를 데리고 집을 떠났습니다. 형이 믿었던 것처럼 꼭두각시 인형이 실은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었다면, 형은 장 피에르가 이끄는 대로 살았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형 스스로가 사람으로서 인형의 행동을 조종하는 역할 대신 인형사의 마음을 지배하는 인형의 역할을 선택했나 봅니다. 아니면 장 피에르가 자신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해서 결국 형의 행동을 조종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인형으로 변해버린 형의 얼굴

만화의 결말은 ‘비극’입니다. 여자친구는 장 피에르의 손에 목숨을 잃고 주인공은 장 피에르를 부숴버립니다. 천장 위 조종자들은 다 쓰러져 있습니다. 동생은 바닥에 떨어져 몸을 가누지 못합니다. 형 가족의 안위를 확인하던 주인공은 이미 인형으로 변해버린 형의 얼굴을 발견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나 검찰 수사 발표를 보면 다양한 인물의 등장과 복잡한 이해관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복잡한 나머지 각자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헷갈립니다. 누가 장 피에르이고, 누가 형일까요? 천장 위 조종자들은, 그리고 만화 속 주인공에 해당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만화 속 형의 말대로 조종당하는 삶은 편합니다. 내가 애쓰지 않아도 조종자가 알아서 처리해 주는 인생은 매력적입니다. 몸의 힘을 뺄 수 있게 되자 동생은 발레를 쉽게 출 수 있었습니다. 힘들여 익히지 않아도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내 일에 대한 고민 없이 따르기만 해도 결과가 생깁니다. 동생이 그 삶을 동경하고 따르기로 결정한 것은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조종자들이 손을 놓으면 동생의 경우처럼 스스로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의지만이 아니라 근력 자체가 없어지니까요. 알고 보면 우리 모두에게 이런 욕망이 있기 때문에, 주체적인 삶을 강조하고 의존적인 마음을 경계하나 봅니다.

인형의 입장에서 조종자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가능한지도 의문입니다. 균형이 깨지면서 가족들이 대롱대롱 공중에 매달려 있을 때, 주인공이 천장에서 확인한 조종자들의 눈빛은 공허했습니다. 밑에서 일어나는 일은 개의치 않고 그냥 ‘인형 놀이’를 계속할 뿐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장 피에르의 행동을 조종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한 형의 욕심이 사달을 냈는지도 모릅니다. 인형이 자신의 마음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여 형 자신도 타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었는지도요.

어떤 역할을 맡았든, 이런 꼭두각시 세계에서 탈피할 방법을 고민하는 누군가가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번에는 다른 작품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최초의 만화 형식 박사 논문입니다. <언플래트닝: 생각의 형태>에서 닉 수재니스는 짜여진 채로 일정하게 흐르는 꼭두각시의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자신이 가꾸는 꽃밭에서 벌레알이 발견되는, 대본에 없는 사건을 직면하고 마음의 동요가 생깁니다. 애벌레가 “너는 누구니?”라는 말을 남기고 번데기가 되기 위하여 몸을 뒤집자 꼭두각시의 세상도 뒤집힙니다. 그제서야 꼭두각시는 자신을 옭아맸던 줄의 존재를 발견합니다. 그 줄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본인이 선택해야 합니다.

만화로 본 세상

만약 누군가 꼭두각시의 삶이나 조종자의 삶을 살고 있었다면 지금의 현실은 대본에 없는 일이어서 당황하고 있을 것입니다. 다행히 광장에 촛불을 들고 서 있는 사람들이 “너는 누구니?”라고 질문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이지 않았던 줄의 존재를 확인하였다면 남은 것은 스스로 줄을 놓거나 푸는 일입니다. 만화 속의 경우처럼 스스로와 소중한 사람들의 삶을 엉망으로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신재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