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로 본 세상]<빵점동맹>-경찰이 시민과 함께 청와대로 간다면?

‘청와대를 지키는 군인들이 발포명령 따위는 가볍게 어겨버린다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그것도 부패한 정부를 지키기 위해 따라야 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허황된 상상일까요?

올해 수능시험일에 눈물 나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맴돌았습니다.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 가방에서 전화벨 소리가 울려서 퇴실 조치를 당한 수험생의 사연이었습니다. 그 학생이 같은 시험장에 있던 수험생들에 보낸 사과가 특히 마음을 울렸어요. 많이들 뭉클했을 겁니다. 게다가 지금 대한민국의 무너진 ‘공무’ 혹은 ‘원칙’과도 함께 생각할 거리가 많은 사연이었던지라 정치적인 이야기도 터져 나왔죠. 그 와중에 저는 ‘공무’와 ‘원칙’에 대해 다시 사유하게 하는 만화가 하나 생각났습니다.

공무와 원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

몇 해 전 네이버 웹툰에서 연재된 <빵점동맹>(마사토끼·joana 작가)에는 그 수험생처럼 공들여 준비한 수능시험을 치르지 못하고 1년을 더 공부해야 하는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수능 전 마지막 모의고사에서 500점 만점을 받았던 백희지는 수능날 아침 나름 가뿐한 마음으로 시험을 치러 나섰습니다. 하지만 지하철역 안에서 심장을 부여잡고 쓰러지는 할머니의 작은 목소리를 듣고 말죠. “도와주….” 수능시험장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하며 그 목소리를 외면하려던 희지는 결국 돌아가서 할머니를 돕습니다. 수능과 생명을 저울질한 자신을 반성하며, 최대한 빨리 119가 도착하면 시험에 늦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하지만 희지는 수능 입실 시간에 늦고 맙니다. 첫 교시 언어영역 시작 시간은 아직 남았으나 정해진 입실 시간에는 10분이 늦었던 겁니다. 희지는 교무실에서 사정을 설명하고 시험을 보려 애쓰지만, 교사는 희지의 이야기를 믿지 않는 눈치로 꼬치꼬치 캐어묻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습니다. 혹 선생님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희지의 눈앞에서 그 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못 믿어서가 아니라…, 학생 말이 다 맞아도 들여보낼 수가 없어. 규칙이 그래.”

마사토끼·joana 작가의 만화 <빵점동맹>의 한 장면./네이버웹툰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리고 ‘규칙’이라는 말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희지는 하루 끙끙 앓고는 다시 일어설 수 있었어요. 규칙이 그렇고, 원칙에는 예외가 없으니까요. 희지는 오히려 ‘퍽 정의로운 사정’을 빌미로 원칙을 넘은 무언가를 기대했던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기까지 합니다. 올해의 그 수험생이 퇴실 조치에 대해서 불만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수험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과 매한가지겠지요. 규칙이 지켜졌기 때문에 얻은 불이익을 감내하는 성숙한 태도입니다. 규칙에 대한 존중과 신뢰를 바탕으로 한 것이기도 할 테고요.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불이익을 감내하고 자신을 추스르기 위해서라도 그 규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이어야 했던 것 같습니다. 희지가 후에 말하거든요. “어제 알겠더라, 규칙이니까 어쩔 수 없다, 그거라도 믿으면서 버텼다는 걸. 인생이 이렇게 꼬인 것도 원칙이 그런 거니까 수긍해야 한다고.”

저 말 속의 ‘어제’는 희지가 한창 재수를 하고 있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 희지는 절망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작년 희지의 수능 응시를 “규칙이 그래”라는 말로 막았던 그 교사가, 다른 일에서 원칙을 어기고 적발된 후에 하는 변명이었어요. “물론 교사에게 원칙, 규칙 그런 게 있긴 있죠, 매뉴얼. 하지만 그 본질이 뭡니까? 원칙은 학생을 위해서 있는 거니까요.” “원칙하고 학생들의 미래가 부딪힌다 그러면 학생들의 미래를 먼저 생각해서 약간 융통성을 발휘해 주는 게 선생님의 역할이기도 하고….” 그 말 이후, 희지는 끝을 모르는 우울에 빠져버립니다. 다니던 재수학원을 끊고 몇 주를 방에 틀어박혀요. 자신의 인생을 꼬이게 한 게 원칙이든 규칙이든 제 입맛대로 집행하는 변덕스런 한 인간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스스로를 지탱하던 무언가가 끊어져버린 거죠.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그 원칙이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변덕스런 인간의 손에서 놀아나는 우스운 것이었다는 게 얼마나 충격이었을까요.

지금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어제’ 이후의 희지와 같은 마음일 것 같습니다. 특히 공무에 대한 믿음이 있는 분들, 원칙을 소중히 여기는 분들일수록 더 그럴 거예요. 가족도 자신도 아닌 ‘나라만을 위한 공적 인간’이라 자임했던 박 대통령이 ‘자신과 지인만을 위한 사적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요. ‘그래도 대통령인데’라는 말이 함의하는 권위도, 그 권위가 당연히 지킬 것이라 믿던 원칙도, 모두 박 대통령과 최순실 커넥션 아래 산산이 부서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대학 입시로 범위를 좁혀보면 공무도 원칙도 더 구체적으로 더럽혀져 있죠. 최순실의 조카와 딸만 해도 그렇잖아요.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공무와 원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이 우리의 대표 자리에 있다는 게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입니다. 또 그 대표의 원칙을 벗어난 사리사욕이 좀처럼 견제 받지 못했다는 것 역시 분통이 터집니다. 권력에 빌붙거나 자리를 보전하기 위해 공무의 원칙을 어기는 것을 선택한 사람들이 그렇게 내버려두었습니다. 희지를 절망하게 한 그 선생처럼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사람들이겠지요. 그런데 눈을 돌려보면, 그런 일들이 밝혀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중에도 시민들은 법을 준수하는 시위를 고수합니다. 하야 혹은 탄핵이라는 법적 형식으로 퇴진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원칙을 존중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원칙을 마음대로 어기는 이를 끌어내리는 데 있어, 이미 더럽혀진 원칙을 지키는 방식이 늘 정답일까요?

공무원이 ‘대통령 하야’ 외치면 불법일까?

원칙에 대해 다각도에서 사유하는 만화를 읽다보니 이런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공무와 관련 없는 시민들이 아니라, 공무를 담당하고 있는 분들이 공무와 원칙을 다시 생각하면 답이 나올지도 모른다고요. 희지의 수능날 선택을 재차 떠올려 봅니다. 희지는 수능과 생명을 저울질한 자신을 뉘우치며 할머니를 도왔습니다. 희지가 수능 입실 시간 전에 들어가지 못했던 것은, 수능이 아무리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해도 타인의 생명에 비할 것은 아니라는 귀한 생각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수능이 수험생에게 얼마나 중합니까. 국가의 공기인 경찰차로 수험생을 시험장에 데려다주는 진풍경도 그 중함을 국가가 지켜주려는 노력일 겁니다. 그만큼 중한 일을 희지는 내팽개치고 불안 속에서 옳은 일을 선택했던 겁니다. 퇴실당하고서 동료 수험생들에게 사과했던 그 학생도 무엇이 중한지를 아는 학생입니다. 그 학생은 자신에게 불이익을 준 원칙을 감내하며, 그 너머에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이 학생들을 떠올리며, 공무를 담당하는 분들께 드리고픈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 전 JTBC 뉴스에서 “공무원이 ‘대통령 하야’ 외치면 불법일까?” 팩트체크를 보셨는지요. 저는 “공무원도 광장에 설 수 있고 외칠 수도 있다”는 결론에 뭉클했습니다. 게다가 공무원들이 시민으로서 광장에 선 모습을 상상하다 만화 같은 상상까지 해버렸습니다. ‘경찰이 차벽을 빼서 시민들에게 길을 터주고 시민들과 함께 청와대로 향한다면?’ 민중의 지팡이인 경찰이 원칙보다 더 큰 민의를 중히 여긴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일 겁니다. 이런 상상도 했습니다. ‘청와대를 지키는 군인들이 발포명령 따위는 가볍게 어겨버린다면?’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그것도 부패한 정부를 지키기 위해 따라야 하지는 않을 거라 믿습니다. 허황된 상상일까요?

만화로 본 세상

광장에 선 시민들이 그저 괜히 평화 시위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들은 공무를 담당하고 있는 분들이 함께하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경찰을 적으로 여기지 않기에 경찰차벽에 꽃 스티커를 붙인 시민들, 의경들 고생할까봐 꽃 스티커를 떼려던 시민들 모두 한마음입니다. 경찰이 길을 열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무와 원칙을 우습게 여길 수 있는 위치에서 마음대로 어기는 사람들을 끌어내리는 일입니다. 공무와 원칙을 무조건 지켜야 할 무엇으로 붙들기만 해서 그 사람들이 끌어내려질까요? 누구보다 공무와 원칙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과 함께해 주시길 부탁합니다. 물론 공무원으로서의 당신은 조역입니다. 시민으로서 광장에 설 때, 당신은 공무와 원칙의 소중함을 알기에 그것을 어기고 시민됨을 선택한, 역사의 주역일 겁니다.

<조익상 만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