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쿠로시오 해류’ 타고 온 한반도계 문화

홍길동 세력이 조선을 탈출해 오키나와 야에야마 제도의 수장이 되어, 오키나와 본도의 류큐왕국에 대항해 싸우다 패배했다고 추정한 가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다.

오키나와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홍길동의 율도국이 혹 오키나와가 아니냐고 묻는 분이 종종 있다. 한반도로부터 수천㎞ 이상 떨어져 있는 오키나와에 허균의 소설 속 주인공 홍길동이 조선을 탈출해 율도국을 건설했다는 세간의 속설은 한국의 방송에서도 한두 번 다루어진 적이 있다.

물론 이런 대중들의 속설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논의가 허무맹랑한 상상력의 소산이라고 부정만 할 수도 없다.

실제로 <홍길동전> 연구의 권위자인 연세대 국문과 설성경 교수가 <홍길동전의 비밀>(2004)에서 이런 주장을 자못 치밀하게 펼친 바 있으며, 오키나와의 고중세사를 검토해 보면 한반도계 유물과 영향의 흔적이 적지 않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오키나와의 역사학자인 아라시로 토시아키 교수가 쓴 <오키나와에서 본 역사풍경>을 읽으면서 나 역시 고대 한반도인들의 문화유적에 대한 기술을 보고 기묘한 느낌에 빠져든 적이 있다.

일본 오키나와에 있는 수리성. / 경향신문

가령 오키나와에서 이른바 역사시대가 형성되기 시작된 11세기 후반의 유물과 유적을 보면, 한반도 문화의 흔적이 잘 나타난다. 그 중 하나는 이른바 가무이 야키(龜燒)로 불리는 항아리 형 토기다.

이 토기는 아마미 대도의 도쿠노지마(德之島)에서 만들어져 류큐열도 전역에 유통되어 쌀과 곡식 등의 저장용 토기로 사용되었는데, 가야 토기를 변형한 일본의 스에키 토기보다는 고려 토기에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수의 고려 도기와 기와 발굴
중세 오키나와의 토착 호족들이 건설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스쿠(城), 우리말로는 성곽 유적에서도 한반도계 문화의 흔적이 잘 나타난다.

가령 1200년 전후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었으며, 일종의 왕성 구실을 했던 가츠렌(勝連)과 우라소에(浦添) 구스쿠의 유적에서는 제작 연대가 적혀 있는 다수의 고려 기와가 발굴되었으며, 통일 류큐왕국의 왕성인 슈리성(首里城)에서도 다수의 기와와 고려 도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 한 가지, 도래인 문화와 기술의 흔적을 알 수 있는 성곽의 축조 방식이다. 오키나와는 융기석회암 지대로 성곽을 구축하는 데 있어서도 이 석회암을 활용했다. 오키나와에 산재하고 있는 성곽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양식으로 구축되어 있다.

먼저 자연 그대로의 바위를 쌓아서 구축하는 방식인데, 이는 오키나와 본도에 비해 문화발전 수준이 낮았던 야에야마 제도의 성곽에서 잘 나타난다. 다음으로 석회암을 정사각형으로 절단하여 축조하는 방식이 있고, 마치 거북이 등짝 모양으로 사각형과 오각형으로 잘라 구릉의 형세에 맞춰 축조하는 방식이 있다. 오키나와 본도에 잘 나타나는 양식이다.

그런데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성곽 축조방식은 일본보다는 대체로 조선과 중국의 선진기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 멀고 먼 이역에 한반도계 문화의 흔적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떻게 고중세의 한반도 인들과 오키나와 인들이 문화적 상호작용을 하게 된 것일까?

오키나와 민속무용단이 한국을 방문해 이채로운 전통무용을 선보이고 있다. / 경향신문

물론 거기에는 한반도와 일본, 중국 내부에서 발생한 왕조의 교체와 전란을 포함한 정치적 혼란이 사람과 기술, 문화를 이동하고 혼합하게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자연의 규정력은 쿠로시오(黑潮) 해류가 가져다 준 우연과 필연 때문이 아니었을까?

대륙에 ‘실크로드’가 있듯 바다에도 문명 간 교역로인 ‘해상의 길’이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은 일본의 민속학자인 야나기타 구니오였다. 그는 동중국해에서 한반도의 동해에 이르는 쿠로시오 해류와 계절풍을 이용하여, 중국 남부인들이 오키나와를 거쳐 일본에 정착해 고대 일본 민족의 기원이 되었다고 상상했다.

그가 ‘해상의 길’의 근거로 찾은 것은 ‘벼농사 문화’, 그 가운데서도 ‘수전농법’이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일본 문화의 기원을 도래인(한반도인)들에 의해 구축된 것으로 간주하는 ‘일본인 기원론’을 부정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다.

지금은 일본 학계에서조차 내셔널리즘의 소산으로 비판·부정되고 있는 ‘해상의 길’ 가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동아시아인들의 문화 교류와 혼합의 단서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고려사절요> 등을 검토해 보면, 고려시대 이래 중세 조선과 오키나와(유구국)의 교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수백 건의 기록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유독 조선과 오키나와 민중의 표류·난파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무려 2년여에 걸쳐 야에야마, 미야코, 오키나와 본도, 큐슈,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귀환한 제주인 김비의의 기록조차 존재한다.

조선의 어민들 표류 기록 자주 등장
주로 조선 남서해안의 어민들이 항해 중에 태풍과 풍랑을 만나 오키나와까지 표류했다는 이야기인데, 이들의 오키나와 행을 가능케 한 것은 무엇보다도 ‘쿠로시오 해류’의 존재 때문이었다.

오키나와인들이 이른바 동남아와 동아시아를 항해했던 ‘대교역시대’로 간주하고 있는 15세기 해상 중계무역 역시 ‘쿠로시오 해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연세대 설성경 교수가 홍길동 세력이 조선을 탈출해 오키나와 야에야마 제도의 수장이 되어, 중앙집권적 전제왕권이 확립되어 있던 오키나와 본도의 류큐왕국에 대항해 싸우다 패배했다고 추정한 <홍길동전의 비밀>에서 제기한 가설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추측이다.

일각에서 제기하고 있는 대로 고려시대의 삼별초 세력이나 조선시대의 홍길동 세력에게도 이 ‘해상의 길’은 이미 알려져 있었을 것이다.

우리 역사에 자주 출몰하는 ‘왜구’ 역시 이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동아시아의 각지에 출몰했다. 물론 이때의 왜구는 단지 일본의 해적이라기보다는 동아시아의 빈궁 민중들이 무장 상업세력으로 전화한 한·중·일 연합 세력이었을 확률이 높고, 그들의 근거지는 현재의 야에야마 제도와 타이완 인근이었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다.

이러한 동아시아 교류사의 흔적을 사심 없이 탐구하기 위해서는 근대 이후에 성립된 내셔널리즘적 역사인식을 지양해야 한다.

아마도 고중세의 평범한 민중들은 오늘과 같은 강력한 민족의식이나 국가의식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국가나 민족의식 대신 그들에게 오히려 절실했던 아이덴티티의 근거는 ‘생활권’이 아니었을까.

지배층들이야 근대 이전에도 ‘국경’ 개념을 인식했겠지만, ‘변경’에서 이문화와 접촉해 살아가던 민중들은 쿠로시오 해류와 계절풍을 따라 이동하거나 표류해 정착한 장소에서 새로운 생활을 구축하고자 했을 것이다.

오키나와로부터 온 편지

설사 홍길동이 오키나와로 이동한 것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또 다른 ‘생활권’의 발견이 아니었을까.

<이명원 문학평론가·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racan@kh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