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내시경]‘남겨진 사람들’의 쓸쓸함과 절망

연극 <바냐 아저씨> | 명동예술극장 제공

체호프의 4대 희곡에는 언제나 ‘방문했다 떠나는 사람’과 ‘남아 있는 사람’이 등장한다. <갈매기>에서는 아르카지나와 트리고린이 트레플레프와 니나가 살고 있는 호숫가를 방문했다가 떠나고, <바냐 아저씨>에서는 세레브랴코프 교수 내외가 바냐의 시골 영지를 방문했다가 떠난다.

<세 자매>에서는 베르쉬닌을 비롯한 군인들이 세 자매가 살고 있는 마을에 주둔했다가 떠나고, <벚꽃동산>에서는 라네프스카야 부인 일행이 자신의 집에 찾아왔다가 경매로 팔린 벚꽃동산을 뒤로 한 채 떠난다. 네 작품 모두 누군가의 방문으로, 혹은 그로 인한 변화로 인해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고 누군가가 떠나면서 막이 내린다.

흥미로운 것은 체호프의 시선이 이들 방문했다 떠나는 사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맞춰져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바냐 아저씨>와 <세 자매>에서 이러한 시선이 도드라지는데, 이 두 작품은 지루하고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들이 누군가의 방문으로 인해 어떤 변화를 맞이하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을 꿈꿔 보지만 결국 방문객들은 떠나고 주인공은 다시 예전과 똑같은 삶으로 돌아간다는 점에서 ‘방문과 떠남’이라는 비슷한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방문은 대개 ‘사랑’이라는 감정과 함께 찾아왔다 떠난다. <세 자매> 중 마샤와 베르쉬닌의 사랑과 이별이나 <바냐 아저씨> 중 바냐와 아스트로프의 엘레나에 대한 연모가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연극 <바냐 아저씨> | 명동예술극장 제공

사실 체호프의 희곡에는 언제나 사랑에 빠져 있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체호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것은 사랑과 이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후에 ‘남은 삶’이다.

늘 실패로 끝나버리는 사랑 이후 여전히 흘러가는 일상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방문과 떠남’이란 구조는 체호프의 희곡에서 형식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의미적인 차원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매일매일 똑같이 권태로운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들에게 어느 날 찾아온 사랑은 지루한 일상에 새로운 변화를 주는 그들 인생의 방문객이다. 하지만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을 불러일으켰던 사랑이 떠난 뒤 남는 것은 예전과 똑같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삶이고, 그럼에도 살아가야만 하는 잔인한 현실이다.

<바냐 아저씨>는 바로 이렇게 ‘남겨진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남은 삶’을 그리고자 했던 체호프의 시선이 가장 또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시골 영지에서 매일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며 삶에 지쳐가던 바냐와 아스트로프는 이곳을 찾은 교수의 젊은 부인 엘레나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끼고, 바냐의 조카 소냐 역시 의사인 아스뜨로프에 대한 연모로 설레어 한다.

그러나 일련의 소동이 벌어진 뒤 엘레나는 교수와 함께 급하게 영지를 떠나고, 아스트로프 역시 소냐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

사랑(혹은 다른 삶에의 가능성)이 떠나고 난 뒤 그들 앞에 남겨진 것은 예전과 똑같은, 아니 어쩌면 예전보다 더 힘겹고 무겁게 느껴질 일상이다. 마지막에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바냐에게 소냐가 건네는 위로는 이렇듯 ‘남겨진 삶’의 무게를 짊어진 모든 사람들에게 건네는 체호프의 잔인하고도 연민어린 위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내시경

이번에 <바냐 아저씨>의 연출을 맡은 이성열 역시 이 마지막 장면에 가장 공을 들인 듯하다. 얽히고설킨 감정들로 인한 크고 작은 사건들이 유난히 시끌벅적하게 지나가고 난 뒤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무대는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 고요한 정적에 빠져들고, 일을 시작한 바냐와 소냐의 느린 손놀림과 아스트로프의 무거운 발걸음이 ‘남겨진 사람들’의 쓸쓸함과 절망을 무대 가득 채운다. 11월 24일까지 명동예술극장

김주연 <연극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