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책]여자들 - 서른 네 명 여성의 내면을 비추다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1만3000원

조선희 전 영상자료원장은 몇 년 전 <씨네21> 편집장 시절에 쓴 한 칼럼에서 <한겨레>신문 문화부의 옛 동료를 두고 “그에게 ‘지면을 사유화하고 신문에다 연애편지를 쓴다’고 농반진반으로 비난하곤 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함께 문학면을 맡던 시절에 자신이 “작가들에 대한 호불호를 자기검열했다면 그는 자신의 호불호를 거리낌없이 공표했다”는 것이다.

기자의 기사가 불편부당한 객관적 문체를 견지해야 한다는 건 동·서를 막론한 저널리즘의 묵계다. 상대적 유연성이 허용되는 문화면 기사라 하더라도 이 원칙을 깨뜨리는 건 운좋게 너그러운 데스크를 만나거나 깐깐한 데스크의 압력을 감수할 만큼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취재 대상에 대한 ‘편애’를 공개적으로 드러내는 기사를 썼다고 조씨가 거론한 이는 저널리스트 고종석씨다.

<한국일보>에 연재한 칼럼을 묶은 <여자들>은 고씨의 23번째 책이다. 소설 세 권을 제외하면 모두 에세이 범주에 묶을 수 있는 그의 책들이 다루는 주제는 크게 보아 ‘언어’와 ‘언론’이라는 두 갈림길을 향해 뻗어 있다. <감염된 언어> <언문세설> <국어의 풍경들> 같은 책들이 대학원 과정에서 언어학을 공부한 언어학도로서의 관심을 투영한 책이라면 <자유의 무늬> <서얼단상> <히스토리아> 같은 책들은 세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시비를 가리고 논평하려는 저널리스트적 관심을 더 강하게 담고 있다.

책의 주제는 제목 그대로 동서고금의 ‘여자들’ 서른 네 명이다. 인물 선정에 어떤 ‘객관적’ 원칙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매우 편파적이고 불공정”하게 “특별히 마음이 가는 여자들만 살폈다”. 그 여자들은 로자 룩셈부르크, 아룬다티 로이, 로자 파크스처럼 견결한 신념과 강인한 실천력을 겸비한 투사형 여성부터 마리 앙투아네트, 최진실, 오프라 윈프리처럼 대중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여성까지 모두 포괄한다. 실존 인물만 다룬 것도 아니다.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가 창조한 탐정 제인 마플이나 영화 <겨울여자>의 주인공 이화처럼 가상의 인물도 포함됐다.

글이 정신의 산물이고 정신이 어떤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한 저자의 글들은 대개 그 저자가 애호하는 주제의 변주일 것이다. 저자의 책을 꾸준히 따라 읽은 독자들에게 <여자들>은 ‘나올 책이 나왔다’는 느낌을 준다. 이전 책들에서도 저자는 여성에 대한 애정을 여러 차례 드러낸 바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그 애정은 성적 함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 애정은 여성의 육체적 매력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생물학적 남녀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내재해 있는 여성성에 대한 친밀감에 가깝다.

이주의 책

이 책에 묶인 서른 네 편의 에세이가 다루는 여성들이 살아간 시기와 사회적 활동의 범위는 하나로 묶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저자는 그 인물들의 성공보다는 좌절, 거창한 대의를 위한 희생보다는 그 뒤의 섬약한 내면에 더 눈길을 주는 듯하다. 책에서 다룬 인물들은 그들이 기득권 세력의 일부였든, 그것에 대항한 쪽에 서 있었든 대체로 소수자의 표지를 지니고 있다. 저자는 그녀들의 삶을 특유의 박식함과 섬세함으로 압축했다. 일찍부터 저자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정확하고 아름다운 문장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이 책의 매력이다.

<정원식 기자 bachwsik@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