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흠결을 찾을 수 없는 ‘고려판 세종’ 아세요?
  • 인쇄
  • |
  • 목록
  • |
  • 복사하기
  • 페이스북
  • 트위터
  • 밴드
서울 종로 구기동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확인된 ‘장의사’ 명기와. 이 건물터에서는 12~13세기 기와와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서울 종로 구기동 고려시대 건물터에서 확인된 ‘장의사’ 명기와. 이 건물터에서는 12~13세기 기와와 청자편 등이 출토됐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판 세종대왕’, ‘도무지 비판할 거리가 1도 없는 군주’…. 아니 고려 역사에 이런 임금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고려사>에 나오는 표현이고요.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조에서도 “국난에 빠진 고려를 중흥시킨 영명한 군주”라며 롤모델로 삼은 분입니다. 바로 고려 현종(재위 1009~1031)입니다. 마침 KBS 대하드라마 <고려 거란 전쟁>이 바로 이 고려 현종 시대를 다루고 있죠.

■12세기 이전 ‘장의사’ 명문기와의 의미

실제로 현종의 자취와 유산이 개성(개경)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서 고고학 발굴을 통해 나타났습니다.

올해 3월의 일입니다. 서울 종로 신영동(실제 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고려시대 건물터(1382㎡)가 확인됐는데요. 건물터의 입지를 보니 개경의 만월대를 빼닮았고요. 출토 유물 또한 격이 엄청 높습니다. 연대를 판단할 수 있는 명문 기와(‘승안 3년’·1198)가 나왔어요. 지난 8월 또 하나 특기할 만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됐어요.

기왕(3월)에 조사된 서울 신영동(구기동) 유적에서 10m 떨어진 곳에서 난방시설을 갖춘 건물터 1기가 노출됐는데요. 명문기와(‘장의사’명)와 함께 12~13세기 청자·도기 조각도 나왔습니다. ‘장의사’는 이 두 건물터에서 남쪽으로 350m 떨어진 현 세검정초교 자리에 있었던 사찰입니다.

어쨌든 두 건물터의 발굴성과는 ‘고려 현종’과 직·간접적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됩니다. 우선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뒤편 석굴에 조성된 등신좌상(승가대가상)을 봅시다. 좌상의 광배에 ‘태평 4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요. ‘태평’은 요(거란) 성종의 연호(1021~1031)이니 ‘태평 4년’은 1024년(현종 15)에 해당합니다. 현종이 승가굴에 조성된 승가대사상에 광배를 붙였다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지난 3월 서울 신영동(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는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지난 3월 서울 신영동(구기동( 도시형 생활주택 부지에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1382㎡). 확인된 건물지 가운데는 잔존 면적(길이 20.1×너비 5.5m)만 33.44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수도문물연구원 제공

■고려 국왕들의 삼각산 행차

이번에 발굴된 두 건물터(12~13세기)는 장의사터(세검정초교)와 삼각산(북한산)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고려사> 등은 ‘장의사-삼각산 승가사’와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전하고 있어요. 고려 국왕이 개경을 떠나 승가사(굴)와 장의사에 행차하는 기사가 속출한다는 겁니다. 즉 “1090년(선종 7) 10월 19일 왕(선종)이 승가굴과 장의사에 행차했다”는 기록이 그렇고요.

9년 뒤인 1099년 숙종(1095~1105)의 삼각산 행차도 눈길을 끌죠. “왕이 왕비 및 원자, 대각국사 의천(문종의 동생·1055~1101)과 함께 삼각산 승가굴에 행차해 재를 올린 뒤 갖가지 선물을 하사했다”는 겁니다. 1104년(숙종 9) 8월 5일에는 숙종이 승가굴에 들러 기우제를 지냅니다. 이후 예종(재위 1105~1122)이 3차례에 걸쳐 승가굴과 장의사를 방문했고요. 1167년에는 의종(재위 1146~1170)이 승가사와 장의사에 들렀습니다.

그렇다면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조성된 ‘두 건물터’는 국왕이나 왕실, 귀족들이 머무는 숙소가 아니었을까요.

■왕이 된 사생아

개경의 고려 국왕들이 왜 멀리 떨어진 삼각산 승가사까지 지체 높은 몸을 이끌고 올라가 재를 올렸을까요.

여기서 현종이 ‘짜잔~’ 하고 나타납니다. 사실 고려 현종에게는 숨기고 싶은 출생의 비밀이 있죠. 우선 고려 왕실에서는 근친혼이 성행했다는 것을 염두에 둡시다.

현종의 아버지 왕욱(王郁·추존왕 안종·?~996)은 태조 왕건(재위 918~943)의 여덟 번째 아들입니다. 어머니는 헌정왕후(?~992)인데요. 헌정왕후는 친언니인 헌애왕후(964~1029·목종의 어머니·천추태후)와 함께 태조의 7번째 아들인 왕욱(王旭·추존왕 대종)의 딸이었습니다.

두 자매(헌애왕후·헌정왕후)는 경종(태조의 넷째 아들인 광종의 맏아들)의 3번째와 4번째 부인이 됐습니다. 두 자매가 사촌 오빠(경종)와 혼인한 겁니다. 그렇다면 현종의 부모인 왕욱(안종·추존왕)과 헌정왕후는 삼촌-조카 사이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삼촌-조카가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어섭니다.

“남편(경종)이 죽고 사가에서 살던 헌정왕후가 꿈에서 눈 오줌이 온 나라에 흘러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점쟁이가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될 것’이라 풀이했다. 헌정왕후는 ‘과부가 어찌 아들을 낳겠느냐’고 쓴웃음을 지었다.”(<고려사> ‘후비열전’)

그러나 점쟁이의 말이 맞았습니다. 왕욱이 남편(경종)이 승하한 뒤 사가(私家)에 나가 있던 헌정왕후와 사통해 아들(현종)을 낳은 겁니다. 이와 같은 불륜 행각이 들통 나면서 왕욱(안종)은 유배를 떠났고요. 충격을 받은 헌정왕후는 갑자기 태동(胎動)을 느껴 아이를 낳다가 승하했는데요. 사생아로 태어난 아이는 ‘대량원군’이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잇달아 확인된 고려건물터.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잇달아 확인된 고려건물터.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비정한 이모의 암살 기도

그런데 경종의 맏아들인 목종(재위 997~1009)이 성종의 뒤를 이어 등극하자 상황이 급변합니다. 대량원군(현종)의 이모지만 목종의 친어머니인 헌애왕후가 ‘견제’에 들어간 겁니다. ‘천추전’에서 아들(목종)을 대신해 섭정한 헌애왕후는 ‘천추태후’로 일컬어지며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데요.

그러나 아들인 목종의 성적 취향(동성애) 때문에 후사를 기대할 수 없게 되면서 딴마음을 품게 됩니다. 천추태후가 내연관계인 김치양(?~1009)과 낳은 아들을 후계자로 민 겁니다. 그러자 조카인 대량원군은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천추태후는 조카를 강제 출가시켜 삼각산(신혈사)으로 쫓아내는데요.

권력에 눈이 먼 이모는 조카를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고려사>는 “삼각산에 (천추)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 해치려 했다. 신혈사의 노승이 방에 땅굴을 파서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설치했다”(‘세가·현종 총서’)고 했어요.

■‘꼬끼요와 어근당’

그 와중에 대량원군이 지었다는 시 두 편을 볼까요.

“백운봉에서 흘러나온… 물이… 머지않아 용궁(龍宮)에 도달하리라(…不多時日到龍宮)”와 “…꽈리 튼 새끼뱀… 하루아침에 용이 되는 것 어렵지 않으리라(一旦成龍也不難)…”는 내용을 보면 심상치 않죠. “곧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선언했어요.

그런 대량원군이 꿈에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었답니다. 술사의 꿈풀이가 기막혔습니다.

“닭 우는 소리는 ‘꼬끼오(고귀위·高貴位·높고 귀한 자리)’이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御近當·임금 자리가 가깝다)’이니 이는 왕위에 오를 징조”라 했다는 겁니다. 결국 강조(?~1010)의 정변(1009)이 일어나 김치양 부자가 죽임을 당하고요.

대량원군, 즉 현종에게도 우호적이었던 목종도 결국 시해당하고 마는데요.

올해 발굴된 고려건물터는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올해 발굴된 고려건물터는 장의사와 승가사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만장일치로 왕위에 오르다

흥미로운 대목이 또 있어요. 천추태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대량원군’을 차기대권 0순위로 꼽았습니다.

천추태후의 아들인 목종조차 “이제 태조의 후손은 오직 대량원군만이 남아 있다”(<고려사> ‘열전 채충순’)고 단언했는데요. 목종과 후사를 논의한 최항(?~1024) 같은 신하도 “왕위를 계승할 분은 오직 대량원군”이라고 했고요.

‘강조의 변’의 장본인인 강조도 목종을 폐위시킨 뒤 대량원군을 모셔 왕위에 올렸습니다.

그만큼 “다른 성씨(김치양의 아들)에게 사직이 돌아가면 큰일난다”(<고려사> ‘열전·채충순’)는 위기의식이 컸던 거고요. 그때 ‘낭중지추’였던 대량원군이 유일한 대안으로 꼽혔던 겁니다.

■조롱당한 임금

그렇게 만장일치로 등극한 현종에게 큰 위기가 닥쳤습니다. 거란의 성종(야율융서·재위 982~1031)이 ‘강조의 정변’을 문책한다면서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죠(1010년 11월).

현종은 강감찬(948~1031)의 권유로 전라도 나주로 몽진(피란)을 떠납니다. 피란길에 현종은 여러 차례 곤욕을 치릅니다. 어떤 지방에서는 하급 관리들이 “왕께서는 나의 이름과 얼굴을 아느냐”며 조롱했고요. 숙소로 쳐들어온 무리 때문에 가까스로 몸을 피한 적도 있습니다. 전주에서는 반란에 가까운 무력시위가 벌어졌습니다.

건국 초 아직 민심이 고려조정에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결국 거란과의 전쟁은 현종이 거란에 입조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끝났습니다(1011년 1월 11일).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현종의 후손인 선종, 숙종, 예종, 인종 등이 승가사와 장의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현종의 후손인 선종, 숙종, 예종, 인종 등이 승가사와 장의사를 여러 차례 방문했다고 기록했다. 문화재청 제공

■흥화진대첩, 귀주대첩

그러나 현종은 그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또 거란이 요구한 강동 6성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사이 성과 보루를 꾸준히 쌓아 또다시 벌어질 전쟁에 대비했습니다. 강감찬 같은 인물을 서북면행영도통사의 책임을 맡겨 대비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청사에 길이 빛날 귀주대첩을 이룹니다(1018~1019).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라죠. 이후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죠.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사치스러운 의식과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들의 횡포도 엄금하는 한편 굶주린 백성들의 구제에 힘씁니다. 성종 때 폐지된 연등회·팔관회를 부활시키고요. 설총(655~?)·최치원(857~?) 등을 추봉하고 문묘(공자묘)에 그들의 신주를 모셨습니다. 거란군의 침략을 불심으로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의 제작에 착수, 6000권의 대부분을 완성했습니다. 1018년(현종 9) 5도양계체제라는 군현제의 골격을 구축합니다. 중앙집권제로 민심을 다잡고자 한 겁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그후 고려는 현종의 후손이 왕계를 이어가는데요. 덕종(재위 1031~1034), 정종(재위 1034~1046), 문종(재위 1046~1083), 선종(재위 1083~1094), 숙종(재위 1095~1105), 예종(재위 1105~1122), 인종(재위 1122~1146) 등으로 이어집니다. 현종~인종의 130여 년간을 ‘고려의 전성기’라 합니다.

‘현종=세종대왕’이란 표현은 <고려사> ‘세가·고종’에 나와 있어요. 즉 1254년 10월 19일 고종(1213~1259)이 역대 왕들의 신위를 모신 태묘에 나가 “국난(몽골 침입)을 극복하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는데요. 이때 ‘현종=세종대왕’으로 지칭합니다.

“세종대왕(현종)께서… 큰 난리를 평정해 중흥과 반정(反正)의 공을 세워….”

본래 ‘세종’은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거나 중흥시킨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왕의 사후에 붙이는 호칭)입니다.

물론 고려 현종이 정식으로 ‘세종’의 묘호를 받지는 않았는데요. 그러나 고려시대 내내 위기에 빠진 나라의 기틀을 잡은 ‘세종대왕’으로 예우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무결점 국왕’

보통 어떤 인물, 심지어 임금을 평가하는 사관들의 잣대는 ‘칼’ 같죠. 장점도 나열하지만, 단점 또한 그냥 지나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현종은 어떨까요. 완전히 ‘무결점 성군’으로 추앙됩니다. 당대의 사관인 최충(984~1068)과 이제현의 평가를 볼까요. “현종은… 오랑캐와 화호를 맺고, 전쟁을 멈추고 문덕을 닦으며, 세금과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공평하게 해서… 전국이 평안하고 농업과 잠업이 풍년이 들었다. 나라를 중흥시킨 왕(中興之主)이다.”

이 정도도 무결점 평론인데요. 이제현의 ‘한 줄 정리’가 눈길을 끕니다.

“현종을 두고는 ‘나는 비판할 거리가 없다(如顯宗 吾無間然者乎)’는 것이다.”(<고려사절요> ‘현종 1031년 5월 25일’)

올해 발굴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는 승가사와 장의사를 방문한 고려 국왕들의 숙소나 쉼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올해 발굴조사로 확인된 고려시대 건물터는 승가사와 장의사를 방문한 고려 국왕들의 숙소나 쉼터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도문물연구원 제공

■조선조에서도 칭찬 릴레이

조선조 들어서도 고려 현종과 관련된 평가가 ‘극찬’으로 일관됩니다.

양성지(1415~1482)는 “전 왕조의 현종은 영명한 군주”(<세조실록> 1457년 3월 15일)라고 극찬하고요. 유성룡(1542~1607)과 윤두수(1533~1601)는 “고려 현종은 거란의 침입 때문에 나주로 피란했지만 결국 고려의 중흥을 이뤘다”고 강조합니다.(<선조실록> 1593년 윤11월 29일, 1594년 9월 19일 등)

어떻습니까. 우리가 잘 몰라봬서 그렇지 고려 현종, ‘찐’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군주가 아닙니까. 너무 일찍(40세) 승하한 게 안타깝기는 합니다. 어쨌든 그런 분의 흔적, 자취가 요즘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잇달아 등장하고 있죠. 후대의 임금들은 ‘성지순례 코스’로 현종의 박해 장소인 삼각산을 찾은 게 분명합니다.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대첩이다. 두 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었다.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었다.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기록화

3차 고려-거란 전쟁(1018~1019)에서 두 차례 대첩이 있었다. 첫 번째는 소가죽으로 강둑을 막아 터뜨린 흥화진(의주)대첩이다. 두 번째는 철수하는 거란군을 귀주성 인근 구릉에서 격멸한 귀주대첩이 있었다. 10만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가 수천 명뿐이었다. 이후엔 다시는 고려를 넘보지 못했다. 전쟁기념관 소장 기록화

<이기환 역사 스토리텔러 lkh0745@naver.com>

이기환의 Hi-story바로가기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