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물 전성시대]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신화와 전설, SF답게 소화하기

신화와 전래설화를 SF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까? 로저 젤라즈니의 장편 <빛의 왕>과 단편 ‘스테인레스강 흡혈귀’를 보면 불가능하진 않다. 환상적 소재라도 SF의 기본틀과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 상상을 초월하는 시너지가 생긴다. 외계 식민행성을 무대로 과학엘리트가 인도신화의 신들을 자처하면서 다수대중을 무지몽매한 상태로 방치해 신판 카스트제도를 공고히 하거나 인류가 멸망한 세상에서 고독에 울부짖는 로봇 흡혈귀를 다룬 이야기라니. 상상이나 해봤겠나.

국내외 작가들의 신화전설SF선집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 표지 / 알마

국내외 작가들의 신화전설SF선집 <일곱 번째 달 일곱 번째 밤>에 수록된 작품 대다수는 SF시각에서 아쉬움이 많다. 신화 전설과 SF 서사의 유기적 융합이나 과학소설다운 재해석의 독창성 면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면의 한계상 몇 작품만 둘러보자.

개인적으로 기대가 컸던 홍지운(dcdc)의 ‘아흔아홉의 야수가 죽으면’은 제주도 ‘아흔아홉 골’ 설화에서 출발했다지만 실상은 <아키라>나 <얼터드 카본>의 변종 같아 신선함이 덜하다. 특히 뇌사자의 영혼을 어떻게 인코딩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과학적 사실과 어긋나는 묘사도 있다. “은하계 중심부에 있는 터미널이기에 그 어느 곳에서보다 찬란히 빛나는 별빛들이 항구를 비춘다”는 문장이 그렇다. 지구의 밤하늘에서 은하수 중앙을 따라 길게 드리운 검은 띠는 은하 중심과 태양계 사이에 암흑성운들이 다수 포진해 별빛을 막은 결과다. 은하 중앙에서도 주위가 암흑성운들에 에워싸여 바깥의 별들을 제대로 볼 수 없음을 뜻한다. 많고 많은 우주의 별 중에서 정작 주인공이 정붙일 곳 하나 없다는 심정을 드러낸 비유지만, 근거가 없다 보니 외려 감정이입을 저해한다.

남유하의 ‘거인 소녀’는 제주도 설문대할망 전설이 소재라지만 서사의 전개는 할리우드에서 몇 번이고 리메이크한 거대여인 시리즈를 연상시킨다. 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핍박받는 소수자들을 거대여인이란 신체의 특징에 비유했지만 참신한 접근 같지는 않다.

남세오의 ‘서복이 지나간 우주에서’는 진시황을 위해 불로초를 찾는 서복과 동남동녀의 우주버전이다. 행성 상공의 부서진 위성 잔해에서 희귀금속을 일일이 손으로 채집하는 우주비행사를 해녀에 비유하는데, 중력을 떨치고 우주공간까지 오르려면 로켓엔진에 많은 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만큼 희귀원소 돌덩이 몇 꾸러미 정도로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

장르물 전성시대

이영인의 ‘불모의 고향’은 외계의 용족이 탐라를 주기적으로 드나들다 원시 인류와 조우하는 이야기로 지구 동물원설(Zoo hypothesis·보호구역 가설)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단편에도 사실관계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 소설에서 사람들은 뗏목에 가까운 배를 타고 제주도에 도착한다. 1만여년 전 구석기인들은 탐라까지 배가 아니라 걸어서 왔다(고산리 유적). 마지막 빙하기가 끝날 때만 해도 제주도가 대륙의 일부였으니까. 서해안과 탐라 사이에 바다는 없었다. 지구온난화로 빙하의 녹은 물이 고여 주변 바다와 합류할 때까지 구석기인들은 걸어서 제주도에 당도할 시간이 적어도 1000년가량 있었다.

<고장원 SF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