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 걸고 추천하는 맛집](3)김영익 | 좋은 사람과는 꼭 이곳에 간다

고양시 ‘초록바구니’

맛집 정보가 넘쳐나는데 믿고 갈 만한 식당은 찾기 어렵습니다. 낯선 지역이나 여행길에선 더 그렇지요. 그 지역에 아는 사람이 있다면 물어서라도 갈 텐데요. 열심히 검색을 해보지만 좀처럼 확신이 서질 않습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정말 신뢰할 만한 맛집을 건져보기로 했습니다. 주간경향이 각계각층의 명사를 찾아 이름을 걸고 추천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누구나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는 ‘인생 맛집’ 공개, 지금 시작합니다.

애널리스트란 직업은 하루종일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고 자료를 써야 한다. 또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 이름이 세상에 좀더 알려지면 더 많은 자료를 작성해야 하고, 더 많은 사람을 대면해야 한다. 그래서 대부분 식사를 밖에서 해결한다. 주말에나 집에서 식사를 할까 말까일 정도로 바쁘게 살아왔다. 아내는 이런 나 때문에 음식 솜씨가 형편없다고 자평한다. 집에서 음식을 만들 기회가 거의 없다 보니 음식 솜씨가 사라져버렸다는 푸념이다.

최근 아내와 함께 다시 찾은 ‘초록바구니’에서 김영익 교수가 식사를 하고 있다. / 김영익 교수 제공

아내의 또 다른 핑계가 있다. 어떤 음식을 해줘도 불평없이 잘 먹는단다. 맞다. 내겐 모든 음식이 다 맛있다. 음식이 맛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할아버지에 이어 아버지도 시골에서 서당 훈장을 하셨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은 여유로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후론 가세가 기울었다. 아버지가 두 동생(나에게는 숙부)의 대학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답을 내주고 심지어는 사랑채까지 팔아야 했다. 정작 아들인 나는 등록금을 낼 수 없어서 중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나무를 하러 다녔다. ‘시장이 반찬이다’라는 말이 있다. 허기진 배를 채우려면 감자 한 알도 맛있는 법이다. 요즘도 그렇다. 다음 일정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먹는 김밥이나 국수도 맛있다. 어쩌다 부자들에게 초대받아 먹는 고급 호텔의 저녁 식사에서도 나는 가장 먼저 접시를 비운다.

그렇다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은 음식점이 없는 건 아니다. ‘초록바구니’라는 음식점이 있다. 네 살 난 아이가 이곳을 알려주었다. 토요일이면 회사에 나가 다음 주의 금융시장을 전망하는 자료를 쓰곤 한다. 미국 시장이 우리 시간으로 토요일 새벽에 끝나기 때문에 미국의 주가나 금리 등을 보고 자료를 쓸 수밖에 없어 주말 근무는 불가피하다. 그날도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라는 말이 크게 들렸다. 한 후배 애널리스트가 급한 보고서를 작성하려고 아이를 데리고 출근한 모양이었다. 그 후배 애널리스트의 얼굴이 빨개졌다. “할아버지가 아니야, 박사님이라고 해야 해.” 지금은 손자 둘을 둔 할아버지가 맞지만, 그때는 아니었다.

코스를 주문하면 마지막에 나오는 디저트. 비주얼만큼이나 깔끔한 맛을 자랑한다. / 김영익 교수 제공

처음 듣는 할아버지 소리여서 어색했지만, 그 아이가 귀여워 부모에게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 장소는 알아서 정하라고 했다. 그들이 정한 장소가 바로 서울 이촌동에 있던 초록바구니였다. 나는 누구와의 약속이든 좀 먼저 가서 기다리는 습관이 있다. 약속된 시간에 그 아이가 엄마 품에 안긴 채로 나타났다. 나를 보자마자 “박사 할아버지”라고 했다. 후배 애널리스트가 ‘박사님’이라 부르라고 몇 번 연습을 시켰다는데, 그 아이의 눈에 나는 변함없이 할아버지였다. 아이의 눈만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정직한 눈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먹고 싶은 음식이야말로 맛있는 음식이다. 나는 그 뒤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초록바구니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눈다. 그중 한 사람이 취환 한중문화우호협회 이사장이다. 그는 한국 남성과 결혼한 중국 여성이다. 좋은 일을 참 많이 하는 사람이다. 중국의 가난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한국 여행을 시켜준다. 내가 준 작은 크레파스 선물에 해맑은 눈물로 대답하던 그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어른거린다. 취환 이사장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한국 아이들에게 중국 여행을 보내주기도 한다. 코로나19 이전에는 한국의 <춘향전>과 <심청전>을 중국 주요 도시에서 공연하게 했다. 중국의 전통 무용과 극을 한국에 소개하기도 했다. 취환 이사장도 가끔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초록바구니에 간다고 한다. 나를 ‘할아버지’가 아닌 ‘삼촌’이라 부르는 그의 이쁜 딸 영서도 그 음식점에서 몇 번 보았다. 영서는 베이징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지금까지 모두 33번에 걸쳐 후배 애널리스트나 제자들의 주례를 섰다. 한번은 후배 애널리스트 주례를 서려고 갔다가 하객을 맞이하던 신부 어머니가 나를 너무도 반갑게 맞아준 일이 있었다. TV 등 각종 언론에서 나를 자주 봤고, 팬이 됐다고 했다. 엉겁결에 그만 저녁을 모시겠다고 해버렸다. 약속은 지켜야 했다. 후배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초록바구니에서 신혼부부와 그 신부의 어머니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어머니도 “좋아하는 분들 모시고 와야겠다”고 했다.

다양한 메뉴를 맛볼 수 있는 초록바구니의 코스 요리 / 김영익 교수 제공

나는 제자들 ‘밥 사주는 것’을 좋아한다. 수업을 받는 학생들 조를 짜서 저녁 식사를 함께한다. 때로는 학생들 남자 친구나 여자 친구까지 초대한다. 한 여학생은 시간을 두고 두 남자 친구를 데려왔다. 나중에 그 친구 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 번째 남자 친구를 사귀고 있다고 했다. 많은 사람을 만나봐야 한다고 말하고선 “다시 보자”고 했더니, 이제는 확신이 들면 같이 오겠다며 수줍게 고개를 떨군다.

좋은 직장에서 일하는 한 제자가 있다. 여자 친구가 생겼다고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왔다. 이쁘다고 했더니 마음도 이쁘다고 했다. 정말 그런가 싶어 초록바구니에 초대했다. 1년 정도 사귀면서 결혼 결심을 하고 여자 친구 부모님을 뵈었는데 거절당했다고 털어놨다. 목소리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 제자를 초록바구니에 데려갈 순 없었다. 학교 근처 다른 식당에서 소주 몇 잔을 마셨다. 조만간 하늘이 주신 인연을 만나리라 위로하면서….

최근 인터뷰 때문에 경향신문사를 방문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분이 인터뷰 장소인 여적향을 친절하게 안내해줬다. 바로 며칠 후 그분의 전화를 받았다. 주간경향 편집장이라고 했다. 맛집을 소개하는 글을 한 편 써달라고 했다. “아무거나 잘 먹고 특별히 가는 맛집은 없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했더니 더 정중하게 부탁을 한다. 거절을 못 하는 게 ‘나’라는 사람이다. 최근에는 내 일정 관리를 한 회사에 맡겼을 정도다. 음식점을 소개할 수 있는 사진이 있으면 더 좋다길래 아내와 함께 다시 초록바구니를 찾았다. 얼마 전에 경기도 일산으로 이전한 터라 이촌동에 있을 때보다 오가는 시간이 더 걸리긴 했지만 잘 다녀왔다 싶다. 나오는 접시 하나하나에 셰프의 정성이 여전히 가득하다. 서빙하는 분의 음식 소개도 조용하고 깊은 맛이 있다. 초록바구니의 모토는 ‘맛있게 먹고 건강하게 살자’이다. 손님에게 다양한 음식의 맛을 경험토록 해 즐거움을 드리겠다는 목표다. 나는 다양한 맛을 즐기기 위해 주로 ‘코스’를 주문하지만, 가성비가 높은 단품도 있다. 요즘 유행하는 ‘비건’ 맛집으로, 가성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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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는 아버지를 보면 세상에서 제일 부럽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인 애널리스트로 일하느라 딸과 대화할 시간도 거의 갖지 못했다. 다음에는 딸의 손을 꼭 잡고 초록바구니에 가야겠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가는 곳이야말로 진정한 맛집이 아닐까.

필자는 대신증권 리서치센터장, 대신경제연구소 경제조사실장 및 대표이사, 하나대투증권 부사장 등을 거쳐 지금은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 겸 경제 전문 유튜버로 활약 중이다. 버블 붕괴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을 미리 예견해서 한국판 ‘닥터 둠’이라고 불린다. 그가 이번에는 주간경향 독자들을 위해 종목 대신 맛집을 추천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