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외국인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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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김상민 기자

지난 칼럼에서 이민에 관한 내용을 다뤘다. 이민을 확대하든 말든, 그에 관해 논의하려면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외국인이라는 범주를 재검토하는 작업이다.

국적법과 실제의 차이

한국에서 ‘우리나라 사람 vs 외국인’은 인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인식 틀 중 하나로 작동한다. 외국인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 ‘한국 국적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고 답할 것이다. 국적법 역시 그렇게 정의한다. 그런데 저 말이 사용되는 실제 사례를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행정안전부는 매년 ‘지방자치단체 외국인 주민 현황’을 발표한다. 이 통계가 사용하는 세부 범주를 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다. ‘외국인 주민’은 다음 세 가지 하위 범주로 나뉜다. 1)한국 국적을 가지지 않은 자 2)한국 국적 취득자 3)국내 출생한 외국인 주민 자녀. 그런데 방금 말한 외국인의 정의에 따르면, ‘한국 국적 취득자’는 한국인 아닌가? 한국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 왜 ‘외국인 주민’으로 분류되는 것일까? 외국인이 한국 국적을 취득하면 한국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이 되는 건가?

‘국내 출생한 외국인 주민 자녀’에는 귀화인의 자녀도 포함된다. 이들은 출생과 동시에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이지만, ‘외국인 주민’으로 분류되는 것이다. 이 통계는 ‘다문화 가구’에 관한 내용도 포함하는데, ‘한국 국적 취득자’와 한국인이 결혼한 경우, 즉 한국인끼리 결혼했을 때도 다문화 가구로 분류된다.

이런 이상한 분류법의 실제 의도를 드러내는 내용이 있다. 한국인이 한국 국적을 상실했다가 다시 회복한 경우에는 ‘한국 국적을 취득한 외국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분류법 전체가 일종의 ‘오리지널 한국인’을 전제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오리지널이 아닌 사람은 한국 국적을 취득해도 여전히 외국인으로 분류되고, 오리지널은 외국인이 됐다가 국적을 회복해도 한국인으로 인정된다.

분별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을 보고 기겁할 수밖에 없다. 누군가 ‘국가의 인종주의’라고 비난해도 반박하기 어려울 것이다. 생각해 보라. 만일 당신이 한국에서 귀화인의 자식으로 태어나, 한국 국적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는데, 국가가 당신을 ‘외국인 주민’으로, 당신 가족을 ‘다문화 가구’로 분류한다면, 명백한 차별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외국인이라는 말 역시 항상 국적에 관련된 것은 아니다. ‘일반적인 한국인의 외모’와 다른 사람을 보면 무조건 외국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다. 한국에서는 언젠가부터 ‘외국인 예능’이 하나의 장르가 됐는데 한국으로 귀화한 사람도 종종 출연한다. 이들이 외국인으로 인식되는 이유는 국적이 아니라 ‘일반적인 한국인’과 다른 신체적 특징이나 개인사를 가졌다는 점에 있지 않은가?

모든 국가가 국적에 따라 자국 시민과 타국 시민을 구별하지만, 한국에서 ‘우리나라 사람’이란 단지 한국 국적뿐 아니라 한국인 부모, 한국어 사용 능력, 한국인의 외모 등을 모두 갖춘 사람을 말한다. 이런 조건 중 만족시키는 것이 적을수록 외국인으로 간주될 가능성이 커진다. 한 마디로 한국에서 외국인이란 다른 국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아닌 사람’을 지칭한다. 이런 식의 이해 자체가 차별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수많은 차별적 행위가 여기에서 비롯한다.

‘우리’만의 세상

‘우리’와 ‘우리 아닌 사람’을 어떻게 구별하는지에 따라 한 문화의 특징이 결정된다. 거칠게 말해서 유럽인은 자신의 관점에서 비유럽인에 대한 인식 체계를 구축하면서, 세계 전체를 ‘우리 유럽인’의 표준에 따라 재조직하려고 시도해 왔다. 반면 동아시아인은 ‘우리 아닌 사람’에게는 무관심하고, 오로지 ‘우리’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유럽인은 타자를 자신의 존재론적 분류표 안에 배치하는 데 집착하지만, 동아시아인은 ‘우리’가 될 수 있는 조건을 강화하면서 순수한 ‘우리’를 유지하는 데 몰두한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가 북한이다. ‘우리’에 대한 그들의 집착을 보라.) 이 두 가지 경향 모두 폭력적 차별로 드러날 수 있지만, 차별의 종류와 형태는 완전히 달라진다. 이민자에 대한 유럽과 한국의 대응 방식이 전혀 다른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국어, 우리말, 우리글, 우리나라 따위의 표현을 보면 꽤 흥미롭다. 여기엔 ‘국(國)’이 어느 나라인지, ‘우리’가 누구인지가 없다. 영국에서는 영어를, 프랑스에서는 프랑스어를 가르치지만, 한국 과목 이름은 한국어가 아니라 국어다. 우리말과 우리글은 한국어와 한글을 대체하는 고유명사로 널리 사용된다. 이런 단어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발화될 것을 가정하고 있다. 즉 화자와 청자 모두 한국어를 하는 한국인일 때만 정상 작동한다. 한국어를 하는 미국인이 모였을 때, 누군가 ‘우리말은 배우기 쉽다’라고 말한다면, 이는 한국어와 영어 중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이런 상황은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디즈니플러스에서 제공하는 영상의 엔딩 크레딧에는 언어별 더빙 및 자막 제작진이 나온다. 다른 모든 언어는 일본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등으로 표기되는데, 오로지 한국어의 경우에만 ‘한국어 제작’이 아니라 ‘우리말 제작’으로 돼 있다. 한국인 시청자 대부분은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하겠지만, 한번 상상해 보자. 전 세계 사람들이 보는 엔딩 크레딧에 ‘english version’이 아니라 ‘our language version’이라고 표기돼 있다면, 시청자는 혼란스럽지 않을까?

우리말 같은 표현이 고유명사로 사용되는 것은 ‘우리말 사용자’와 ‘우리나라 사람’이 일치하는 순수한 언어 공간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 또는 ‘외국어’를 모국어로 갖고 있는 한국인이 그 공간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말’은 고유명사로서의 가치를 상실하고, 애매한 기표가 돼버린다. 물론 그런 순수한 언어 공간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어가 공용어인 국가는 한국만이 아니고, 요즘 같은 시대에 한국인만 한국어를 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한 우리’를 가정하고 있는 건 비단 언어 영역만이 아니다. 한국의 사회관계, 문화, 국가 제도 등 거의 모든 것이 ‘우리’만 존재하는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외국인’과 ‘다문화’는 그런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한 인식 도구다. 하지만 그런 도구가 작동할 수 있는 시대는 이미 끝나지 않았는가.

<박이대승 정치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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